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창조: 비구상 미술


추상-창조: 비구상 미술Abstraction-Creation: Art non-figuratif은 1931년 2월 파리에서 추상 혹은 비대상 미술을 추구하는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결성한 그룹 명칭이다. 이들은 1930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 추상 미술전을 열고 이듬해에 그룹을 결성했다. 추상-창조 그룹은 1930년에 창립된 원과 사각형 그룹을 계승한 것으로, 국적 제한이 없었고, 조직의 구속력이 약해 한 때 회원이 4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룹의 명칭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들은 소위 ‘창조적인’ 추상의 발전을 꾀했는데 ‘창조적인’ 추상이란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1888~1964)를 비롯한 몇몇 프랑스 화가들이 발전시킨 추상화나 영국의 대상적 추상처럼 자연의 외관에서 출발한 추상이 아니라 비구상적 요소들, 대개는 기하적 요소로 이루어진 추상 작품들을 의미한다.
보르도 국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0년 파리로 가서 생계를 위해 기자로 일하면서 계속 회화에 몰두한 비시에르는 초기에 위풍당당한 기세와 미묘한 매력을 지닌 고향 풍경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전혀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감동적이다. 파리로 돌아온 뒤 1919년 살롱 도톤을 통해 처음 작품을 전시했고, 이때 앙드레 로트Andre Lhote(1885~1962)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샤를-에두아르 잔레Charles-Edouard Jeanneret, 1887~1965)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글을 기고했다.
보르도 태생의 로트는 10년 동안 상업적인 목조각공으로 일한 뒤 1906년경 흑인 조각과 고갱의 회화에 크게 감명을 받아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06년 파리로 가서 살롱 데 쟁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 전시했다. 1910년 드뤼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앙드레 살몽, 기욤 아폴리네르, 자크 리비에르 같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에 주목했고 파리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트는 1911년 입체주의를 접하고 입체주의의 매너리즘적인 양식을 사용하여 특히 항구 풍경과 운동경기 같은 일상적인 장면과 사물을 묘사했다. 로트는 인물과 사물을 분해하여 주도 면밀한 윤곽선과 순색으로 이루어진 유사 기하적 평면들로 재구성하는데, 1917년작 <럭비>는 그런 한 예이다.
로트는 1917~40년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 La Nouvelle Revue Francaise>에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상세히 서술한 평론과 논설을 기고했으며, 작가로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갖고 1923~50년 미술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출간했다. 로트는 1922년 자신이 설립한 아카데미 몽파르나스를 통해 프랑스는 물론 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로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풍경, 정물, 실내 정경, 신화, 초상 등을 망라한다. 모든 작품은 색조의 변화가 없는 선명한 색채로 칠해지고 정밀하게 표현된 평면과 반기하적 형태들이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체계로 세심히 구성되어 있다. 그의 정물화 중에는 퓨리즘 작품과 유사한 은근한 매력을 지닌 것이 있으나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디자인과 리듬은 대게 즉흥적이기보다는 지적인 사고를 거쳐 나온 것이다.
스위스계 프랑스 건축가이며 화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고향 쇼드퐁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고 조판공 훈련을 받았다. 1905년에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현대 건축 발전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하나가 되었다. 회화와 판화에서도 건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입체주의의 여러 혁신적인 기법에 깊이 몰두했다가 후에 종합적 입체주의는 공허한 장식 미술로 변질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1918년 아메데 오장팡Amedee Ozenfant(1886~1966)을 만나 이 같은 견해를 밝힌 <입체주의 이후 Apres le Cubisme>라는 저서를 공동 집필하여 출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회화 작품에 ‘잔레’로 서명했다. 1920년 오장팡과 함께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1920년대의 새로운 미학 정신을 훌륭히 서술했으며, 기계 미학을 표방한 퓨리즘Purism 운동을 탄생시켰다. 퓨리즘은 1918년 무렵부터 1925년경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기계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과 관련되어 있었다. 퓨리즘은 르 코르뷔지에와 오장팡에 의해 주도되었고 <입체주의 이후>에서 퓨리즘의 토대를 규정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입체주의 이후>에 적었다. “새로운 정신으로 활기가 넘치는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정신이란 명확한 개념에 의해 좌우되는 건설적이고 종합적인 정신이다.” 그는 장식 자체를 위한 장식을 혐오하는 퓨리즘의 태도를 계속 견지했지만, 회화 작품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해갔고 양감의 표현도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0년대 후반 그의 작품에서는 더욱 풍부한 상상력과 서정성이 나타났지만 지나친 표현을 철저히 혐오하는 기본 정신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는 1930년에 프랑스로 귀화했으며 이후 회화보다는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 건축가로서 상당한 영예와 명성을 얻었다.
