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는 27살에 화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반 고흐는 27살에 화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그림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동안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27살의 남자가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처음부터 무리스러운 일입니다.
미대를 나와도 화가가 되기 어려운 마당에 27살의 남자가 화가가 되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말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 고흐는 숙부의 아트 딜러상 구필에서 7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7년 동안 보아온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는 화가가 된다는 생각이 그렇게까지 무리스러운 것은 아니었지요.

27살부터 5년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도 능히 그릴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그림들이었습니다.
원근에 대한 감각이 없어 멀고 가까운 것을 제대로 비례적으로 나타내지 못했고
인물의 구성에서도 매우 초보적이었으며
채색 또한 형편 없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뮤지엄에 가면 초기의 작품들이 있는데 얼마나 못그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물을 그리고 인체교본을 보는 등 5년 동안 미대 1, 2학년에서 가르칠 그런 교과과정을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가 그림에서 본 결정적인 복음은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이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채석장에 돌을 깨는 남자들의 노동을 그린 이래 그림에서 노동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르베 이전의 그림을 보면 부르주아와 귀족들의 삶이 전부였지 않습니까?
쿠르베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이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림의 사회주의가 시작된 것이지요.
쿠르베, 도미에, 밀레, 반 고흐로 이어지는 일련의 화가들은 한 마디로 회화의 사회주의자들입니다.
밀레가 노동자의 노동을 농부의 노동을 신성시해서 그린 그림은 반 고흐에게 시각적 복음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성장한 반 고흐는 밀레의 그림에 매료되어 그의 그림을 수없이 모사했습니다.
밀레의 씨 부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까?
다만 다른 점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누더기를 입은 데 비해서 반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은 당시의 좀더 나은 옷을 걸친 것입니다.
농부의 현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반 고흐는 씨 뿌릴 시기가 아닌 막 추수를 한 들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그림도 그렸는데 그런 정도로 농부를 그리기 좋아했지요.
그는 밀레처럼 농부화가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밀레는 그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준 매우 고마운 분입니다.

초기에 반 고흐가 노동자의 노동을 주로 그렸고 농부의 초상을 많이 그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밀레의 덕택에 반 고흐는 32살 때 처음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첫 걸작입니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그가 제대로 화가의 생애를 시작했고 37살에 자살했으니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5년이 전부입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의 복음입니다.
하루종일 농부 가족이 밖에서 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하는 장면인데 감자가 전부입니다.
손마디 마디마다 툭튀어나온 거친 손으로 감자를 들고 먹는 장면입니다.
당시 자본주의가 성행하면서 겪는 노동자들의 삶은 이러했고 반 고흐는 문명의 그늘에서 혹사하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를 회화의 전도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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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반 고흐에 관해서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습니다.
반 고흐의 그림과 그의 광기에 관해 질문한 분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의 그림과 광기와는 무관합니다.
글쎄 광기라는 말이 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반 고흐의 병은 의학명으로 간질입니다.
자주 발작을 하는 간질이 아니라 아주 드물게 발작하는 간질입니다.
정신병원에 1년 입원되어 있는 동안 다섯 번밖에는 발작을 안 했습니다.
문제는 발작할 때 위험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감을 먹었는데 당시 물감은 가루를 오일에 섞어 사용했고 독소가 있었습니다.
물감을 먹었다는 건 이성을 잃었다는 말이겠지요.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발작이라서 그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그림을 아주 많이 그렸는데 몇 점이 그리다 만 것들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흰 캔버스가 드러나게 부분적으로 완성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학자들은 그것들이 발작으로 인해 그리다 중단된 것들이 아닌가 짐작하지만 이미 그려진 그림들에서 발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이 반 고흐는 해바라기보다는 덩쿨나무를 더 좋아했다.
죽을 때 자신의 묘지에 덩쿨나무를 심어달라고 했다.
묘지에 가보니 덩쿨나무가 있더라.
이런 식으로 잘 모르고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렸고
고갱이 아를로 와서 자신과 함께 지내기로 하자 반 고흐는 고갱에게 자랑도 할겸 해바라기 그림을 더 그렸으며
고갱이 왔을 때도 해바라기를 그렸고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생한 해바라기도 그렸고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도 그렸습니다.
반 고흐는 정멀로 해바라기를 좋아했습니다.
해바라기는 그를 상징하는 그의 꽃입니다.
덩쿨나무에 관해서는
그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의 정원을 많이 그렸는데 그곳에 나무를 타고 가어올라가며 자라는 덩쿨나무가 있었습니다.
풍경을 그리다보니 나무를 가까이서 그리다보니 덩쿨나무도 함께 그렸지요.
생레미에는 덩쿨나무가 많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덩쿨나무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삼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반 고흐는 갑자기 자살했습니다.
유언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곧 죽을 거라고 미리 예고한 적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묘지에 덩쿨나무를 심어달라고 적거나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에 관해서는 뜬소문도 많고 새로운 뜬소문도 만들어져서 이번 기회에 바로잡을 겸 몇자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분에게 말한다면 그의 우울증에 대해 이해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에게는 우울증이 있었고
자신의 귀를 자를 때부터 우울증이 심해졌습니다.
발작과 우울증이 한꺼번에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러나 발작보다는 우울증이 더 그를 고독하고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우울증에는 원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우선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동생에게 너무 경제적으로 의존한 것에 대한 우울증입니다.
작품이 팔렸으면 돈이 생기고 동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림이 팔리지 않은 데 대한 우울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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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루이 드 브로이를 칭찬했다


