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명상과 주량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전한 소크라테스이다.
엄격히 말하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정한 소크라테스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플란톤의 소크라테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때는 아주 어렸을 적이었고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이복형으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마치 자신이 옆에서 보고 들은 스크라테스를 묘사했는데 그만큼 문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것은 기원전 399년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 70살 정도였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겼으며 들창코에 올챙이 배를 했다.
극작가 시노폰Xenophon은 소크라테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사티릭Satyric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실레누스Silenus(박카스의 양아버지인 뚱뚱한 노인)들 보다 더욱 못생겼다."
소크라테스는 늘 초라한 모습이었으며 헌옷을 주로 입었고 맨발로 보행했으며 춥거나 덥거나 목이 마르거나 그런 것들에 무심했고 그런 그의 태도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플라톤이 저술한 <심포지움>에는 추운 겨울 소크라테스가 군인이었을 때 "보통 옷차림에 맨발로 신발을 신은 군인들과 함께 행진했는데 군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경멸이라도 하는 것인양 느껴져 그를 노려보았다"고 적혀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에서고 명상에 잠겼는데 때로는 밤새 선 채로 명상에 잠겼으며 추운 겨울에도 선채 명상에 잠겼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수 있는지 숨어서 봤는데 새벽에야 명상을 마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또한 플라톤이 기록으로 전한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는 주량이 대단했다.
플라톤의 저서에는 그가 파티에 초대받아가 포도주를 마셨는데 밤새 마셨고 어느 누구보다 많이 마셨으며 새벽에 모두들 골아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대화하면서 술에 취하지 않았다.
분별없이 음주를 한 초기 박키Bacchi들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지성적인 박키였던 것 같다.
윤리적인 면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오르페우스 종교의 모든 성직자들 가운데 가장 모범이 되는 성직자와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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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양화 전래


중국에 서양화가 전래된 것은 1601년 전후였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가 1601년 북경에 도착하여 만력의 신종제神宗帝를 처음 알현할 때 헌상한 물품 중에 서양화 세 점이 포함되었는데,
천주 내지는 성모상을 그린 종교화였다.
신종은 그림을 보고 “이것은 산 부처다”라고 감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천주상이 살아 있는 신처럼 생동감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 처음 소개된 서양화는 초상화였고 따라서 중국 화가가 처음 시도한 서양 화풍을 그림도 초상화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명나라 말기 남경에서 직업 초상화로 부유층 사대부들에게 인기 있었던 증경曾鯨(1565~1647)이었다.


증경에게는 무려 40여 명의 제자가 있었고 그 중에는 사빈, 우지정, 서장 등과 같은 유명화가들도 있었다.
강소문의 『무성시사 無聲詩史』에 증경에 관해 ‘홍염수십층 烘染數十層’아란 구절과 장경의 『국조화징록 國朝畵徵錄』(1739)에 ‘일중묵골, 묵골기성, 연후전채 一重墨骨, 墨骨旣成, 然後傳彩’의 방법이 적혀 있는데
이는 중국 전통 묵필법의 특징을 살린다는 의미로서, 구륵법鉤勒法에 의한 묵골을 살린 다음 그 위에 서양 양식으로 여러 겹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야 거울에 비친 듯한 얼굴처럼 실제상(사조여경취영寫照如鏡取影)을 느끼게 하는 박진감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증경의 초상화를 양신은 “인물의 성격 표현과 동태적인 묘사에서 선구적”이라고 평했다.
서양화가 동양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원근과 음영 그리고 입체감으로 늘 판에 박은 듯한 평편한 초상을 그린 동양 화가들에게 이 세 가지 요소는 인물의 성격과 동태를 느끼게 해주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실재로 보여지는 경이로움이었다.
이는 중국, 일본, 조선 화가들 모두에게 직접적으로 끼친 영향이다.
리치는 1590년대 후반에 증경의 활동무대인 남경에 주로 체재하면서 그 지역 명사들과 어울리며 포교활동을 했다.
증경은 남경 천주교회에 걸린 천주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서양 양식을 좀더 적극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산동제령山東濟寧 출신의 화가 초병정焦秉貞(생몰년 미상)이다.
『국조화징록』에는 리치가 명암법이 특출하고 채색화인 천주 혹은 성모상을 전했는데 중국인으로서 그 화법에 정통한 화가는 초병정이라고 적혀 있다.
호경胡敬의 『국조원화록 國朝院畵錄』(1816)에 의하면
초병정은 흠천감의 감정監正으로 산수, 인물, 건물 등의 묘사에서 뛰어나고,
서양화법(해서법海西法)으로써 광원에 의한 명암법, 투시원근법이라는 의미의 궁심극원窮深極遠, 농담에 따른 채색을 의미하는 설색분농담設色分濃淡 등의 묘사에 뛰어났다.
요컨대 초병정이 흠천감의 관원으로 근무하면서 리치로부터 서양화 양식을 배워 그 화풍을 장기長技로 했다는 것이다.
초병정의 유명한 그림은 1696년에 제작한 <강희어제경직도 康熙御製耕織圖>이다.
이것은 강희제의 명으로 송대의 <경직도>를 제작한 것으로 농업 장려를 위해 편찬된 도해본이다.
이 목각본 도해는 전반적으로 섬세한 선묘 위주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현실감이 나는 서양의 원근법을 가미한 것이 특색으로 전통 경직도에 비하면 매우 섬세한 목각선묘로 되어 있다.