엔의 생캉탱 태생의 프랑스 화가 오장팡은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뒤 생캉탱 미술 학교에서 소묘를 공부했다. 오장팡은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체주의 그룹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1915년 이후 입체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장식적 추상으로 퇴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견해를 1915~17년 직접 편집하던 비평지 <엘랑 L'Elan>에 발표했다. 오장팡은 자신이 창간한 <엘랑>을 통해 종합적 입체주의의 장식적 경향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으며 뒤에 퓨리즘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했는데 이는 1925년까지 퓨리즘과 기계 미학의 주요 토론장이 되었다. 1924년 르 코르뷔지에와 공동으로 <현대 회화 La Peinture Moderne>를 집필했는데 후에 그는 이를 “에스프리 누보 운동의 요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1928년 그의 가장 중요산 저서 <미술 Art>를 출간했다. 이 책은 1931년 영국에서 <현대 미술의 기초 Foundations of Modern Art>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1952년에는 뉴욕에서도 출간되었다. 그는 1931~38년에 대규모 구성 작품 <삶>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100여 명 이상의 인물들이 인류의 단결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퓨리즘 양식으로 그린 것이다. 1938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장팡 미술 학교를 세웠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성설 theory of preformation’을 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은 세계의 위대한 걸작들은 ‘발견자’가 그것을 찾아내어 생명을 불어넣기를 기다리며 항상 인류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즘 시기와 1930년대 동안의 오장팡의 작품은 경제 개념, 곧 가장 경제적인 수단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개념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 작품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인상을 주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좀더 세밀한 세부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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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리스인이 자연은 질서정연하며 합목적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운동이나 정지의 근원이 된다면서 이런 내적 원리를 지녔을 때 “하나의 자연 혹은 본성을 지녔다”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한 그는 궁극적 원인을 형상, 질료, 운동, 목적 넷으로 보고 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 혹은 형상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질료보다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여러 개의 형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각 개물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질료가 형상을 얻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생성으로 보았고, 사물의 실재, 즉 현실적 활동energeia 혹은 완성태entelekheia로 보았다.
그에게 질료는 가능태dynamis로서 참나무 씨앗이 참나무의 가능태인 것처럼 사물로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질료 자체는 형상을 결여하기 때문에 단지 가능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질료가 형상을 욕구할 때 생기는 것이 운동으로 이는 가능태가 현실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질료가 욕구하는 운동의 대상인 형상을 그는 본래 신성을 지닌 좋은 것으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원인들이나 다름없었는데 목적을 갖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필연적인 목적을 갖고 작용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는데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적자생존5)에 대해 논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한 이유는 사건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발생하므로 일련의 사건이 한 가지 완성될 경우 앞서 일어난 사건들은 완성을 위한 단계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지막 완성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6)
이런 식의 설명은 동식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과학의 발전에는 장애가 되고 특히 윤리문제에 걸림돌이 된다.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형상들 가운데 모든 타자를 움직이는 단일한 ‘부동의 원동자 First Mover’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순수형상’으로서 누스Nous(Reason) 혹은 사유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그에게 자연은 누스가 “자신을 사유하는 것” 혹은 “사유의 사유”인 것이다.
누스 혹은 사유는 훗날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신의 개념에 적용되었다.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뉴턴Sir Isaac Newton(1642-1727)의 ‘제1법칙 운동’에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하여 비과학적인 사고였음을 증명했다.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 운동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은 채 운동할 경우 그 물체가 일정한 속도로 직선운동을 계속한다.
이는 진공 상태에서 증명된다.
외적 원인은 운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못되고 다만 속도와 방향의 변화에만 작용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자연 운동인 ‘부동의 원동자’가 일으키는 원운동을 순수형상으로서 누스로 이해했는데 러셀은 이는 운동의 방향에 있어 지속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뉴턴의 중력법칙에 의해 중심을 향해 계속해서 이끄는 어떤 힘을 요구하므로 또한 비과학적인 사고임을 지적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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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8

