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긴 동기를 물은 분에게 말합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뉴욕에 정찬승 형이 있었습니다.
형의 작업실은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 예술가들이 시도때도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고,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인 미술 관련자들뿐 아니라 그 외의 예술가들 조영남, 양희은 등등도 으례 형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형은 대마초와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성격이 예술가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형은 사람들에게 날 소개할 때면 철학자라고 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형과 친구 화가들 때문이었습니다.
1970년이었던가 제1회 대학생 사진 컨테스트에서 입상한 적이 있어 나도 조금은 미술에 관심을 가져왔던 터였고, 1972년 1월 뉴욕으로 가서 공부를 시작할 때도 뉴욕 사진학교에 먼저 입학한 걸로 봐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적으나마 있었던 것으로 회상됩니다.

약 일 년 동안 회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용감하게 혼자 열심히 그렸는데 숟가락과 헤어드라이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물감을 진하게 탔을 때 혹은 연하게 탔을 때 그리고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을 약하게 혹은 강하게 할 때 캔버스에 생기는 물감의 형태는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공립도서관에 작품을 보여주고 개인전도 가져봤는데 뉴욕에서는 도서관이 전시장으로 곧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뉴욕시가 매년 주최하는 Washington Square Outdoor Show가 있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에 생긴 전시회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전시회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폴록이 미술학교에 재학할 때 이 Show에 출품한 적이 있었습니다.
뉴욕시에 슬라이드를 보내 전시회에 참가를 허락받았습니다.
사흘 동안 계속되는 전시회였는데 첫날 내 그림을 반가운 얼굴로 보던 미국인 청년 하나가 돌아서더니 "야, 여기에 잭슨 폴록이 있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등 뒤의 친구들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난 그 청년의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
그때만 해도 잭슨 폴록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난 기분이 몹시 나빠 그림들을 포장하고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이후 폴록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미술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쓴 것이 <폴록과 친구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잭슨 폴록을 모르면 미국 회화를 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매우 중요한 화가입니다.
해프닝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앨런 캐프로우가 해프닝의 출발을 폴록의 action painting에서 왔다고 말한 것만 봐도 폴록의 영향이 회화뿐 아니라 해프닝과 그 밖의 장르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뉴욕의 미술을 쉽게 훤히 알 수 있는 길은 폴록, 앤디 워홀 그리고 마르셀 뒤샹 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이어 쓴 것이 <워홀과 친구들>과 <뒤샹과 친구들>입니다.
내 그림이 폴록의 것을 닮았다고 소리친 청년 덕분에 일치감치 화가의 길을 접고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청년이 내게 인생의 새로운 통로를 개설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입니다.
만약 그 청년을 다시 만난다면 여기에 적은 글의 내용을 말해 주고 기꺼이 술 한 잔 사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청년에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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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나이키가 아니라 사원 나이키

 

 

프로필레아Propylaea 남쪽에 있는 아테나 나이키 사원Temple of Athena Nike은 기원전 427-424년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한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가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파르테논 건너편 북쪽에 있는 에레크테움Erechtheum은 좀더 규모가 크며 복잡한 구조의 사원으로 기원전 421-405년경에 건립되었다.
아테네 전설에 등장하는 왕 에레크테우스에게 헌납한 사원은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며,동쪽에 있는 방은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Athena에게 헌납했으므로 아테나폴리스Athenapolis라 명명한 것이다.
에레크테움은 두 칸으로 되어 있으며 커다란 사원은 북쪽을 향하고 있고
작은 사원은 파르테논을 향하고 있는데 이 작은 사원이 유명한 '처녀들 Maidens'로 6명의 처녀가 머리에 지붕을 이고 있다.
남성적인 파르테논 신전의 건너편에 있는 여성적 스타일의 이 사원은 비교가 되는 사원으로 두 사원이 묘합되어 나타났다.

건물을 조각으로 장식하는 방법은 조각의 발달에 따른 것으로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성행했으며 코린티안은 이오니아인의 건축 스타일을 변형해 그들 특유의 건출물을 창조했는데 이오니아인 스타일의 식물 줄기에 잎들을 무성하게 달았다.
코린티안으로 처음 건축한 것은 아테네에 있는 '리시크라테스 기념탑 The Monument of Lysicrates'으로 기원전 334년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속이 빈 둥근 기념탑을 세 기둥이 버티는데 그들이 좀더 큰 규모로 건물을 건립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조각과 건축에 관해 좀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잰슨H. W. Janswon의 저서 <예술의 역사 The History of Art>를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교보문고 원서파는 곳에 있는데
매우 두터운 책으로 10만 원이 조금 넘지만 20% 할인해주니까 8만 여원이 될 것이다.
이런 책은 돈을 아끼지 말고 사서 두고두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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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미학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오게 해서 자신을 위해 거대한 무덤을 제작할 것을 의뢰했는데 이는 40개 이상의 실제 사람 크기 조각들이 장식되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율리우스가 1513년에 사망하고 재정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그 밖의 이유로 해서 무덤은 완성되지 못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를 한동안 비극으로 여기고 몹시 부끄러워했다.

