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춥고 어두운 곳이다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하나는 서양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학적 사상으로 우주의 기원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국한시키는 것이다.
17세기의 주교 우서Ussher는 우주가 창조된 때를 기원전 4004년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어리석게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나이를 합했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인은 우주가 이미 존재했고 또한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믿었다.
우주를 불변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우주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창조된 것인지는 형이상학과 종교의 문제이다.

칸트는 1781년에 쓴 유명한 <순수이성 비판 The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 모두 타당한 논쟁이라고 적었다.
칸트는 우주를 관측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성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다.

19세기에 지구와 우주가 변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이 땅에서 수억 또는 수십억 년 된 바위를 발견했다.
독일 물리학자 루드빅 볼트츠만Ludwig Boltzmann은 소위 말하는 열역학의 두 번째 법칙Second Law of Thernodynamics을 발견했는데 우주 안에 무질서가 계속 증가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우주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또한 완전한 무질서 상태로 퇴보하여 모든 것들이 동일한 온도 상태에 머물게 된다고 주장했다.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1929년에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허블에 의해서 우주 기원에 대한 논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꾸 멀어져가는 모든 은하를 과거로 되돌려본다면 모든 은하가 한데 어울러져 있었던 때가 있었을 텐데 그때가 대략 100억 년과 200억 년 사이가 될 것으로 산출되었다.
이는 우주의 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빅뱅Big Bang이 발생했는데 그때 우주의 밀도와 공간-시간의 만곡(굽음)은 무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가 여태까지 발견한 과학의 법칙들은 이 시기에는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

캠브리지 대학의 마틴 라일Martin Ryle과 그의 동료들은 은하 밖에 있는 라디오 주파들의 출처를 측정한 결과 강한 출처들보다는 미약한 출처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발견으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강한 출처들이 평균 출처들보다 덜 자주 일어나는 우주의 어느 지역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빛이 좀더 먼 출처를 떠나 우리들을 향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출처의 밀도가 높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4년 아르노 펜지아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은하 밖 멀리로부터 오는 극초단파 방사Microwave Radiation의 배경을 발견했는데 극초단파 방사는 뜨거운 물체로부터 방사된 것으로 온도는 절대영도(-273 C)보다 겨우 2.7도 높다.

그러니까 우주는 춥고 어두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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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의 황무지에 복음을 전한 존 그래엄

  

존 그래엄John Graham(1881-1961)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인으로 1920년부터 뉴욕에 거주했으며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따랐다.
그를 가장 가까이 한 아실 고르키와 윌렘 드 쿠닝이 그의 미학에 귀를 기울였고 잭슨 폴록과 아돌프 고틀립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래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 화법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적극 권했다.
유럽을 자주 왕래한 그는 동갑내기 피카소와 우정이 두텁다고 했다.

그래엄은 초기에 나움 가보와 엘 리시츠키에게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부터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는 저서 <예술의 시스템과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잠재의식과 관계가 끊긴 것을 복구하며 … 잠재의식의 고동치는 사건들을 의식으로 끌어온다”고 적었는데 정신분석 이론과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그를 가리켜서 그린버그는 “황무지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뉴욕은 그야말로 예술의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다.
드 쿠닝은 자신이 미국에 와서 재능 있는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면서 고르키와 대비드 스미스 그리고 그래엄을 꼽았다.
고르키와 드 쿠닝뿐 아니라 조각가 스미스에게도 그래엄은 미술의 전도사였다.
스미스는 “그래엄의 매년 파리 방문은 우리 모두에게 추상사건들을 통고하게 했다”고 했는데 그래엄이 예술의 수도에서 보고 듣고 온 새로운 것들을 뉴요커들에게 쏟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엄은 매우 건강했으며 회갑을 넘은 나이에도 손을 바닥에 대지 않고 머리를 땅에 댄 채 물구나무를 설 정도였다.
매일 아침 그는 머리 전체를 면도하고 눈과 눈썹만 남겼는데 배우 율 브린너보다는 못생겼지만 개성적인 면에서 보면 브린너에 비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1939년 네 번째 아내 콘스탄스와 함께 그리니치 빌리지에 아파트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는 경제공황으로 일자리를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래엄은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에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했다.
1930년대 후반 그의 아파트는 각종 가면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미술은 서양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원리들에 기초하여 창조된 것들”이라면서 그것들은 “정신적 감성들”이라고 했다.
그는 예술과 무의식 세계는 관련이 있다고 보았으며 “원시인들은 문명인들보다 무의식 세계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1937년에 발표한 글에서 “무의식적 마음은 창조적 근저이자 자원이고 힘과 모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의 저장소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술의 시스템과 변증법>에서 “기교의 완전함과 우아함이 미술품을 제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엄은 “미술품은 실재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예술가의 지성적·감성적 반발에 의해서 공간 속에 꾸밈없이 즉흥적으로 기록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엄은 삼차원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순진했던 주장은 “예술에서 대단한 데카당스 시기에 해당했다”면서 피카소의 천재성이 “모델을 사용한 회화나 삼차원적 회화를 사이비 예술로 단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엄의 이런 주장을 몇 년 후 그린버그가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에서 모더니즘에 관해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스 호프만과 그래엄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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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의 모델 살롱


