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답합니다.
뭉크는 일련의 작품들을 '생의 프리즈'라는 시리즈로 묶었는데 이 시리즈에는 죽음과 관한 작품이 많습니다.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에 관한 의미를 물었지요.
오늘 가평에 가서 등산을 하고 9시가 되어서야 귀하해서 보니 질문이 있어 답을 합니다.
이 시리즈에 <죽음의 방>, <인생과 죽음>, <죽음>, <죽음과 아이>, <죽음과 소녀> 등이 있습니다.
제목만 읽어도 뭉크가 얼마나 죽음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지요?
해골과 열정적으로 포옹하는 소녀를 그린 <죽음과 소녀>는 그의 정신세계가 불안으로 인해 온통 사랑과 죽음의 강박관념에 젖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청년시절 그는 노르웨이에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헴'이란 매우 진보된 그룹에서 속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아니아는 현재 오슬로의 옛명칭이고 보헴이란 보헤미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슬로 보헤미아입니다.
노르웨이 아방가르드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그룹의 리더는 한스 예거였는데 그가 1885년에 발표한 저서 <크리스티아니아의 보헴 Fra Kristiania Bohemen>은 진보주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해서 이런 명칭 하에 그룹이 생겼습니다.
예거는 세 개의 거대한 우상, 즉 기독교, 도덕, 법전에 대항한 작가였습니다.
뭉크는 예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사상이 보헤미안들 중 특히 한스 예거의 영향 아래 진전된 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가 나를 정신적으로 떠 받들어주었다.
내가 1893-4년 베를린에 머물 때 스트린드베르크나 독일인의 영향을 받아 사상을 심화시켰다고 많은 이가 잘못 알고 있다.
나의 사상은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으며 벌써부터 나는 여러 해에 걸쳐 '생의 프리즈' 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아니아 보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었고,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1848)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에 대적했으며,
1867년에는 모여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했습니다.
이들은 남녀의 평등을 외쳤고,
아내가 남편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당한 도덕에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뭉크는 보헴 운동의 영향으로 자유연애를 실행한 후 사랑의 쓰라린 맛을 보았습니다.
일기에 적은 하이베르크 부인Fru Heiberg이라고 적은 해군 군의관의 아내와의 불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첫 키스를 바친 순정의 사랑이었는데 뭉크보다 3살 많은 그녀는 요즘 말로 하면 뭉크를 데리고 놀았던 것입니다.
이때 뭉크는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고 따시 한 번 더 사랑의 쓴맛을 보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결론으로 말하면 뭉크는 그때부터 여자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았고 끝내 독신으로 살게 됩니다.
매우 순정적인 사람이지요?
보헴 그룹 이후,
뭉크는 에밀 졸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더욱 불안한 인간 실존을 탐구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이 어두운 건 이 때문입니다.
그는 1893년경에 유화로 <죽음과 소녀>를 그렸고 이듬해 드라이포인트 판화로 제작했습니다.
판화로 제작한 것 가장자리에는 정충으로 장식했습니다.
뭉크에게 여자란 남자를 파멸시키는 요망한 존재였는데 그 자신의 경험에서 그런 생각을 주로 하게 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게 되는데 이런 파멸이 예상되는 사랑을 표현하려니 <죽음과 소녀>와 그 밖의 그림처럼 음산한 사랑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얼굴을 맞대고 하면 좀더 잘 할 수 있는데 글로 쓰려니 너무 길어집니다.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