한편 율리우스는 1508년 그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의뢰했는데 그는 조각이 아니라 그림으로 의뢰받은 일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가 율리우스의 무덤에 관해 미켈란젤로와 다시 협상하는 가운데 그로 하여금 <모세 Moses>와 두 점의 <노예들 Slaves>을 제작하게 했다.
메디치 가문이 1512년에 다시 피렌체에 집권하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1514년부터 1534년까지 피렌체에 거주했으며, 그 후부터 사망한 1564년까지 로마에 거주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무덤 장식을 막 마친 후였다.
메디치 가문의 두 교황, 레오 10세Leo X(로렌초의 둘째 아들로 1513년에 교황에 선출되었다)와 클레멘트 7세가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자신들이 의뢰한 작업에 전념하게 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후계자와의 계약을 곧 실행할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1518년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성 로렌초 성당 외관을 위한 모델을 디자인했으며, 1520년 성 로렌초 성당 내의 영안실 예배당에 메디치 가문을 위한 무덤을 만들기로 계약했다.

미켈란젤로의 미학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만만했는데 다음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천 년 후 누구도 그것들이 그렇다는 것 외에 달리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쏜 화실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을 대리석으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로 의인화하여 묘사했는데 그것들이 <새벽 Dawn>·<낮 Day>·<황혼 Dusk(혹은 Twilight)>·<밤 Night>이다.
그는 <낮>과 <밤>을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의 무덤에 장식했으며, <새벽>과 <황혼>을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무덤에 장식했다.
<밤>의 경우 그는 자신이 정녕 만든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미 내재한 형상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고매한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관람자들로 하여금 플라톤이 말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두 무덤은 모두 성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영안실 예배당 내에 있다.
네 점의 조각은 인간을 구속하는 자연의 영역인 시간을 육체에 종속된 인간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억누르는 지상에서의 실질적인 고통의 상태를 상징한 것들이다.
로드비코가 1531년에 죽었을 때 미켈란젤로가 아버지의 사망에 관해 쓴 애정 어린 찬양의 시에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된 까닭으로 하늘에 있는 영혼들은 해방되었고, 근심과 압박들로부터 자유로우며, 부러울 정도로 고충들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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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이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걸 질문했군요. 


이 어려운 말을 사람들이 잘도 사용하던데 나도 그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6장 본문을 잠깐 봅시다.

육절 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해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이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문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제6장에서 비극을 정의했으며 이는 <시학> 전체의 핵심이 되는데 그 자신 카타르시스에 관해 더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통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하나는 카타르시스가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인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이론입니다.

'감정의 정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카타르시스의 의미로 나 자신도 이럴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로는 바로크의 시인들,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 그리고 레싱Lessing이 있습니다.

20세기에 카타르시스에 대한 연구가 있고 의학적 연구도 있어 이선생의 글에서도 이런 점을 보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카타르시스에 대한 연구가 비극 그 자체에 대한 연구에 비해 퇴조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에서 제6장은 A4 용지로 한 장 분량입니다.
앞에 내가 인용한 것과 비극의 구성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지요.

따라서 이선생은 고민할 필요 없이 '감정의 정화'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헌데 나의 경우 비극에서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지 않고 희비극에서 이런 '감정의 정화'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챨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경우 운명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비극은 주로 인간의 한계, 즉 운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운명을 믿지 않는 나는 희비극에서, 채플린의 영화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나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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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미술학교 2


