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의 지각을 이해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범주가 확장되었는데 종래의 회화와 조각의 개념으로부터 혼성 형태들로 늘어났다.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재료들이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파포먼스에서의 사람의 몸·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인 개스·에너지·대규모의 프로젝트와 대지예술·사회 정치적 집단에 대한 개입(요셉 보이즈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컴퓨터와 전기사용·가상현실 등이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지각한 내용을 엽서·레코드·책 등으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되는 예술가들은 비데오·필름·사진 등을 만들어 시각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홍보하는 데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려고 언론 매체에 보내는 보도자료를 만들고 시·일기·편지 등을 쓰는 예술가들도 있는데 이 모든 행위가 한 마디로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루이스 부르좌 같은 예술가는 미술사학자들을 하찮게 여겼는데 그녀는 그들이 예술가들로부터 지각을 착복한 후 자신들이 예술가들만 못하지 않다는 것을 혹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간주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예술가들에 대한 인터뷔가 언론 매체에 의해 매우 성행했으며 그 내용이 라디오·필름·정기간행물·책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관람자들이 예술가들의 지각을 이해하기가 아주 쉬워진 것이다.

인터뷔의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는 미술품이 제작된 원인·의미·참조 그리고 물질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에 관해 전혀 글을 쓰지 않거나 인터뷔에 응하지 않는 예술가들도 있는데 시 툼블리가 한 예가 된다.
툼블리의 경우 침묵 자체가 오히려 지침이 되고 그의 특성을 나타내준다.
한때 예술가들 사이에 “최고의 예술가는 죽은 예술가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죽은 예술가는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툼블리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관해 설명하거나 비판에 대해 반론하거나 변명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조지아 오키페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에서의 에로틱한 내용과 페미니즘적 의도에 관한 비평적 해석을 기피했다.

1980년대 ‘이론 산업 theory industry’이란 말이 유행했으며 이는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1940년대 중반에 언급한 ‘문화 사업 culture industry’이란 말과 관련 있다.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가 각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혹은 각 예술가의 독특한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의 범주가 확대 혹은 변경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특히 지성적 예술가들의 자신들을 옹호하는 발언은 그 내용의 폭과 깊이가 매우 커서 그들에게 미술사학자나 평론가의 글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이론은 개념예술가들에 의해 주로 양산되었으며,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조셉 코수츠Joseph Kosuth의 글을 읽은 후 언어로 표현되는 이성과 예술로 시사되는 감정 사이에 깊은 골이 있음을 알고 서양의 인식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코수스가 ‘이론적 theoretical’ 글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류의 글쓰기가 어떤 제스처와 나머지 것, 즉 글쓰기가 그림보다 더이상 투명하지 않다는 걸 감출 수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평, 즉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이 이미 예술이란 것을 안 것이다.”

페미니스트이며 이론가 알리슨 재거Alison M. Jaggar는 서양 전통 철학이 “감정을 잠재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지식의 전복”으로 해석했으며, “감정이 아닌 이성이 지식을 얻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기능으로 취급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이론이 예술이 되었을 때 감정은 이성과 지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범주가 확장되었더라도 그리고 예술가들이 자신들에 관해 말하여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예술을 옹호 혹은 침묵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옹호했더라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 관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각한 바를 이해하고 동조하게 만들려는 데 있었다. 아돌프 고틀립과 마크 로드코는 1943년대 초 함께 작업했는데 두 사람은 “예술가들로서 우리의 기능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법대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1969년 코수츠는 예술가가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면서 리차드 세라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예술을 만들지 않고 행위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원한다면 그건 그의 문제지 내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다.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나중에 결정될 부분이다."

코수츠는 말했다.

"세라는 자신의 작품이 함축한 바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세라가 진정 관람자가 예술임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거라면 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그가 미술품으로 존재하는 데 있어 책임이 없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져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의 행위에 관해 알 수 있을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건 그가 행위를 마친 후 행위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몇 화랑 혹은 뮤지엄에 전시하는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콜렉터들에게 팔리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이 아는 것이다."

미국 해프닝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앨란 캐프로Allan Kaprow는 1966년에 말했다.

"한때 예술가의 과제가 훌륭한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어떤 류의 예술이라도 만들기를 기피한다.
한때 작품이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보여져야 만했다.
이제 평론가는 완전한 권위를 누리고 예술가들은 평론가들을 완전히 불신한다."

