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仁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love가 적당할 것입니다.
義는 justice로 번역하는 게 타당합니다.
Love란 말은 우리에게 물리적인 사랑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지만 仁에는 humanity와 harmony란 뜻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건 그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며 그에 비해 자신을 잘났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도 장점이 있으니 바라보겠다는 그래서 조화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걸 말합니다.
義를 justice로 보는 건 justice 본래의 의미를 말하는 건데, 즉 justice란 자연의 법칙을 말합니다.
봄이 오면 벚꽃이 피는 게 justice입니다.
만약 벚꽃이 피지 않으면 불의injustice, 즉 justice가 아니지요.
義를 인성의 컨텍스트 안에 넣고 본다면 義는 진실이 되어야 합니다.
솔직한 걸 말하는 데 솔직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혹은 의로운 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보면 열을 받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
맹자의 왕도정치
책을 통해 수없이 접해, 이제는 귀에 익숙해져버린 용어건만...
그 철인정치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수많은 논의와
학설과 이론이 있건만...
왜 제 머리는 이해 되지 않는 걸까요?
왜 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걸까요?
공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항상 빠지지 않는 화두가 되는
仁과 義.
인과 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정말 무수히 들었건만...
그래야만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이
읽었건만...
지금도 궁금한 건...
도대체 仁과 義는 무엇인가요?
여씨춘추를 읽어도, 대학을 읽어도, 중용을 읽어도...
알 수 없더군요.
저는(우리 일 수도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빼먹는 것은 아닐까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미술 사이트에서 이런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접목한 글을
접할 수 있다니 기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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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88년과 1893년 사이에 루이스 헨리 설리번을 위해 일한 미국 건축가, 디자이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는 설리번의 유기적 형태에서 영향을 받았다.
위스콘신 주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 애나 로이드 존스는 웨일즈에서 태어나 위스콘신 주 스프링그린 근처의 농장에서 자랐다.
교사였던 그녀는 24살 때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출신의 윌리엄 C. 라이트라는 마흔한 살의 떠돌이 악사, 전도사인 홀아비와 결혼했다. 라이트 부부는 1869년 어린 아들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아이오와 주로 이주했으며 그 해에 첫 딸을 낳았다. 부모는 그가 열여덟 살도 채 안 되었을 때 이혼했다.
라이트는 1885-86년 2학기 동안 특별 학생으로 메디슨의 위스콘신 대학에 다녔는데, 건축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공학과정을 밟으면서 문학과 어학 강의를 들었다.
라이트는 1887년 초 외삼촌과 어머니의 충고를 뿌리치고 시카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J.L. 실즈비의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건축 상세도를 그리는 일자리를 얻었고 스케치를 훌륭하게 잘 하는 실즈비에게서 영감을 얻어 유연한 선과 강조점을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들러-설리번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더욱 보람 있는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설리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1910년의 글에서 설리번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자연의 모든 형태가 상호의존적이며 서로에게서 나온다고 본다”고 적었다.
라이트는 설리번의 유기적 세계관과 인류관에 공감했으며, 디자인의 유기적 속성에 대한 믿음은 그로 하여금 설리번뿐만 아니라 갈레와 오브리스트와도 이론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갈레와 오브리스트의 넘칠 듯한 풍요로움에 탐닉하지 않았다.
자연을 미술에 적용하는 데서 그의 진정한 혁신은 유기체Organism에서 영감을 얻은 장식뿐만 아니라 그가 디자인한 공간의 유기적 성격organic character에 대한 믿음에 있었다.
그는 장식과 구조를 통일하려는 설리번의 목표에 만족하지 않았다.
설리번의 시스템은 건물 그 자체, 주로 외관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이트는 외관과 실내를 통일하고 싶어 했으며, 외관만큼이나 실내공간에도 집중되었다.
당시 이 사무소는 근대 건축의 지표가 된 인상적인 오디토리움 빌딩Auditorium Building을 건립하는 중이었다.
라이트는 오디토리움 빌딩 외에도 시카고 만국박람회 교통관 설계에 관여했다.