초병정은 흠천감의 감정으로 화원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로 꼽혔다.
도광道光의 『냉매전 冷枚傳』에는 “병정이 칙명을 받아 <경직도>를 그렸는데, 냉매가 그를 도왔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냉매도 “단청을 잘 그렸으며 착색에 뛰어나고 인물을 그리는 것은 당시 최고였다”, “초병정과 명성을 서로 나란히 했다”라는 구절로 보아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냉매는 60세 되던 해인 1713년에 <피서산장도 避署山莊圖>를 그렸는데 정원 곳곳에 흰 학과 흰 사슴을 삽입하여 만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되게 했다.
이 작품에는 강희의 업적에 대한 치하도 담겨 있다.
북방 초원 지방의 승덕承德에 이궁離宮을 건설한 것은 강희 만년의 요양과 안락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기후가 청량한 곳에 피서산장을 지은 단순한 의도 외에도 그곳 주변 지역 몽고, 티베트, 회부回部 등의 소수민족과 연합을 위한 민족 단결과 다민족 국가의 통일을 강화하려는 통치 목적이 내재된 것이다.
이 작품은 경관을 광활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전통적인 심원법深遠法·고원법高遠法을 병용한 것 외에도 서양의 투시원근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주변 산들의 첩첩이 쌓인 느낌과 더불어서 한없이 멀리 뻗은 커다란 계곡이 평지의 공간을 확대시켰다.
이 작품은 앞의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원근법에 따라 경물이 점차 축소되 그 효과가 젊묘하게 나타났다.
그는 경물을 의도적으로 낮게 축소시켜 공간을 더욱 확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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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리는 미적 원리를 안다는 것을


벤투리는 크로체의 말을 인용하여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동일성을 확증한 후 미술비평과 미학 사이에도 동일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아무리 보편타당성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미적 판단은 우리가 논리적 판단을 논증하듯 논증될 수는 없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벤투리는 미술품이 직관의 대상이 될 때만 미적 판단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판단이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직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직관이란 단순하지 않고 역사적 제 요소라고 하는 미술품의 모든 구성 요소를 그 자체 내에 함유하고 있으며, 이들 요소들의 체계화란 불가능하다.
벤투리는 말했다.
“미술적 직관들을 아는 것이 미술사이다.
그러나 역사적 요소들의 인식이 직관에 참여할 경우 과연 무엇이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미술사는 아닌 것이다.
그들 제 요소들을 검토하면서 누구나 직관으로부터 추출하기 때문이다. 미학사도 아니다.
이들 제 요소 가운데는 미적 요인과는 다른 실질적이고·이성적이며·도덕적인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42-3)
벤투리는 미적 원리를 안다는 것을 미적 원리를 자기 개인의 체험으로 입증하여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비평하는 것으로 보았다.
역사적 경험은 가정된 미적 원리에 의해 해명되며 변형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미적 원리를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미학사를 통해 미적 원리 안에서 이론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을 꼽았다.
미술비평이 아니면 미술을 이해할 다른 방법이 없음을 그는 역설한 것이다.
그에게 미술비평이란 미학과 미술, 미술의 이념과 미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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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서양화의 전래