당시 교수로 내정되었던 카노狩野 호가이狩野芳崖(1828~88)가 동경 미술 학교 창립 한 해 전에 타계했지만,
일본화 교수진으로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카노 도모노부狩野友信 등의 카노파狩野波가 맡게 됨으로써 남화를 배격하고 일본화풍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카노파란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를 시조로 한 화가 계통으로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까지 장군 가문의 어용 화가가 되어 번영한 화풍을 말한다.
카노파 회화는 중국 송·원대의 그림과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중국화를 주요 원천으로 하여 거기에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중국 회화 양식을 일본화한 일본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야마토에大和繪 전통을 합친 것으로 고전 지향이 농후했다.
보수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무사들에게 카노파 회화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카노 호가이는 메이지 시기에 이상주의적 신일본화의 제창자로서 남송대의 마원, 하규 즉 마하파馬夏波와도 연결되는 공간 구성과 묵필법을 구사했으며 하시모토 가호와 더불어 카노파에 입문하여 그림을 익힌 동문이었다.
한편 동경 미술 학교의 개교와 함께 일본에서는 경도청년회 공진회가 열렸으며,
일본 남화협회가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에 의해 결성되는 등 지속적으로 근대 화단의 신기류가 형성되어 갔고,
10년 후인 1898년에 이르러서는 오카쿠라 덴신이 하시모토 가호 이하 일본화 교수들과 더불어 동경 미술 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을 비롯하여 26명의 정회원으로 일본미술원을 창립했다.
1901년 덴신의 뒤를 이어 동경 미술 학교 고장에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가 취임했다.
마사키는 매우 유능한 교장으로 그 후 1932년까지 30년 이상을 재임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전통 미술과 서양 미술 그리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모두 동등하게 존중되는 소위 중용의 방침을 취했다.
당시의 대세는 여러 국면에서 서구화가 진행되어 회화에서는 전통파인 일본화과보다는 서양화과가, 조각에서는 전통파인 목조부보다 소조부,
즉 서양 조각이 활기를 디게 되지만,
오카쿠라 덴신이 교장이었던 시대에 일단 제도화된 전통 유지를 위한 조직, 설비, 교육 체계도 폐교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한 때는 마사키 교장 시대였다.
덴신 교장 시대에는 서양인이 3명 입학했을 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마사키 교장 시대의 동경 미술 학교는 서서히 규모가 확대되어 1900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에만도
일본화과, 서양화과, 조각과, 도안과, 건축과, 금공과, 주조과, 칠공과, 제판과, 임ㅧㅣ사진과, 도화사범과 등의 많은 과가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의 대다수는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조각과와 소조부에 입학했다.
1901년에 홍아회紅兒會가 창립되고,
1907년에 문부성 미술 전람회와 국화옥성회國畵玉成會가 창립되고,
1909년에 교토에서는 공예학교에 이어서 시립회전市立繪專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14년 일본 미술원전이 다시 재흥전을 개최했으며, 1916년에 금령사金鈴社, 1918년에 국화 창작협회, 1919년에 제국 미술원 전람회, 1921년에는 일본 남화원이 결성됨으로써 도미오카 뎃사이 이후의 수묵 계열에 자체적인 응집력을 보여주었고,
신흥대화회新興大和繪도 결성되었다.
1923년에는 혁신 일본 화회가 아리키 주빙荒木十敏에 의해 결성되었으므로 1920년대는 신일본화가 성숙단계로 접어든 때라고 할 수 있다.
1929년에 후쿠다 호시로福田豊四郞와 요시다 겐이치吉岡堅二에 의해 신일본화연구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키 소메이結成素明와 아오키 오노리靑木大乘에 의해 대일미술원이 결성되었으며,
이어서 명랑 미술 연맹(1934), 신흥 미술원(1937), 일본화원(1938), 신미술인 협회(1938) 등이 결성되었다.
1949년에 동경 예술 대학이 창립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토시립미대가 문을 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서양 사조에 대한 폭넓은 수용을 거듭하게 된다.
1950년대의 두드러진 점은 신제작협회의 일본화부와 1956년 고다마 산레이兒玉三鈴의 일본화부의 결성과 1958년의 신일본미술전람회 등이다.
1960년대 이후로는 신일본화의 양식이 일면 전통에 대한 지속적인 계승의 노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서양화의 유화적 마티에르 감각을 동반하면서 입체적 질료를 구사한다든가 원근법의 전면적 사용에 의한 화면 구성의 다양한 서양적 시각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등 표현이 다양하게 전개되어진다.
한편 덴신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미술사와 서양미술사를 강의했는데 전임자 페놀로사와는 달리 미학보다는 미술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페놀로사와 덴신의 강의는 제자들의 노트를 토대로 복원된 『강창천심전집岡倉天心全集』을 통해 알려졌다.
두 사람에 의해서 미술사학이 제도적으로 탄생했다.
같은 해 동경대학에서도 ‘심미학’이 ‘심미학미술사’로 개칭되어 강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미학미술사’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국립대학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가르쳤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서양미술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분량으로는 일본 미술사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에 비하면 양적으로 질적으로 우수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최초의 체계적인 서양미술사 강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강창천심전집』을 보면 덴신이 서양미술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눈 후 고대에서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등을 다뤘고, 중세에서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아라비아, 고딕을 다뤘으며, 근대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뤘고,