 

뉴욕 주 버펄로 태생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는 1931~3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36~37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와 미국 미술가 학교에서, 그리고 1945~51년에는 뉴욕 대학의 파인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1944~45년 전쟁 동안에는 미국 해군 사진사로 일했고 1944~47년에는 뉴욕의 신문 <PM>지의 평론가와 만화가로 일했다. 1937~47년 미국 추상 미술가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라인하르트의 회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식상 급격하게 변화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추상이었다. 193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양쪽으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아 뚜렷하고 윤곽선이 분명한 기하적 양식을 사용했다. 1940년대에는 올오버 회화 단계를 거쳐 1940년대 말에는 몇몇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머더웰의 작품에 가까워졌다. 그는 머더웰과 공동으로 <미국의 현대 예술가들 Modern Artists in America>(1950)을 펴냈다.
1950년대 라인하르트의 완숙된 양식은 예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에서 발전되어 나왔다. 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채를 어둡게 하고 색채의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채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 회화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1952년경에는 화면을 대칭적으로 3등분 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나아갔다. 1947~67년 브루클린 칼리지, 1959~67년까지는 헌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 와이오밍 대학, 예일 대학, 시러큐스 대학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양식적 발전에 대한 지적 근거를 제시하는 교조적인 글을 자주 썼다.
일군의 새로운 예술가들, 특히 필립 거스턴, 콘래드 마카-렐리, 제임스 브룩스, 브래들리 워커 톰린 등이 1950년대 초에 추상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여 추상 표현주의는 뉴욕 화파의 상징적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의 미국 화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1913~80)은 1916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0년 로스앤젤레스의 오티스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석달 동안 공부한 후 유럽을 여행했고 1934년 멕시코 벽화가들을 알게 되었다. 1935~42년 연방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벽화를 제작했는데 이를 통해 멕시코 벽화에서 얻은 경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으며 동시에 대규모로 구상적 추상을 실험할 수 있었다. 1941~44년 아이오와 주립 대학, 1945~47년 워싱턴 주에 있는 여러 대학, 1951~59년 뉴욕의 여러 대학, 1953~57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가르쳤고, 짧은 기간 동안 다른 여러 곳에서도 강의했다. 1940년대 초에도 여전히 초현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까우면서도 고유한 구상적 방식으로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거스턴은 1940년대 말 즈음에 도시의 풍경을 어렴풋이 암시하는 추상을 실험했으며 어느 정도는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성주의보다는 낭만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표현적, 기하적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1950년경에는 작품에서 구상적인 요소를 제거했다. 그의 이와 같은 방식은 ‘추상적 인상주의’로 묘사되었으며 마카-렐리와 같이 추상 표현주의자들 가운데 좀더 서정적인 화가들과 연관되었다. 1955년경부터는 형태와 분리된 추상적인 색채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색채의 형태’에 관해 언급한 화가들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엷고 부드럽게 처리한 배경의 중앙에 밝고 강렬한 색채의 영역들을 배치함으로써 화면 위의 상호 작용과 연관되어 이미지들이 육중하고 지배적인 효과를 갖도록 했다. 1960년대에는 회색조의 색채가 이전의 밝은 색채를 서서히 대체했고, 희미하게 대상을 연상시키는 특성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풍자적이며 고야처럼 그로테스크한 새로운 구상적 방식을 도입했다. 거스턴은 만화적 기법과, 어울리지 않는 거친 색채를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야만적인 방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KKK단을 주제로 한 장면과 허나상적인 사회적 비평을 그렸다. 1975년 일련의 회화 작품을 제작하면서 1950년대의 풍부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되돌아갔고 이전의 작품에서 나타났던 KKK단의 ‘두목들’은 밝은 적색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후기 작품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거스턴은 주로 뉴욕 화파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추상 표현주의자 그룹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에 적었다.
“우리가 추상 미술에서 이어받은 신화 속에는 무언가 우스꽝스럽고 탐욕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회화는 자율적이며 순수하고 스스로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그 한계를 결정함을 이룬다. 그러나 회화란 ‘순수하지 않다’. 회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순수하지 않음’을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자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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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7

 

