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는 노란집의 아래층을 아틀리에로 사용했고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가운데 큰 길로 난 창이 있는 방은 고갱이 사용하게 했으며 자신은 복도 옆의 방을 사용했다. 2층에는 방이 두 개뿐인데 방들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888년 11월 반 고흐와 고갱은 룰랭 부인을 아틀리에로 오게 해서 각각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고갱은 그녀를 자신의 풍경화가 걸린 벽을 배경으로 그렸고, 반 고흐는 밖이 내다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그렸다. 고갱이 그린 <룰랭 부인>의 배경에 나타난 풍경화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그릴 때도 배경에 삽입되었다.
반 고흐는 이 시기에 보통 사람의 초상을 전통적인 후광으로 나타낸 “영원함의 느낌을 주는” 색으로 그리는 것에 관해 말하곤 했다. 그는 룰랭 부인이 얼마 전에 출산한 마르셀은 안고 있는 모습을 두 점 그렸다. 첫 번째 그린 그림은 도상을 따라 그린 것으로 성모 마리아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혹은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렸다. 배경의 노란색이 금색을 칠해 거룩한 공간 혹은 정신적 공간을 나타낸 전통을 상기시킨다. 12월 초에 이 작품을 그린 후 그는 좀더 큰 캔버스에 동일한 모티프를 확대해서 그렸다. 고갱은 풍경화를 그리다 말고 룰랭의 아기를 스케치북에 두 점 그렸다. 반 고흐의 <마르셀은 안고 있는 롤랭 부인>은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어 그로 하여금 1901년에 <어머니와 아기>를 그리게 했다.
지누 부부도 종종 포즈를 취해주었다. 12월에 마리 지누의 남편 요제프-미셀 지누가 아틀리에로 와서 반 고흐와 고갱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반 고흐는 지누가 코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흉악범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그의 머리를 각이 지게 그렸는데, 12월 초 요제프 룰랭의 초상을 그릴 때도 이런 식으로 그렸다. 배경을 노란색이 감도는 푸른색으로 밝게 칠하여 활력이 넘치는 기운 속의 모습이 되게 만들었다. 고갱도 같은 날 지누의 초상을 좀더 작은 캔버스에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마리 지누는 라마르텡 거리에 있는 가르 카페의 여주인이다. 반 고흐는 5월부터 라마르텡 2번지 노란집에 살았으므로 거의 매일 그녀를 보았지만 정작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 것은 고갱이었다. 반 고흐는 그녀가 너무 늙고 매력적이지 않아 모델로 그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갱과 동갑내기로 마흔 살이었고 결혼한 지 겨우 2년 되었다.
지누 부인이 포즈를 취하기 위해 노란집으로 온 것은 11월 4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외출할 때 입는 정장차림으로 왔다.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노란집 아래층으로 와서 두 사람을 위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것으로 반 고흐가 고갱이 사용하도록 사둔 것이다. 지누 부인은 왼쪽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등을 서쪽 벽을 향했다. 주먹을 쥔 손에 볼을 대고 얼굴을 약간 왼편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고갱을 바라보고 포즈를 취했고 반 고흐는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아틀리에 동쪽으로 난 창문은 몽마주르 가를 향하고 빛이 아주 잘 들었다. 고갱은 이날 드로잉을 그렸고 반 고흐는 황마에 유채로 그렸으며 작품을 완성한 것은 이튿날이었다.(고흐 390) 그는 이듬해 2월에 고갱의 화법으로 <아를 여인>을 다시 그렸다.
반 고흐는 12월에 지누 부인의 초상과 같은 포즈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는 고갱의 방법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배경에 자신이 좋아하는 레몬 노란색을 사용했다. 반 고흐가 처음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좀더 사려 깊게 채색되었으며 색과 선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고갱이 그해 12월에 그린 1867년 7월에 타계한 어머니의 사진을 토대로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노란색을 넓고 평편하게 사용하는 법을 반 고흐로부터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월 들어 반 고흐와 고갱 사이에 회화에 관한 논쟁이 부쩍 격해졌는데 이는 고갱의 강압적인 태도에 대한 반 고흐의 반발이 다분히 작용했다. 그동안 반 고흐는 주제와 구성에서 고갱의 강압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꿈의 이미지를 그리라는 고갱의 주문에 응했고, 그 달에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이 고갱의 <밤의 카페, 아를>와 같아 그때까지 고갱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 고흐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고갱을 흉내낸 고갱식 그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점은 고갱은 뒤로 세 명의 매춘부를 배경으로 지누 부인을 포주로 묘사한 데 반해, 반 고흐는 지누 부인의 존엄성을 나타내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이 그가 체이블 위 소품으로 사용한 책, 양산, 그리고 장갑에서 확인된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 고흐의 미학은 고갱의 미학과 차이가 있다.
12월 23일 자신의 귓불을 자른 자해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반 고흐는 룰랭 부인을 모델로 어머니로서의 자태를 지닌 이미지를 다섯 점을 제작했다. 다섯 점 모두 의자에 앉아 갓난아기 마르셀의 흔들침대에 연결된 끈을 쥔 두 손을 포개고 있는 장면으로 동일한 모티프를 약간만 변형시킨 것들이다. 편안한 자세를 취한 어머니의 모습을 마돈나를 상기하게 하는 이미지로 묘사한 후 제목을 <자장가>라고 했다. 거의 동일해 보이는 여인의 초상을 어머니의 이미지로 반복해서 그렸다. 밝은 색의 벽지를 배경으로 룰랭 부인을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룰랭 부인은 딸아이의 요람과 연결된 끈을 쥐고 있다. 오래 포즈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응얼거릴 때는 끈을 잡아당겨 요람이 흔들리게 해서 아기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이다. 188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 모티프를 다섯 점 그렸다. 이 시리즈에서 고갱의 영향을 발견하는데 룰랭 부인의 외곽선을 검정색으로 칠했고 한 가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의 영향을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도전이라도 하듯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신의 독특한 양식으로 변형시키려고 했다.
다섯 점 모두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벽지를 배경으로 한다. 다만 색채가 조금씩 다르고 붓질이 다르며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의 경우 손이 반대로 포개진 것이 특기할 만하다. 룰랭 부인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집약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며 머리, 어깨, 몸통을 검정색 외곽선으로 부분적으로 평편하게 하여 그대로 도려낼 수 있는 느낌을 생기게 했다. 그녀의 스커트를 분리시킨다. 외곽선과 외곽선 사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했는데, 타일이나 돌로 깔린 바닥을 주홍색으로 칠했고 여인의 몸통을 청록색으로 칠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을 대비시켰다. 색을 평편하게 칠하고 대비시키는 방법과 인물과 사물을 검정색으로 외곽의 윤곽을 드러내게 하는 방법은 고갱이 선호했던 것으로 고갱의 양식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식은 클루아조니즘으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갱이 진전시킨 양식이다.
반 고흐는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광채의 통일, 보색으로 위안을 주는 그림으로 미화시키려고 했다고 테오에게 전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화처럼 위안과 표현적인 힘이 나타나는 그림을 구상했다. 그는 <자장가>를 세 폭 제단화 중앙에 위치하는 성모상처럼 구상하면서 양편에는 빛을 발하는 횃불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들을 걸려고 했다. 이는 마리아를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적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창안한 그는 마리아를 또한 룰랭 부인의 포근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고갱에 대한 반발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상이라고 주장한 고갱은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서 그릴 것을 반 고흐에게 누누히 강조했다. 반 고흐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에텐 정원의 추억>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릴 수 없었던 그는 고갱에 대항하기 위해 실재 인물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에게는 실재를 보고 그리는 것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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