또한 이 시기에 건축사무소가 의뢰받은 주택건축을 많이 맡았으며 독자적으로 주택 설계도 했다.
라이트는 곧 루이스 설리번의 수석보조원이 되었고 1889년 6월에 캐서린 토빈과 결혼했다.
고용주에게 돈을 빌려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Oak Park 근교의 작은 택지를 사들인 뒤 자택(1899)을 지었다.
이 자택은 실즈비의 싱글 코티지Shingled cottage 양식을 좀 더 장중하면서 일관성 있게 한 구조형식을 보여준다.
라이트의 장식 가운데 설리번과의 유사한 예는 자택 천장의 격자무늬일 것이다.
여기서 기하학적이며 거의 고딕적인 형태는 오크나무의 소용돌이치는 가지와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라이트의 자연주의적 장식은 늘 계산된 대칭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이트는 1893년에 시카고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의 사무실이 10명의 보조원을 고용할 정도로 성장하는 동안 그의 집도 6명의 아이들이 지낼 수 있을 만큼 증축되었다.
라이트의 초기작품은 유럽 아르누보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를 보인다.
1893년 리버 포레스트River Forest에 세운 윈슬로 저택Winslow House은 초원의 집Prairie House 형식의 싹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라이트의 수많은 초원prairie의 집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 세기의 전환기에 그가 장식적 원천으로서 자연에 몰두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스크린을 위한 디자인에서 전체 디자인을 둘러싼 종자seed-germ 모티프를 보면 식물형태의 양식화뿐만 아니라 설리번과의 지속적인 유사성도 감지할 수 있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공간을 양식화된 장식과 결합시킨 초원의 집(1901-13)은 수평면을 크게 연장시키고 각 건물이 주변 풍경과 융합된 점이 특징으로, 20세기 초 10년 동안 미국 주택 건축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에게 자연적 환경은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였다.
1908년에 완공된 로비 저택Robie House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라이트는 1900년경에 이미 장식을 극한까지 밀고 간 급진적 건축가이자 사상가로 입지를 굳혔다.
스프링필드의 명사로, 아버지의 은광과 금광 사업을 물려받은 수잔 로렌스 다나Susan Lawrence Dana를 위해 라이트가 1905년에 디자인한 주택은 겉으로 보기엔 아르누보의 소박한 기념비로 보이나, 이 시기 그의 최고작품으로 그의 통일된 시각을 보여주는 완벽한 기념비로 오늘날에 알려졌다.
실내는 장식적 원천으로 자연형태를 사용하여 실내공간의 유기적 성격에 대한 그의 이론을 증명한다. 식당에 가득 배치된 예술 유리art glass는 프리즈의 양식화된 식물패턴과 함께, 그가 아르누보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입구 홀에 있는 리처드 W. 복Richard W. Bock(1865-1949)의 두 조각, 즉 안개 속에 휘감겨 떠 있는 듯한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을 표현한 분수 조각 <달 아이들 Moon Children>과 <갈라진 벽 속의 꽃 Flower in the Crannied Wall>이라 명명된 인물조각은 둘 다 그가 상징주의와 신비주의에 계속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라이트와 모더니즘의 관계를 논할 때 종종 간과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시 널리 찬사를 받은 라이트의 작품으로 버펄로의 라킨 빌딩Larkin Building(1904-05, 1949년에 철거)과 오크 파크의 유니티 교회Unity Temple(1906)가 있다.
유니티 교회는 후에 전개되는 기능적인 입체주의에서 다양한 실험작품의 원천이 되었으며, 또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운동에 자극을 준 요인이 되었다.
데 스테일은 1917년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가 피트 몬드리안과 함께 창간하여 1928년까지 편집을 맡았던 미술잡지의 명칭이기도 하다.
이 잡지의 창간 목적은 몬드리안이 창안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 이론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1910년경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쿠노 프랑케와 베를라헤Hendrik Petrus Berlage(1856-1934), 그리고 취리히의 프렛츠 앤 바스무트Fretz & Wasmuth 출판사가 발간한 작품집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 작품집은 1910년과 1911년에 출간되었고 제2판에는 애슈비가 서문을 썼다.
