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3

 

또 다른 오토마티즘의 유형으로는 벨기에계 프랑스 시인이며 화가 앙리 미쇼Henri Michaux(1899~1980)가 스스로 ‘유령주의’라고 명명한 방법이 있다. 192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문학계에 명성을 쌓은 미쇼는 1924년 파리로 갔고, 1926 처음으로 회화와 소묘를 제작했다. 1937~40년에 본격적으로 회화에 매진하여 유령주의로 명명한 검정색 배경 위에 과슈로 그리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오토마티즘 기법으로 그린 이 서정적이면서도 꿈과 같은 추상 작품들은 심령 이미지, 신화, 유령이 존재하는 모호한 세계를 창출해냈다.
오토마티즘은 마타Matta(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 1911~)를 통해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고르키와 머더웰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산티아고 태생의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간간이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파리의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9년부터 초현실주의와 결별한 1948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며 미국의 초현실주의, 특히 고르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칭한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오토마티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가끔은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1년 멕시코 여행 후 이런 자각에 이르러 대지의 힘과 성적인 힘, 우주적인 힘이 만나 폭발적인 대격변을 일으키는 모습을 표현했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점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미국 화가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보스다니크 마노크 아도이안Vosdaning Manoog Adoian, 1905~48)는 1909년 터키인의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 연방의 수도 예리반으로 와서 인쇄공과 제본공으로 일했다. 192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보스턴의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다. 1925년 뉴욕으로 이사하여 그랜드 센트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적 추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는 기하적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 기법을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1940년대 초에 뉴욕에 거주하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비로소 고유한 양식에 도달했다. 이런 영향 하에서 미로의 양식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이 있는 추상화를 그렸다. 고르키의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의 작품을 솜씨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말년의 작품에서는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은 유년 시절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고, 잠시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스탠터드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 Journals>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40년 뉴욕으로 와서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뉴욕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특히 오토마티즘 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머더웰은 1951년 뉴욕의 헌터 칼리지의 부교수로 임용되었고 1959년까지 재직했다.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했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1940년대 초 머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비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화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두 번째 주제인 ‘광활 Open’이 등장했는데 이 연작은 기하적 형태와 짙은 색채를 사용한 색면 회화로 대형 화면을 이용해 색채의 감각적 효과를 탐구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판화가로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추상 표현주의 초기의 표현적인 강렬함과 장엄함을 바탕으로 1960년대 초의 작품 <아프리카>에서 이미지를 따온 세 번째 주제가 등장했다. 머더웰을 포함하여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는 점점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고,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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