미술은 문화적 배경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철학적 요소에 의해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철학적 요소란 리오타르가 말한 대로 역사를 초월하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미술품에 대해 설명해준다.
어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매우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들의 이론은 미술품 자체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하는 바가 없고 미술품의 역사적 그리고 반역사적 특정한 암시를 알게 해준다.
모순되는 사회적·문화적 상황에서, 정치적 이념 안에서, 그리고 작품분석과 시각적 실천의 문제 안에서 예술가들의 이론은 인식과 지각을 통한 과정의 일부분으로 인류의 경험과 의식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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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원 그리고 조선 미술전람회


당시 일본 서양화단을 보면,
1907년에 개설된 문전에서 백마회 계열의 소위 일본 외광파가 아카데미즘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10년, 타카무라 코타로는 『녹색의 태양』에서 개성과 주관을 강조했고,
같은 해 창간된 잡지 『백화 白樺』는 세잔을 비롯하여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등 후기인상주의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후 1914년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亨를 중심으로 이과회에 결집한 젊은 예술가들은 재야단체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속속 새로운 사조를 도입, 이식하게 되었으며,
1910년대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를 거쳐 1920년대에는 프로레타리아 미술, 초현실주의의 도입에 이르게 되었다.
제국 미술 학교가 개교할 시기에는 이러한 개성과 자유, 주관의 시대가 시작된 지 오래된 때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서양에서 갓 들어온 새로운 사조에 많은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이 주목한 때였다.
귀국 후 유학생들의 전시활동은 선전 참가와 재야단체의 조직 및 참여로 나타났는데, 130명 중 선전에 참가한 사람은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공예 네 부문에서 31명뿐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재도쿄 미술 협회전에 적극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제국 미술 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동경에 유학한 화가들이 모여 1938년에 창립전을 가진 후 여섯 차례에 걸쳐 전람회를 개최했다.
제국 미술 학교 출신 작가들은 해방 후 대학과 중고등학교 등의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20여 명은 월북했다.

문화 학원
문화 학원은 1921년 건축가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가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亨과 함께 동경의 간다神田에 설립한 학교였다.
이사쿠는 자산가로서 유화를 그리며 도자기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창립시 2교실과 무용실 겸 강당만으로는 협소하여 1923년 목조 4층의 건물을 증축했지만 낙성 직후의 관동대지진으로 화를 입어 창립시의 영국 민가풍 건물과 일본 정원이 소실되었다.
관동 대지진은 약 340만 명의 사상자를 낸 가공할 만한 천연재해였다.
대학부에 본과(현재의 문학부)와 미술과가 설치된 것은 1925년이었다.
교장 이사쿠의 필화를 시작으로 정부의 탄압이 날로 강해졌고 1943년 마침내 “일본의 국시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폐쇄명령을 받았으며 건물은 군에 징용되었고 교장은 전쟁반대와 불경죄로 구치되었다.
1946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군에 징용되었던 건물이 풀리고 교장의 불경죄와 학교의 폐쇄령도 자연 해소되었다.
문과와 미술과가 이듬해 재개되었다.
이사쿠는 1963년 78세로 타계했고, 1931년부터 학감으로 아버지를 도왔던 장녀 니시무라 아야가 교장에 취임했으며 장남 西村久二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西村久二의 설계에 따라 1966년에 지상 5층, 지하 1층의 신교사가 낙성했다.
1985년 고등학교 과정에 상당하는 예술과가 설립되어 도자과와 함께 문화 학원 예술 전문 학교로 인가 받았다.
1988년에는 전문 과정 미술과가 추가되고 2002년에 고등 과정 예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는 각기 오차노미즈에 있는 문화 학원의 고등 과정 미술과와 전문 과정 미술과로 통합되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유학생이 입학할 때만 해도 입시시험은 형식적이었고 동경 미술 학교만 제외하고 지망하면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동경 미술 학교는 징병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입학 경쟁이 매우 높았다. 문화 학원은 교복이 없었으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다.

조선 미술 전람회
일본 근대 미술과 미술 학교는 조선 근대 미술이 뿌리를 내리는 온상이었고, 조선 화단을 이끈 대부분의 주역들이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비록 일본으로 유학을 오지 못했더라도 조선의 작가들은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 작가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관련 서적을 통해 서양의 근대 미술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일제 시기에 이들 대부분의 활동무대는 일본 총독부가 1921년 12월 27일에 설립한 조선 미술 전람회(선전)였다.
선전에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은 조선에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하는 것으로 조선 거주 일본인 화가들이 자신들의 활동무대로 삼았다.
서예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심사위원들이 일본에서 초빙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경 미술 학교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따라서 일본 화풍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1922년에 발간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는 선전 개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오랫동안 폐정에 시달려 온정이 모자라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온 조선도, 제국의 시정 이후 정치가 잘 되어 문명의 혜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넓게 각종 방면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중요한 미술의 관계에는 그다지 적극적인 시설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감이 있다.
미술장려를 위한 전람회의 개최는 우리들이 다년간 부르짖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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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리의 우미의 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1400년대의 예술가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바자리는 “그들에게는 비례의 문제에서, 인물상을 정확히 재보지 않고서도 측정을 통해 나오는 미를 능가하며 그 크기에 맞는 우아함을 산출할 수 있는 어떤 판단의 정확함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조각에 관한 서문에서 “눈에 의한 판단보다도 더 좋은 판단은 없다.
그 무엇이 아무리 정확하게 측정되어 묘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눈에 거슬린다면 계속해서 혹평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입장을 좀 더 분명히 했다.