라이트는 산업문명 시대에서 예술이 예술 본래의 목적을 잃지 않도록 기계를 지배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기계와 공존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1901년에 발간된 강연집 <기계에 의한 예술과 공예 The Art and Craft of the Machine>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는 기계로 생산된 것은 어떻게 해도 기계생산의 산물이라는 겉모습을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또한 이후 그로피우스가 주장한 팀워크Team Work의 이념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창의력을 통한 통일성”이 사상의 중심에 있는 독자적인 민주주의 건축이론을 명확히 내세웠다.
설리번의 기능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해석을 보여주었으며, 아름다움이란 구조와 기능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데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는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반대하면서 아름다운 형태는 기능적인 표현이 만족되어야만 비로소 창조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일본관에 매료된 뒤 ‘초원의 집’을 지은 뒤부터 라이트는 일본의 장식미술에 관심을 보였다.
1905년 처음 일본을 방문한 뒤 도쿄에 있는 데이코쿠 호텔Imperial Hotel의 건설 의뢰를 맡아 1915년 다시 일본에 가서 1921년까지 머물렀다.
마야 문명의 장식을 연상시키는 이 매혹적인 건물은 지진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앙의 안전핀 지지대 위에 마루판자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1923년 관동 대지진에도 파괴되지 않았다.
1923년 9월 1일 도쿄가 잿더미가 되었다.
인구 5백만 의 대도시에 지진으로 인해 15만 명이 사망하는 대재앙이었다.
도시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제국 호텔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 호텔은 지진이 일어나기 일 년 전에 완공된 일본 제1의 호텔이었다.
라이트는 일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걸 알고 지진에 대비하여 특수 기초로 호텔을 설계한 것이다.
30년 전 제국 호텔의 건축성을 기념하기 위해 이 호텔을 해체하여 메이지 시대의 민속촌으로 지금의 나고야로 옮겨 호텔 로비 건물 동만 조립 재건했다.
호텔 내부에는 지금도 라이트가 디자인한 가구들이 꾸며져 있다.
미국으로 돌아온 라이트는 철근 콘크리트구조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더욱 발전시켰다.
자연의 유기적 형태가 보여주는 강도와 유동성에서 영감을 얻고, 콘크리트의 가소성을 이용하여 구조와 피막 모두에 쓸모가 있는 연속적인 구조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은 점은 중요하다.
1920년대에는 유기적 건축의 아이디어, 즉 나무에서 힌트를 얻은 마천루의 형태를 고안했다.
이는 엘리베이터와 서비스 부분이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이것을 줄기로 하여 나뭇가지처럼 한 쪽 끝을 고정시키고 다른 쪽 끝은 자유로이 움직이게 한 기둥에서 마루판자를 돌출시키며, 외벽은 단순히 유리와 금속만으로 덮여 있다.
이런 아이디어는 존슨 앤 왁스S.C. Johnson & Wax 화학회사의 연구탑(1950)과 오클라호마 주 북동부 워싱턴 군의 군청소재지인 바틀즈빌Bartlesville에 있는 프라이스 타워 예술 센터Price Tower Arts Center(1953-56)에서 구체화되었다.
탤리에신 웨스트 건물Tailesin West Building 자체의 설계에는 라이트의 주택건축의 특색인 다채롭고 낭만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
1930년대에 그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그 밖에도 폭포 위에 들보가 돌출되어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밀런Mill Run에 소재하는 카우프만Kauffmann의 저택인 낙수장Falling Water(1936)이 있다.
이런 건축물은 가소적인 구조와 연속적인 공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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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는 플라톤의 모방론을 받아들였고



화가이자 건축가인 바자리Giorgio Vasari(1511-74)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Vite』 초판(중판은 1568년에 출간)을 출간했는데 예술가들의 전기들을 포괄적으로 수집한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을 그가 처음 출간한 것인데 이는 최초의 미술사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미술가 열전』은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란 제목으로 1550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1568년에는 양적으로 늘어난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예술의 기능에 관한 언급이 여기저기에 산재하는 단순한 자서전과는 달리 이 책은 이론적 논의에 몇 절을 할애했다.