조선 미술 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책의 담당 부처인 문부성文部省이 프랑스의 18세기 살롱을 모델로 1907년에 만든 문전文展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문전은 1919년에 제전(제국 미술 전람회)으로, 1937년에 신문전(신문부성 미술 전람회)으로, 1946년에 일전(일본 미술 전람회)으로, 1969년에 개조 일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선전은 총독부의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창설된 것이다.
1944년까지 23회나 계속된 선전 서양화부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일본인 서양화가들은 근대 일본 서양화사에서 뚜렷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경 미술 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수급 화가들이 주로 위촉된 심사위원들은 조선인의 출품작이 민족적 현실이나 일제하의 저항정신, 그 외의 엄숙한 인간의 실존문제나 역사의식, 사회의식 등에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단순한 자연미의 재현으로서의 향토주의 풍경 또는 표현미 자체만을 추구한 인물화, 정물화에 그치도록 작용했다.
일본에서 향토 연구를 주도한 민속학의 주요 그룹 명칭이 향토회였다.
향토란 말은 일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살롱Salon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구성하는 작가들의 전람회가 살롱이다.
이 명칭은 루브르 궁전의 아폴론 살롱에서 전람회가 열린 데서 유래했다.
17세기에 루이 14세의 정치고문·재무장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83)와 화가 르 브룅Charles e Brun(1619~90)에 의해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창설된 이래 전람회는 1737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2년마다 열렸고, 그 이후에는 해마다 열렸다.
살롱은 파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유일한 전람회였으므로 이를 통해 아카데믹한 관제 미술이 세평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참가를 거절당한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자들을 위한 살롱(살롱 데 르퓌제)을 개최하라고 명했다.
1881년에 살롱은 프랑스 예술가협회로 재편되었으며, 전년도 출품자들 중에서 심사위원을 선출했다.
이 새로운 조직도 참신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적이었다.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조형 탐구나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3년의 『문화조선』에 기고한 윤희순의 미술시평 ‘선전 앞에서’에 이런 지적이 있다.
… 조선의 일반적 미술형태란 것은 하나의 범주를 만들게 하면서 어떤 질곡 속에 맴도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동경의) 문전, 이과전에의 동경과, 거기에서 위촉되어 온 심사원을 해마다 맞이한다는 것은 하나의 공통적 제작주형을 낳게 한 것이다.
즉, 그 심사원들은 각기 예술태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전 작가에 대한 요구와 장려는 하나로 집중돼 있다.
“조선의 로컬 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색적인 로컬 컬러로써 작품에 영광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고심했던 것이다.
… 실로 예술적 차이는 제재題材 그 자체보다는 제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서 빚어지는 것이겠으나, 그보다도 먼저 마음가짐에 따라 제재 선택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향토에 대한 참다운 이해와 사랑을 수반하지 않은 작가, 혹은 지성이 저열한 작가는 향토색을 풍속 그림엽서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도 포함된 신인 작품 공모경연전으로서의 선전은 초기의 서예와 사군자를 제외하고 모든 부문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의 심사위원들이 주최측인 일제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 작가들이었다는 사실은 심사위원의 의식에 따른 일본색 만연과 추종을 낳게 한 직접적인 요인들 중 하나였다.
특히 동경 미술 학교 출신들은 해방 후 창설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국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동경 미술 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믹한 보수 성향을 드러냈고 이런 성향은 한동안 국전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경 미술 학교 출신 상당수가 대학 미술 교육에 전념하여 해방 후 한국 미술 교육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들 중 가장 많은 조선 유학생들이 다닌 학교는 제국 미술 학교였다.