최종적으로 눈에 의존하는 태도는 피렌체 매너리즘 회화와 바자리의 견해를 특징적으로 말해준다.
피렌체의 매너리스트들과 바자리에 의해서 미술의 지적인 면과 감정적 면이 한층 떨어졌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인간 행위와 감정에 대한 묘사에 관심을 둔 반면 매너리스트들과 바자리와 같은 이론가는 회화세계에서 인물의 누드를 묘사하는 데 주로 역점을 두었다.
미켈란젤로 또한 나상의 인체를 화가가 연구해야 할 최우선적 대상으로 여겼지만 앞서 본 대로 그는 나상을 정신적이고 신적인 미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더욱이 말년에 가서는 주로 강렬한 비극적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블런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론』에서 바자리의 이론의 핵심을 ‘우미 la grazia’로 보았다.
우미란 말은 바자리 시대 이전에는 기껏해야 정도 차이로서만 미와는 구별될 뿐 막연하게 미라는 단어와 바꿔써도 상관이 없는 듯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 회화에 사용되었다.60-5)
바자리에 와서 우미는 매우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으며, 미와는 확연히 구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와는 대조가 되는 의미를 지니게도 되었다.
『미술가 열전』에서 확실한 정의가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눈에 띠는 구절을 살펴보면 미는 규칙에 의존하는 합리적인 성질인 반면 우미는 판단에 의존하는, 따라서 결과적으로 눈에 의존하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성질이었다.
바자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우미였지 미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그는 “완전한 예술이라면 섬세함, 세련됨, 최고의 우아함과 같은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약 이런 특징들이 인체묘사에 결여되었다면 “사지 전체가 고대 규범에 맞아떨어지며 비례를 통한 정확한 조화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정확함이 우미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미를 감미로움 또는 부드러움이란 개념과 연관해서 생각했다.

바자리의 우미의 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숙련이란 개념과 관련지울 때이다.
빨리, 그리고 쉽게 그린다는 개념은 1400년대 화가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생각이었을 뿐더러 그 시대의 이론가들도 절대 권하지 않던 일이다.
하지만 매너리스트들은 벽면을 채우는 데 최고의 빠른 기록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을 대단한 자만심으로 여겼다.
바자리는 자서전에서 자기는 매우 빨리 작품을 제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쉽게 그리고, 거의 애쓰지 않고서도 해낼 수 있다고 뽐낸 구절이 있는데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던 듯 로마에 있는 팔라조 델라 칸첼레리아의 큰 방을 그가 100일만에 프레스코화로 채운 사실이 그의 말을 입증했다.

화가가 제작과정에서 수고한 흔적이라던가 애쓰고 땀을 흘린 흔적이 있으면 그것이 그림에서 우미를 없앨 뿐만 아니라, 바자리의 판단에 따른 표현에 의하면 무미건조함이란 치명적인 성격을 그림에 갖다 준다.
그는 1400년대 전체를 무미건조하다고 규정하며 비난했다.
바자리는 그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 “공들여서 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자 했지만 “작품의 완성을 위한 그런 식의 노력은 화법에 무미건조함을 가져다 준다”60-6)고 했다.
그리고 화가들은 레오나르도 이후에야 비로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그 동류의 화가들의 지나친 연구가 미술에 남겨 준 화법상의 무미건조함, 딱딱함, 정확성이 없어짐으로써 나온 이 완벽한 우미”를 작품 안에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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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능동적으로 읽어야 한다

 
미술사란 오늘날의 입장에서 과거를 체계적 방법으로 되돌아보고 이해하려는 이성적 관망 혹은 관찰이다.
미술사가 편견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혹은 이해하려면 한 저자가 편찬한 미술사만 읽는 것으로는 부적절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적어도 몇 사람이 편찬한 미술사들을 능동적으로 읽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독자 자신도 편집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능력을 가져야 만한다.