두 가지 머리말 가운데 첫 번째 것에는 조각에 대한 회화의 우월성에 관한 논증이 실려 있으며, 두 번째 것에는 고대로부터 치마부에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사가 취급되어 있다.
또한 회화, 조각, 건축 각각의 부문에 서문이 하나씩 딸려 있는데 바자리는 여기에다 기술면의 세부에 관한 문제를 주로 실었으며 일반적 해석도 빠뜨리지 않았다.

바자리는 플라톤의 모방론을 받아들였고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예술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이 학설을 적용하여 그는 고대예술을 하나의 정점으로 보고 암흑 속의 중세를 몰락으로 이에 대비시켰다.
그런데 중세가 14세기의 예술부흥으로 말미암아 다시 극복되었다.
초판에서 바자리는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고대가 극복되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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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답합니다.

 
뭉크는 일련의 작품들을 '생의 프리즈'라는 시리즈로 묶었는데 이 시리즈에는 죽음과 관한 작품이 많습니다.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에 관한 의미를 물었지요.
오늘 가평에 가서 등산을 하고 9시가 되어서야 귀하해서 보니 질문이 있어 답을 합니다.
이 시리즈에 <죽음의 방>, <인생과 죽음>, <죽음>, <죽음과 아이>, <죽음과 소녀> 등이 있습니다.
제목만 읽어도 뭉크가 얼마나 죽음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지요?
해골과 열정적으로 포옹하는 소녀를 그린 <죽음과 소녀>는 그의 정신세계가 불안으로 인해 온통 사랑과 죽음의 강박관념에 젖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청년시절 그는 노르웨이에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헴'이란 매우 진보된 그룹에서 속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아니아는 현재 오슬로의 옛명칭이고 보헴이란 보헤미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슬로 보헤미아입니다.
노르웨이 아방가르드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그룹의 리더는 한스 예거였는데 그가 1885년에 발표한 저서 <크리스티아니아의 보헴 Fra Kristiania Bohemen>은 진보주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해서 이런 명칭 하에 그룹이 생겼습니다.
예거는 세 개의 거대한 우상, 즉 기독교, 도덕, 법전에 대항한 작가였습니다.
뭉크는 예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사상이 보헤미안들 중 특히 한스 예거의 영향 아래 진전된 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가 나를 정신적으로 떠 받들어주었다.
내가 1893-4년 베를린에 머물 때 스트린드베르크나 독일인의 영향을 받아 사상을 심화시켰다고 많은 이가 잘못 알고 있다.
나의 사상은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으며 벌써부터 나는 여러 해에 걸쳐 '생의 프리즈' 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아니아 보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었고,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1848)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에 대적했으며,
1867년에는 모여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했습니다.
이들은 남녀의 평등을 외쳤고,
아내가 남편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당한 도덕에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뭉크는 보헴 운동의 영향으로 자유연애를 실행한 후 사랑의 쓰라린 맛을 보았습니다.
일기에 적은 하이베르크 부인Fru Heiberg이라고 적은 해군 군의관의 아내와의 불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첫 키스를 바친 순정의 사랑이었는데 뭉크보다 3살 많은 그녀는 요즘 말로 하면 뭉크를 데리고 놀았던 것입니다.
이때 뭉크는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고 따시 한 번 더 사랑의 쓴맛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결론으로 말하면 뭉크는 그때부터 여자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았고 끝내 독신으로 살게 됩니다.
매우 순정적인 사람이지요?
보헴 그룹 이후,
뭉크는 에밀 졸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더욱 불안한 인간 실존을 탐구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이 어두운 건 이 때문입니다.
그는 1893년경에 유화로 <죽음과 소녀>를 그렸고 이듬해 드라이포인트 판화로 제작했습니다.
판화로 제작한 것 가장자리에는 정충으로 장식했습니다.
