추상 표현주의와 오토마티즘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명칭으로 뉴욕 화파에 속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훌륭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 화파-1940년대와 1950년대의 제1 세대 회화’ 전시회에 뉴욕 화파로 알려지게 된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사실상 양식적인 일관성은 거의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도 일치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미술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이 그들을 하나의 화파로 묶을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것도 아니어서 추상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추상 표현주의 작품들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인 액션 페인팅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자기 표현적 붓놀림을 구사하지도 않았다.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 속의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가 손의 움직임에 대한 의식적 통제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회화나 드로잉 또는 저술과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으로서의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스트들에 의해 우연의 효과를 노린 데서 확산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오토마티즘을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사용했던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을 통해 무의식을 탐험하여 철저하게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오토마티즘을 한 구절로 언급했는데, 문학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드로잉과 회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마술적 예술의 비밀들 ... 다른 이들로 하여금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를 갖다 주게 하라. 마음을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돌입하라. 너를 가장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만들어라. 네 자신을 자신의 천재성, 자신의 재능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재능과 천재성으로부터 떼어 놓아라.” 후에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 Le Surrealisme et la peinture>(1928)에 적었다. “초현실주의의 근본적인 발견”은 “어떤 선입견적 의도도 없이 쓰기를 재촉하는 펜과 그리기를 재촉하는 연필이,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최소한 시인이 자신 안에 감추어 둔 감정적인 모든 것을 드러내줄 수 있는, 매우 고귀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르네 파스롱의 <간추린 초현실주의 백과사전>(1984)에 의하면 “오토마티즘적인 초현실주의 드로잉의 진정한 발명가”는 앙드레 마송Andre Masson(1896~1987)이다. “1923년 혹은 1924년경 마송의 드로잉들은 여기저기에 짐승이나 색의 윤곽선을 암시하는 듯한 ‘방황하는 선들’로 발전했다.” 마송은 곧 보다 정교한 오토마티즘 기법을 개발했는데 접착성 물질로 캔버스에 드로잉한 후 색 모래를 흩뿌려서 색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우아즈의 바라니 태생 프랑스 화가 앙드레 마송은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1912년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심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 중의 경험은 마송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호기심, 모든 사물의 상징적 통일에 대한 모호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철학적으로 진전시킬 만한 지성이 부족했던 마송은 예술 활동을 통해 그런 사고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데 전념했다. 1950년에 쓴 <그린다는 기쁨 Le Plaisir de Peindre>에 적었다. “이것은 본능보다 사고가, 아니면 흔히 영감이라 불리는 것보다 지성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화가이자 시인들이 다루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무의식과 의식, 직관과 이해는 초의식 상태에서 눈부신 일치를 이루도록 변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마송은 1919년 파리로 돌아갔고 입체주의, 특히 후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앙드레 드랭의 영향도 받았다. 1922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인 미로, 에른스트, 시인 미셀 레리스, 조르주 랭부르와 친교했으며, 랭부르는 마송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써주었다. 브르통의 주목을 받아 마송은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오토마티즘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실행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무의식의 힘에 대한 탐구’로 여기면서 1928년 브르통과의 의견 충돌 후 초현실주의 운동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 기법으로 작업했다. 물감 대신 풀을 이용해 캔버스 위에 오토마티즘적인 그림을 그린 후 채색된 모래를 뿌려 색채를 입히는 방식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즉흥적이고 암시적이며 상징적이었다.
1940년 미국으로 간 마송이 뉴욕 그룹의 피신해 온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 아슐리 고르키와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초기 단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마송의 모래 회화에 나타난 오토마티즘과 잭슨 폴록이 실행한 미국 액션 페인팅 사이의 유사성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는 1946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 마송은 매우 뛰어난 기법과 때로 모호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내적 시각, 외형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눈을 결합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그린다는 기쁨>에 적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제작한 작품에서 놀라움의 효과가 사라진 뒤 나타나는 진정한 힘은 다음 세 가지 조건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첫째는 선행한 명상의 강도, 둘째는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셋째는 이 시대 미술에 걸맞는 회화적 수단을 알아내고자 하는 필요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