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범주가 확장되었는데 종래의 회화와 조각의 개념으로부터 혼성 형태들로 늘어났다.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재료들이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파포먼스에서의 사람의 몸·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인 개스·에너지·대규모의 프로젝트와 대지예술·사회 정치적 집단에 대한 개입(요셉 보이즈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컴퓨터와 전기사용·가상현실 등이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지각한 내용을 엽서·레코드·책 등으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되는 예술가들은 비데오·필름·사진 등을 만들어 시각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홍보하는 데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려고 언론 매체에 보내는 보도자료를 만들고 시·일기·편지 등을 쓰는 예술가들도 있는데 이 모든 행위가 한 마디로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루이스 부르좌 같은 예술가는 미술사학자들을 하찮게 여겼는데 그녀는 그들이 예술가들로부터 지각을 착복한 후 자신들이 예술가들만 못하지 않다는 것을 혹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간주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예술가들에 대한 인터뷔가 언론 매체에 의해 매우 성행했으며 그 내용이 라디오·필름·정기간행물·책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관람자들이 예술가들의 지각을 이해하기가 아주 쉬워진 것이다.
인터뷔의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는 미술품이 제작된 원인·의미·참조 그리고 물질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에 관해 전혀 글을 쓰지 않거나 인터뷔에 응하지 않는 예술가들도 있는데 시 툼블리가 한 예가 된다.
툼블리의 경우 침묵 자체가 오히려 지침이 되고 그의 특성을 나타내준다.
한때 예술가들 사이에 “최고의 예술가는 죽은 예술가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죽은 예술가는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툼블리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관해 설명하거나 비판에 대해 반론하거나 변명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조지아 오키페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에서의 에로틱한 내용과 페미니즘적 의도에 관한 비평적 해석을 기피했다.
1980년대 ‘이론 산업 theory industry’이란 말이 유행했으며 이는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1940년대 중반에 언급한 ‘문화 사업 culture industry’이란 말과 관련 있다.
소위 말하는 다원주의가 각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혹은 각 예술가의 독특한 미학을 바탕으로 미술의 범주가 확대 혹은 변경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특히 지성적 예술가들의 자신들을 옹호하는 발언은 그 내용의 폭과 깊이가 매우 커서 그들에게 미술사학자나 평론가의 글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이론은 개념예술가들에 의해 주로 양산되었으며,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조셉 코수츠Joseph Kosuth의 글을 읽은 후 언어로 표현되는 이성과 예술로 시사되는 감정 사이에 깊은 골이 있음을 알고 서양의 인식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코수스가 ‘이론적 theoretical’ 글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류의 글쓰기가 어떤 제스처와 나머지 것, 즉 글쓰기가 그림보다 더이상 투명하지 않다는 걸 감출 수 있음을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논평, 즉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이 이미 예술이란 것을 안 것이다.”
페미니스트이며 이론가 알리슨 재거Alison M. Jaggar는 서양 전통 철학이 “감정을 잠재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지식의 전복”으로 해석했으며, “감정이 아닌 이성이 지식을 얻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기능으로 취급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이론이 예술이 되었을 때 감정은 이성과 지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범주가 확장되었더라도 그리고 예술가들이 자신들에 관해 말하여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예술을 옹호 혹은 침묵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옹호했더라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 관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각한 바를 이해하고 동조하게 만들려는 데 있었다. 아돌프 고틀립과 마크 로드코는 1943년대 초 함께 작업했는데 두 사람은 “예술가들로서 우리의 기능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법대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1969년 코수츠는 예술가가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면서 리차드 세라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예술을 만들지 않고 행위할 뿐이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원한다면 그건 그의 문제지 내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다.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나중에 결정될 부분이다."
코수츠는 말했다.
"세라는 자신의 작품이 함축한 바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세라가 진정 관람자가 예술임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거라면 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그가 미술품으로 존재하는 데 있어 책임이 없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져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의 행위에 관해 알 수 있을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건 그가 행위를 마친 후 행위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몇 화랑 혹은 뮤지엄에 전시하는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콜렉터들에게 팔리는 것에 의해서 우리들이 아는 것이다."
미국 해프닝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앨란 캐프로Allan Kaprow는 1966년에 말했다.
"한때 예술가의 과제가 훌륭한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어떤 류의 예술이라도 만들기를 기피한다.
한때 작품이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보여져야 만했다.
이제 평론가는 완전한 권위를 누리고 예술가들은 평론가들을 완전히 불신한다."
미술은 문화적 배경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철학적 요소에 의해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철학적 요소란 리오타르가 말한 대로 역사를 초월하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미술품에 대해 설명해준다.
어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매우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들의 이론은 미술품 자체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하는 바가 없고 미술품의 역사적 그리고 반역사적 특정한 암시를 알게 해준다.
모순되는 사회적·문화적 상황에서, 정치적 이념 안에서, 그리고 작품분석과 시각적 실천의 문제 안에서 예술가들의 이론은 인식과 지각을 통한 과정의 일부분으로 인류의 경험과 의식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