폐위된 프랑스 왕족과의 관계 덕분에 왕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던 루이 드 브로이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1892~1987)는 만약 파동이 입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파동처럼 행동할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드 브로이는 “내게 갑작스런 영감이 떠올랐다. 아인슈타인의 파동-입자 이중성은 모든 물리적 자연으로 확장되는 절대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광자, 전자, 양성자를 비롯한 모든 입자의 움직임은 파동의 전파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드 브로이는 아인슈타인의 광전자효과 법칙을 이용하여 전자(혹은 어떤 입자)와 관련된 파동의 파장은 플랑크상수를 입자의 모멘텀으로 나눈 값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 파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밝혀졌다.
보어의 원자모델에서, 전자는 어떤 양자 도약(전이)에 의해서만 궤도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안정한 정지파 패턴)가 바뀐다.
드 브로이의 학위 논문은 전자를 입자가 아니라 파동으로 생각함으로써 그런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파동들은 원자핵 주위의 원형 경로를 따라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궤도를 나타내는 원의 둘레가 입자 파장의 2, 3, 4와 같은 정수 배를 수용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파장의 일부가 남게 되면 예정된 원의 둘레에 깨끗하게 들어맞지 않게 된다.
드 브로이는 자신의 학위 논문 사본 세 권을 만들어 그중 한 권을 자신의 지도교수 폴 랑주뱅에게 보냈다.
상당히 당혹스러워했던 랑주뱅은 사본을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라고 말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거대한 장막의 한쪽을 들어 올린 것”이라고 했다.
드 브로이는 “그의 찬사 덕분에 랑주뱅이 내 논문을 받아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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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네오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피치노



예술의 가치와 평가는 르네상스 때 와서야 가능해졌는데 이 장에서는 르네상스의 이론적 패러다임을 완성한 피치노와 그 이론에 근거하여 최고의 미술품을 제작한 미켈란젤로에 관해 먼저 알아보고 미술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관해서도 알아보려고 한다.

르네상스 때 와서 미술에 대한 인식이 한층 고양되었는데 이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네오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피치노에 의해서였다.
그가 행한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주석과 플로티노스의 번역으로 해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연관이 회복되었는데 이는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성과 있는 일이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피치노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저작 번역을 마친 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번역했다.

피치노는 상상력을 감각에 의한 표현을 조화시키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환상을 미적 지각의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으로 간주했다.
사람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의 순수한 이성적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이런 내적 집중이 예술적 창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때 영혼이 미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미가 낮은 수준의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고, 듣고, 생각하는 지성적인 능력에 의해 포착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된다.
피치노에 의해 미술은 매우 고상한 예술로 격상되었다.

피렌체에서 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과 피사에서 의학과 철학을 수학한 피치노는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1389-1464)의 후원 하에 설립된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장이 되었다.
이 아카데미는 플라톤에게 바쳐진 학문의 전당으로 고대 플라톤주의와 중세 가톨릭 신앙을 철학의 범주에서 새롭게 종합하여 당대의 철학적 사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한 피치노는 플라톤의 학설과 가톨릭의 신학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의 저서들을 읽는 가운데 플라톤의 철학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가 영향력 있는 플라톤의 『향연』의 주석을 쓴 것은 1469년이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신학, 영혼들의 불멸성에 관하여 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rum』의 집필을 1469년에 마치고 그 후 좀 더 보완하여 1484년에 처음 출간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피타고라스의 거의 종교적인 신념인 영혼의 불멸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저서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플라톤 철학과 가톨릭 신학의 일치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의 논증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및 그 밖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한데 섞인 것이었다.
그는 플로티노스에 관한 번역과 주석을 1484년에 쓰기 시작하여 1492년에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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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한 명쾌한 답이란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건 조상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떤 고통을 받았으며, 또 어떤 즐거움을 누렸는지 알아보는 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언제였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만 그런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는 이유는 너무 오래 전의 일인 데다 그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스의 유명한 사학자는 역사란 시작으로부터 공부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아직 없는 이유는 한 번 더 말하지만 불충분한 자료 때문이다.
예를 들어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 한 점이 발굴되었고 이를 프랑스 보르도에 살던 Gravettian의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매우 표현적인 작품이다.
아주 못생겼고 기괴한 형상의 이 누드 조각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일 것이다.
섣불리 그것은 여신을 상징한 것이라고 말한다든가
인류의 멸망을 막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남자를 여성적 모습으로 재현해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Gravettian의 문화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증명할 수 있는 말이 못된다.
역사지식이 되지 않는다.
이 누드 조각은 여태까지 발견한 남자를 상징하는 조각들 중 가장 표현이 현저한 형상이며 사내가 여자의 몸을 하고 있어 흥미거리인데,
어쩌면 이것은 남자를 여성적으로 상징했다기보다는 여자의 누드에 못생긴 사내의 얼굴을 부착한 우리가 발견한 첫 번째 조각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언제 그리고 무엇이냐 하는 질문은 의당 생기겠지만 그것들에 대한 답을 우리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적당히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런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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