로스코의 가까운 친구 틀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은 노스다코타 주 그랜딘 태생으로 스포캔 대학과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1935~41년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41~43년 전쟁 산업에 종사한 뒤 1946~50년 캘리포니아 미술 학교에서 가르쳤고, 1951~60년 뉴욕에 거주할 때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63년 은퇴한 후에는 메릴랜드 주의 웨스트민스터에 거주했다. 스틸은 여러 양식들을 실험한 후 1946년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확고한 추상 표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대형 그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스틸은 두껍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들을 그렸다.
뉴욕 태생으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1921년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공부한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는 미국으로 돌아와 1923년 쿠퍼 유니언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의 창립에 가담했고 이듬해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s Projet에 참여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1935년 미국 정부가 제창한 사업으로 194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업의 목적은 경제 공황의 타격을 받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국가의 예술적 잠재력을 공공건물과 장소의 장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연방 예술 프로젝트는 뉴 딜 정책의 일환으로 앞서 수립된 프로젝트들을 토대로 기획되었다. 1933년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1933년 겨울부터 1934년에 걸쳐 예술가들은 주급제로 공공사업에 고용되었다. 프로젝트가 종료된 1943년 6월까지 약 3,600명의 예술가들이 1,600점에 달하는 작품에 동원되었으며, 1,200점 이상의 벽화가 의뢰되었다. 안타깝게도 연방 예술 프로젝트 하에 제작된 벽화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한두 점의 예비 습작만이 전해진다.
고틀리브는 1930년대 후반 원시미술과 미국 인디언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런 관심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완숙기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 시기의 풍경화는 특히 비현실적 공간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1937년부터 거주한 애리조나 주 사막의 풍경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고틀리브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1941년 이후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접촉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예술적 소재의 근원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초현실주의 논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욕 화파의 일원인 그는 특히 1941~51년의 <상형문자> 연작으로 잘 알려졌다. 이 작품들은 여러 구획으로 나눠져 있으며 각각의 구획은 도시적인 형태로 채워져 있는데 이런 형태는 무의식적 연상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프로이트의 상징이나 추상적인 신화의 개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틀리브는 매우 독창적인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으며 세계 각지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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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예술을 자연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동·식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보고 만물이 변화의 현상 안에서 굴복하지 않고 견뎌낸다고 보았다.
이런 활동적인 원리가 변화의 생산물의 본질을 정의한다.
우리는 자연에 관한 그의 견해를 먼저 이해한 후 예술이 자연의 명백한 순환적 본성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불확실하고 혼돈된 감성을 따르는 것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자연학』과 『천체에 대하여 On the Heavens』에 상세히 적혀 있는데 후자는 전자가 논의하다 남긴 대목에서 시작된다.
이 두 권의 책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1564-1642)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자연에 대해 보편적인 정의를 내렸는데 자연의 본성에 속하는 것들은 그 자체 운동과 정지의 원리들을 갖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연은 그리스인이 ‘퓌시스 phusis(physis)’라고 부른 것에 관한 학문으로 퓌시스는 우리가 번역하는 자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 말은 생성becoming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는데 예를 들면 참나무 씨앗의 본성nature이 참나무가 되고, 뽕나무 씨앗의 본성이 뽕나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본성의 뜻을 자연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낟알의 성장뿐 아니라 낟알 자체도 자연에 포함시키면서 “자연이란 표현은 어떤 자연적 과정 및 그 과정의 산물 양자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본성 혹은 자연은 사물이 나서 자라 최종 상태에 이르는 것이며, 이는 그 사물의 존재 목적의 본성 혹은 자연이 최종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은 사물이 지닌 본질로 존재하고, 어떤 사물은 외적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동·식물과 순수 질료(원소)는 그 성질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그에게 자연은 사물의 질료를 지칭하는 동시에 형상, 즉 사물의 본질, 자연을 이끄는 힘이다.
따라서 사물들은 동작 혹은 운동의 내면적 원리를 지니는데 그가 말하는 운동이란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운동보다 넓은 의미로 물리적 운동에 특성의 변화와 크기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이원적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자연을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조건 하에서도 일정하게 지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이원적 개념은 중세에까지 통용되었으며, 현재에도 이처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연과 정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연에 대한 두 종류의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타타르키비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 혹은 타타르키비츠의 말로 “그리스적 표현의 애매모호성”2)이 로마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이유를 12세기에 아베뢰즈Averroes(1126-98)가 퓌시스phusis를 나투라natura로 번역했기 때문인 것으로 꼽았다.

“그리하여 나투라는 가시적 사물들 전부summa rerum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을 의미했다. 중세 때는 그 애매모호성을 무해하게 만들기 위해 각각 다른 형용사를 붙여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을 구별지음으로써 자연이란 표현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보유했다.”3)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뱅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1264)의 『사면경 Speculum quadruplex』에서 확인된다면서 아퀴나스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 및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1260-1327?)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개념을 받아들였고, 또한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와 스피노자Benedict (Baruch) Spinoza(1632-77) 등과 같은 몇몇 근대 철학자들도 이를 수용했다고 적었다.

신의 개념은 자연의 개념에서 비롯했는데 뱅상 드 보베는 『사면경』에서 “능산적 자연은 곧 자연물들의 지고한 규범 혹은 패턴인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라고 했다.
그는 능산적 자연을 조물주로 보았고 소산적 자연을 피조물로 보았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에는 자연을 창조에 한정했는데 신은 자연의 창조주이나 자연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해석은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예술론에 영향을 끼쳤는데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할 때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과 가시적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을 의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엔네아데스』 5장 초에서 “예술은 한낱 가시적 사물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원천을 이루는 원리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자연물의 생성원리, 자연물을 산출해내는 힘으로서의 자연, 즉 가시적 사물 전체를 생산해내었고 또 생산해내고 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천 년 후 알베르티도 『회화론』에서 플로티누스가 말한 의미로서의 자연을 언급했다.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 오늘날에까지도 수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주제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 전부를 가리키는 자연이었던 반면 세잔의 주제는 플로티누스와 알베르티가 말한 자연이었다고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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