뭉크에게 여자란 남자를 파멸시키는 요망한 존재였는데 그 자신의 경험에서 그런 생각을 주로 하게 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게 되는데 이런 파멸이 예상되는 사랑을 표현하려니 <죽음과 소녀>와 그 밖의 그림처럼 음산한 사랑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얼굴을 맞대고 하면 좀더 잘 할 수 있는데 글로 쓰려니 너무 길어집니다.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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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는 노란집의 아래층을 아틀리에로 사용했고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가운데 큰 길로 난 창이 있는 방은 고갱이 사용하게 했으며 자신은 복도 옆의 방을 사용했다. 2층에는 방이 두 개뿐인데 방들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888년 11월 반 고흐와 고갱은 룰랭 부인을 아틀리에로 오게 해서 각각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고갱은 그녀를 자신의 풍경화가 걸린 벽을 배경으로 그렸고, 반 고흐는 밖이 내다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그렸다. 고갱이 그린 <룰랭 부인>의 배경에 나타난 풍경화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그릴 때도 배경에 삽입되었다.
반 고흐는 이 시기에 보통 사람의 초상을 전통적인 후광으로 나타낸 “영원함의 느낌을 주는” 색으로 그리는 것에 관해 말하곤 했다. 그는 룰랭 부인이 얼마 전에 출산한 마르셀은 안고 있는 모습을 두 점 그렸다. 첫 번째 그린 그림은 도상을 따라 그린 것으로 성모 마리아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혹은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렸다. 배경의 노란색이 금색을 칠해 거룩한 공간 혹은 정신적 공간을 나타낸 전통을 상기시킨다. 12월 초에 이 작품을 그린 후 그는 좀더 큰 캔버스에 동일한 모티프를 확대해서 그렸다. 고갱은 풍경화를 그리다 말고 룰랭의 아기를 스케치북에 두 점 그렸다. 반 고흐의 <마르셀은 안고 있는 롤랭 부인>은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어 그로 하여금 1901년에 <어머니와 아기>를 그리게 했다.
지누 부부도 종종 포즈를 취해주었다. 12월에 마리 지누의 남편 요제프-미셀 지누가 아틀리에로 와서 반 고흐와 고갱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반 고흐는 지누가 코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흉악범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그의 머리를 각이 지게 그렸는데, 12월 초 요제프 룰랭의 초상을 그릴 때도 이런 식으로 그렸다. 배경을 노란색이 감도는 푸른색으로 밝게 칠하여 활력이 넘치는 기운 속의 모습이 되게 만들었다. 고갱도 같은 날 지누의 초상을 좀더 작은 캔버스에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마리 지누는 라마르텡 거리에 있는 가르 카페의 여주인이다. 반 고흐는 5월부터 라마르텡 2번지 노란집에 살았으므로 거의 매일 그녀를 보았지만 정작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 것은 고갱이었다. 반 고흐는 그녀가 너무 늙고 매력적이지 않아 모델로 그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갱과 동갑내기로 마흔 살이었고 결혼한 지 겨우 2년 되었다.
지누 부인이 포즈를 취하기 위해 노란집으로 온 것은 11월 4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외출할 때 입는 정장차림으로 왔다.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노란집 아래층으로 와서 두 사람을 위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것으로 반 고흐가 고갱이 사용하도록 사둔 것이다. 지누 부인은 왼쪽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등을 서쪽 벽을 향했다. 주먹을 쥔 손에 볼을 대고 얼굴을 약간 왼편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고갱을 바라보고 포즈를 취했고 반 고흐는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아틀리에 동쪽으로 난 창문은 몽마주르 가를 향하고 빛이 아주 잘 들었다. 고갱은 이날 드로잉을 그렸고 반 고흐는 황마에 유채로 그렸으며 작품을 완성한 것은 이튿날이었다.(고흐 390) 그는 이듬해 2월에 고갱의 화법으로 <아를 여인>을 다시 그렸다.