각 시기를 종교, 정치, 미술적 측면에서 각각 다뤘다.
그가 참고한 기본 문헌은 빌헬름 뤼브케Wilhelm Lubke의 『미술사 History of Art』(1874) 영어 번역본이었다.
각 시기에 대한 강의 분량은 불균형을 이루었는데 고대를 거의 절반, 중세는 10%, 근세를 40%로 구성한 것이다.
고대에서 그리스 미술에 큰 비중을 두었고, 근대에서는 15, 16세기 르네상스에 치중했으며, 17, 18세기는 매우 간략하게 다뤘다.
이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덴신의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와 르네상스를 높이 평가하는 오늘 날의 서양 미술교육과 일치한다.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크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가 새로운 시대의 서양미술을 거론할 수 없게 만들었고
나아가 근대 일본의 서양화까지도 배척하려고 했다는 후대 일본 미술사학자들의 비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서양미술사 강의를 통해 일본 미술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덴신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까지를 ‘천황天智 시대’로 명명하면서 당대의 미술 원류를 그리스 미술로 소급되는 인도 미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서술했다.
"그리스와 인도 사이에는 늘 교통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예술가의 왕래도 있어서 그리스풍 건축이 인도에 생겨났고,
심지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곳도 있었으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살기도 했는데 …
그리스풍이 인도에 들어간 것은 때마침 불교가 융성했던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불상 제작에 있어서 그리스풍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으며
지금 인도에 유존하는 대리석 석상 중에는 그리스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이 있다."
덴신은 인도·그리스 미술이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음을 역설했다.
그는 일본 미술의 우수함을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그리스 미술이 서양미술사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일본 미술에는 이상·감정·자각 세 가지 특성이 있다면서 이상을 잘 구현한 것이 7, 8세기의 작품들로서 일본 불교 조각이 그리스 조각과 근접하며,
감정적 특성은 9세기 말엽부터 13세기까지의 작품들에 나타나 있는데 르네상스 작품들에 내재된 감정적 요소들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세기 일본 미술품에 나타난 자각성에 대해서는 “이와 비교될 만한 대상이 없다”는 말로 그 우수성을 강조했고
강의 마무리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동일한 민족의 미술로서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춘 것은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으니 이로써 일본 민족의 탁월함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런 발언에 주목한다면 덴신이 서양 미술사 강의에서 시도한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양적 배분이 단지 서양의 일반적 평가 기준을 따른 것만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그는 일본 미술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서양 미술을 거론한 것이다.
결국 그의 강의는 서양미술과 일본 미술을 대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미술이 우수함을 부각시키고 한층 더 세계적 위상으로 정립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때마침 유럽에서 일본 회화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으므로 그의 일본 미술 가치의 정립은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 조각
고대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정확하고 규격화된 이상주의에 있다.
그리스 미술은 세계 최초의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적인 미술이었으며,
따라서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조각의 전개는 해부학적인 정확함의 진보라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의 목적은 20세기 조각 대부분의 경우처럼 소재를 흥미로운 삼차원적 구조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 이상적인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정교한 균형의 원리가 실제의 인체에서 보여지는 불완전함이나 불규칙함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 조각에서 주된 재질은 청동과 흰 대리석이고 그 다음은 석회석과 테라코타가 차지한다.
신전에는 이따금 황금상아상을 안치했는데, 나무로 된 골조 위에 피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아로, 그 외의 부분은 금으로 처리한 것이다.
청동상은 처음에는 순수한 소상小像이 제작되었고, 이후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청동 공동空洞 주조법이 일반화되어 기원전 5세기에는 단독 조각상을 위한 소재로 선호되었다.
사용된 주조법은 납형법이었다.
그리스인은 조각에 표면 장식을 더했다.
채색은 처음에는 상투적이었지만 점차 자연스런 색으로 석조상과 테라코타상의 머리카락, 눈, 입술, 젖꼭지, 옷주름을 강조했다.
살부분에도 종종 채색을 했다.
허리띠 종류나 무기 같은 부속품은 금속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청동상의 눈에는 천연 유색석을 박아 넣었고, 눈썹은 금속선을 끼웠으며, 입술과 젖꼭지에는 귀금속을 상감했다.
청동의 표면은 광택이 나도록 처리했으며 때로는 채색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리스 조각이 무색인 것은 이러한 채색의 대부분이 벗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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