1980년대 캠브리지의 킹스 칼레지King’s College의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미술사가 다른 예술에 대한 연구에 비해 뒤떨어진 건 슬픈 사실이다”라고 했다.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뒤떨어진 원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학자들이 그룹으로 연구하지 않았고 각자 개인의 입장에서 편찬하다 보니 편견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뒤떨어진 가장 주 요인은 미학 이론들이 분분하고 상반되는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해 어느 한편의 이론에서 보면 당연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요 이론들의 입장을 서술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다음은 미술사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을 확장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미술 관련 분야들에 대한 폭넓은 수용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술 관련 분야들 예를 들면 평론·미학적 이론·유행·미술품 감정·미술시장·뮤지엄과 화랑의 역할·미술품 수집가들의 취향 등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것들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미술사에 끼치는 영향과 그 결과도 언급되어야 만한다.
미술사를 편찬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적 판단을 유일한 잣대로 삼지 않고 다양한 이론들을 수용하고 미술 관련 분야의 역할들도 인정해야 만한다.

마지막으로 예술가 자신들의 미학적 이론을 중요한 요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정작 미술품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확신에서 창작의 출발점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학자와 평론가들을 불신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미적 판단을 논리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과거 예술가들과는 달리 좋은 교육 환경에서 수학한 이들은 지성적인 면에서도 웬만한 미학자와 평론가들보다 우수하며, 무엇보다도 고백하듯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한 데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예술가들의 미적 판단을 알아보는 데서 이 글이 집필되었다.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아 이들을 모두 다룰 수 없어 지면상 미국 예술가들만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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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에로스의 역사를 혹은 기원을 알아본다.
이 말은 플라톤으로부터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은 물론 초대 기독교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까지 널리 통용되었다.
에로스는 성적 열정으로부터 배움에 헌신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궁극적인 대상은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관조하는 장점이 창조의 미이며,
세상의 미를 느끼는 것이 세상을 에로스하는 것이고,
이는 곧 창조주를 사랑하는 행위이다.
이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확고해지기 전의 에로스의 의미를 그리스 고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메로스가 에로스란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창조주를 지칭해서 이 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일반 명사인 사랑, 욕망의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헤시오도스Hesiod(기원전 700년경)의 <신통기 Theogony>에는 에로스가 원시시대 세 신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며 나머지 두 신들은 혼돈과 대지이다.
에로스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신들의 계보에는 빠졌지만 그는 두 동료 불멸의 신들보다 훨씬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사지가 무력해졌으며 신들과 인간 모두의 이성에 무력해졌다.

헤시오도스가 언급한 에로스는 이성의 적인 권력에 자신을 부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소포클레스Sophocles(기원전 496-406년경)의 <안티고네 Antigone>에서 발견되는데 안티고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이유로 크레온Creon이 그녀가 오빠의 시신을 장사지낸 사실을 알렸을 때 들려오는 합창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에로스는 안티고네의 비극을 알린 신으로 등장한다.
에로스는 정복하기 어렵고, 파괴적이며, 바다와 들판의 거주자들 중 방랑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신들과 명이 짧은 인간은 에로스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미치게 내몰고 정의를 악으로 전환시킨다.
이상이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에로스의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이성애, 동성애,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우정, 조국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이 모든 사랑의 형상들이 에로스 혹은 필리아philia(자애 혹은 화목의 뜻이다)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랑이 사람들을 하나의 굴레 안에 매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사랑뿐 아니라 동물들과 우주의 모든 원소들도 이런 힘에 의해 하나가 되는데 그에게 사랑은 여신 필연Necessity이 창조한 것이다.
그는 유일한 참된 실재를 일자the One로 보고 이것이 무한하고 분할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는 약간 나이가 어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기원전 5세기경)의 저작에는 사랑이 우주역사의 진로를 설명해주는 두 우주적 힘들 중 하나로 부상되는데 다른 하나는 투쟁(혹은 미움)이란 존재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일자가 되게 하는 사랑과 많은 것들로 분열시키는 투쟁 이 두 요소가 사물들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외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을 조화와 분열의 힘들 사이 긴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을 구형으로 보고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에 의하면 황금시기에는 투쟁 혹은 미움이 밖에 있게 되고 사랑이 안방을 차지하지만 점차 미움이 침투됨에 따라 사랑은 쫓겨나고 드디어 최악의 상태에서 미움이 완전히 안방 안에 있게 되고 사랑은 구형 밖에 있게 된다고 보았다.
다음에는 왜 그런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에 의하면 반대의 운동이 시작되어 황금시기가 다시 도래한다.
그러나 영원히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주기가 되풀이될 뿐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에로스를 평화와 조화를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사랑, 미의 여신)에게 귀속시켰는데 그에게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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