반 고흐는 12월에 지누 부인의 초상과 같은 포즈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는 고갱의 방법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배경에 자신이 좋아하는 레몬 노란색을 사용했다. 반 고흐가 처음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좀더 사려 깊게 채색되었으며 색과 선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고갱이 그해 12월에 그린 1867년 7월에 타계한 어머니의 사진을 토대로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노란색을 넓고 평편하게 사용하는 법을 반 고흐로부터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월 들어 반 고흐와 고갱 사이에 회화에 관한 논쟁이 부쩍 격해졌는데 이는 고갱의 강압적인 태도에 대한 반 고흐의 반발이 다분히 작용했다. 그동안 반 고흐는 주제와 구성에서 고갱의 강압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꿈의 이미지를 그리라는 고갱의 주문에 응했고, 그 달에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이 고갱의 <밤의 카페, 아를>와 같아 그때까지 고갱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 고흐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고갱을 흉내낸 고갱식 그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점은 고갱은 뒤로 세 명의 매춘부를 배경으로 지누 부인을 포주로 묘사한 데 반해, 반 고흐는 지누 부인의 존엄성을 나타내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이 그가 체이블 위 소품으로 사용한 책, 양산, 그리고 장갑에서 확인된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 고흐의 미학은 고갱의 미학과 차이가 있다.
12월 23일 자신의 귓불을 자른 자해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반 고흐는 룰랭 부인을 모델로 어머니로서의 자태를 지닌 이미지를 다섯 점을 제작했다. 다섯 점 모두 의자에 앉아 갓난아기 마르셀의 흔들침대에 연결된 끈을 쥔 두 손을 포개고 있는 장면으로 동일한 모티프를 약간만 변형시킨 것들이다. 편안한 자세를 취한 어머니의 모습을 마돈나를 상기하게 하는 이미지로 묘사한 후 제목을 <자장가>라고 했다. 거의 동일해 보이는 여인의 초상을 어머니의 이미지로 반복해서 그렸다. 밝은 색의 벽지를 배경으로 룰랭 부인을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룰랭 부인은 딸아이의 요람과 연결된 끈을 쥐고 있다. 오래 포즈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응얼거릴 때는 끈을 잡아당겨 요람이 흔들리게 해서 아기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이다. 188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 모티프를 다섯 점 그렸다. 이 시리즈에서 고갱의 영향을 발견하는데 룰랭 부인의 외곽선을 검정색으로 칠했고 한 가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의 영향을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도전이라도 하듯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신의 독특한 양식으로 변형시키려고 했다.
다섯 점 모두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벽지를 배경으로 한다. 다만 색채가 조금씩 다르고 붓질이 다르며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의 경우 손이 반대로 포개진 것이 특기할 만하다. 룰랭 부인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집약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며 머리, 어깨, 몸통을 검정색 외곽선으로 부분적으로 평편하게 하여 그대로 도려낼 수 있는 느낌을 생기게 했다. 그녀의 스커트를 분리시킨다. 외곽선과 외곽선 사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했는데, 타일이나 돌로 깔린 바닥을 주홍색으로 칠했고 여인의 몸통을 청록색으로 칠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을 대비시켰다. 색을 평편하게 칠하고 대비시키는 방법과 인물과 사물을 검정색으로 외곽의 윤곽을 드러내게 하는 방법은 고갱이 선호했던 것으로 고갱의 양식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식은 클루아조니즘으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갱이 진전시킨 양식이다.
반 고흐는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광채의 통일, 보색으로 위안을 주는 그림으로 미화시키려고 했다고 테오에게 전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화처럼 위안과 표현적인 힘이 나타나는 그림을 구상했다. 그는 <자장가>를 세 폭 제단화 중앙에 위치하는 성모상처럼 구상하면서 양편에는 빛을 발하는 횃불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들을 걸려고 했다. 이는 마리아를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적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창안한 그는 마리아를 또한 룰랭 부인의 포근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고갱에 대한 반발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상이라고 주장한 고갱은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서 그릴 것을 반 고흐에게 누누히 강조했다. 반 고흐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에텐 정원의 추억>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릴 수 없었던 그는 고갱에 대항하기 위해 실재 인물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에게는 실재를 보고 그리는 것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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