이 학교 출신들은 해방 이전에 재동경 미술 협회전을 비롯하여 선전과 일본의 주요 전람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국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대학 미술과 교수 등으로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특기할 점은 중국의 꿔화國畵와 일본의 니홍가日本畵 호칭처럼 조선의 전통 회화를 주체성 있게 한화韓畵 혹은 조선화로 지칭하지 못하게 서양화의 대어對語로서 동앵화란 용어가 일제에 의해 고착되어 진 것은 1922년에 시작된 선전의 운영규정에서부터였다.
제1부를 동양화부로 정함으로써 그 용어가 그 후 전통 조선화 혹은 한국화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사용된 이 용어는 해방 후에도 반성 없이 사용되었다.
한국화의 전통은 고구려의 고분 풍속화(예술철학 234)를 기원으로 고려 이래 사군자화, 18세기의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이었지만 이런 데서 한국화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이광수는 1916년 10월 31일과 11월 2일에 『매일신보』에 기고한 ‘동경유신, 문부성 전람회기’에서 옛 조선 회화는 주제가 다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신선하고 당대의 생활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야 함을 역설했다.
문학 평론가 변영로도 안중식과 조석진 화풍의 동양화는 보수적이고 생명력이 없으며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평했다.
그는 화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을 관찰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미술은 당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 사실주의 사조에 근거를 둔 두 사람의 요구와 주장은 당시 문학의 주류가 사실주의였으므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제1회 선전은 1922년 6월 1일 서울 현재의 저동 영낙정에 있던 상품진열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인 출품작가는 김용진, 현채, 이한복, 오세창, 최린, 안종원, 고희동, 심인섭, 지운영,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나혜석 등이었고
심사위원은 동경에서 건너온 세 사람과 조선인으로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이도영, 서병오, 김돈희, 정대유, 김규진 등이었다.
수상으로는 2등상에 허백련의 <추경산수>,
3등상에 심인섭의 <묵죽>,
4등상에 김은호의 <미인승무도>, 이용우의 <고성춘심>이었다.
오세창의 전서는 서예부에서 2등상을 받았고 최린의 <난>은 동양화부에서 입선했다.
조선인으로 무심사 참고품을 낸 서화가는 이도영, 김규진, 김돈희, 정대유였다.
선전 초기에 1~4등으로 수상하던 시상제도가 1926년 제5회전 때부터는 특선제로 바뀌었다.
동양화부에서 연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김기창, 장우성, 정말조뿐이다.
김기창과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의 지도를 받던 친구 사이이고 정말조는 일본 경도 회화 전문 학교를 나온 화학도로 일본에 거주했으므로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더 잘 했다.
어쩌다 서울에 와도 조선인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선전에 참여할 때에도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출품하고 서울에서는 일본인으로 선전에 심사참여한 마쓰다 마사오松田正雄의 집에 묵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동양화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들로는 가와무라 겐뽀川村憲邦,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 타나까 후미꼬田中文子, 이마다게이 이치로今田慶一郞 등이었다.
가와무라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장풍경이나 엿목판을 메고 가위 치는 모습 등 토속적인 풍속화를 주로 그렸다.
이마다게이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관리였으며 타나까는 인물, 꽃 등을 주로 그렸다. 이들은 선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다.
추천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선전에서 몇 차례 특선한 동양화가는 정종여, 배렴, 이유태, 조중현, 이응로, 허건 등이었다.
서양화가로 추천작가가 된 사람은 이인성, 심형구, 김인승, 박영선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며 특선을 수상했다.
선전에서 일본인 화가들을 제치고 특선을 한 사람은 이마동, 김종태, 박득순, 김흥수 등이었다.
조각에서는 윤효중, 김경승, 조구봉, 윤승욱 등이 특선을 수상했다.
늦게 생긴 공예부에서는 김재석, 강창원, 이세영 등이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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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블런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론』에서


우첼로는 애쓰고 공을 들인 정도가 지나치다고 해서 가장 심하게 비난받은 화가인데, 특히 원근법에 대한 그의 강한 집착은 바로 그의 판단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바자리는 간주했다.
그러므로 화가는 “눈에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우미와 숙련됨을 추구해야 만한다.”
그런데 이 숙련됨은 우미만을 산출할 뿐만 아니라 대담성같은 다른 잇점을 따라붙게 한다.
“많은 화가들은 … 초벌그림에서는 마치 영감이라는 불길에 휩싸인 듯이 그들 작품에 무엇인가 아름답고 다소 대담한 것을 구현시키거나 끝마칠 때는 어느덧 대담성은 사라지게 되고 만다”60-7)고 바자리는 대담성에 관해 언급했다.
이는 지나친 노력과 긴장으로 해서 영감의 효과가 소실되어 버림을 지적한 것이다.
우첼로의 경우 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천재의 정신은 지성이 활동하기를 원할 때만 그리고 영감의 불꽃이 불붙을 때만 행동을 개시하는 데, 이때에야 비로소 우수하고 신적인 자질과 놀랄 만한 관념의 세계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60-8)

안소니 블런트Anthony Blunt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론』에서 바자리가 우미론을 회화와 연결시켜 정밀히 연구한 최초의 저술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미론 자체를 창안해 낸 것은 아님을 지적했다.
그는 바자리가 단순히 태도에 관해 글을 쓴 저술가들, 특히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인물이 들어 있는 네오플라톤 학파 사람들이 발전시킨 인간행위에 필요한 한 요소로서의 우미라는 개념을 미술에 적용시켰을 뿐으로 보았다.
블런트는 카스틸리오네가 『궁정인』에서 피력한 사회적 의미로서의 우미에 대한 설명이 바자리가 미술에 적용시킨 우미의 개념과 너무 흡사해서 바자리가 이 개념을 『궁정인』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바자리에 의해서 우미는 교훈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실질적인 ‘속성들’과 ‘조건들’에 덧붙게 되는 특별한 성질로 규명된다.
반면 우미는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며, 좋은 판단을 가짐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잡으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다든가 행동에서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면 우미는 사라져 버린다.
완벽한 편안함만이 우미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우미를 얻기 위한 유일한 노력으로는 우미 아래 깔린 숙련된 솜씨를 감추기 위한 노력이 고작 있을 뿐이다.
블런트는 우미가 자연스러움sprezzatura(혹은 recklessness)에서 발생한다면서 이는 바자리가 회화 분야에서 우미를 얻기 위한 원리로 규정한 바와 같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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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ty의 이해

 
근대modern의 의미는 중세 초기 모데르누스modernus란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것 that which is present' 혹은 '우리 시대의 of our time'라는 뜻이며 좀더 넓은 의미로는 '새로운 new or novel'이란 뜻이다.
어원적으로 근대는 라틴어 모도modo에서 왔고 이는 '바로 지금 just now'이란 의미이다.

모더니즘이란 말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개념이 명료하게 확립된 건 19세기에 들어서였으며 과학과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계몽주의에서 비롯했는데 계몽주의의 바탕에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중산층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 근대성에 대한 자각은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본명은 Marie-Henri Beyle, 1783-1842)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정신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했다.
스탕달은 작가와 예술가를 근대성의 투사들로 보았으며 투사란 앞장을 선 용기 있는 사람들로 이를 훗날 아방가르드라고 불렀다.
호스트 윌드마 잰슨Horst Woldemar Janson과 안토니 잰슨Anthony Janson은 공저 <미술의 기본 역사 A Basic History of Art>에서 "근대에 왜 투사들이 요구되었을까?"라고 자문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시대가 새로운 것들을 천천히 받아들여 현재에 유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야 유효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모더니티에 대한 정의는 19세기 중반에 좀더 구체적으로 내려졌는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67)에 의해서였다.
미술사에서 그 시기를 말하면 회화에서는 마네와 모네를 중심으로 인상주의 스타일이 성행할 때였고, 조각에서는 로댕이 독보적인 존재로 위상을 떨칠 때였다.

보들레르는 말했다.

"모더니티는 일시적인 것, 우발적인 것, 예술의 절반으로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도시에 미의 근원이 존재한다고 말한 보들레르는 예를 들어 기관차같은 기계적 고안물들을 유기적인 것 대신 미의 상징들로 간주했다.
그는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계몽주의로부터 비롯한 이성과 진보에 대한 신뢰를 독려했다.
그는 모더니즘이 미래를 지향하는 데 비해 모더니티는 발전하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았다.
예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자유와 시대의식,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에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예술가들은 새 스타일과 새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킬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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