16세기 우리나라는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또한 개혁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파士林派가 성장하여 훈구勳舊 세력과 대립했는데,
그들은 재지 중소지주 출신으로 공도公道를 내세워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 입장을 강화했다.
그들은 15세기 말부터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관직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다.
중종 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는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사림파가 훈구파와 대립하는 가운데 네 차례에 걸쳐 사화가 일어났다.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궁지에 몰린 중종반정 공신세력이 격렬하게 반격하여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서 거의 몰아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강화한 후 16세기 후반에는 훈구파를 대신해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정국을 장악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는데,
동인은 사림파의 이상을 준엄하게 내세우는 후배 사류들이 중심이 되었고 서인은 척신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선배 사류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때의 분열은 그 후 오랜 기간 조선 정치의 특색이 되는 붕당朋黨의 시초가 되었다.
대립의 과정에서 대개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문인이 동인으로 모이고 이이와 성혼의 문인은 서인으로 모이게 되어, 학맥이 세력을 결집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뒤 동인 내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하다가 주로 이황의 제자들로 구성된 남인과 조식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갈라지는 등 정국이 복잡하게 전개된 끝에 광해군 즉위 후에는 북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북인 정권은 기반이 약했으므로 무력을 앞세운 서인에 의해 권력을 빼앗겼는데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나타났다.
서인은 남인을 포섭하여 붕당정치의 질서를 회복했지만 그 후 서인과 남인은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등 갈등을 나타냈으며 17세기 후반까지 대체로 이런 질서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조선은 두 차례 전란을 겪었는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토요토미의 과대망상적 야욕과 대외무역의 이익을 늘리려는 다이묘大名들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일본의 침략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명이 손실되었고 농민들의 생활터전이 황폐해졌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이 사라졌다.
명나라 원군의 도움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큰 힘이 된 후 지배층의 사대의식은 더욱 커졌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급성장한 여진족은 1627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자신들을 형으로 섬기기를 강요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9년 후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 태종이 조선에 사대事大의 예를 요구하며 침략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전쟁에 패한 조선은 청나라를 임금으로 섬기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양화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로서 북경을 통해 천주상天主像과 함께 들어온 서양 문화를 소개한 서적들을 통해서였다.
1631년 인조 9년에 견명사遣明使 정두원이 북경에서 육약한陸若漢이란 이름의 서양인을 만나 그로부터 받은 서양의 화포, 망원경, 시계, 그 외에도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롤 포함하여 여러 권의 양서洋書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 직후인 1640년 청나라에 불모로 연행되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귀국하면서 북경의 서양인으로부터 서양 문화에 관한 다양한 서적과 함께 천주상, 지구의地球儀 등을 받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중국명 탕약망湯若望)과 교제하면서 천주교회에도 종종 간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원나라 때로 프란시스코Francisco회 선교사가 1294년 북경 근처에까지 와서 교회를 설립하고부터였다.
처음 기독교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당나라 때인 635년이었지만 경교景敎(Nestorinism)로서 정통 기독교가 아니었다.
경교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주교의 교의를 신봉하던 교단으로 431년 에페소Ephesus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경교는 역대 황제의 비호하에 150여 년 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소현세자가 방문했을 당시 천주교회는 서양식 건축물로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창문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서양화가 장식되어 빛에 의해 화려한 색상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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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넬로 벤투리는 『미술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에서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1964년 미술사나 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미술비평을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학문이나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적 만족을 위해서만 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미술비평이 예술가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술비평사 History of Art Criticism』에서 미술사, 미학, 미술비평 이 세 분야가 상호관련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투리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이 가진 이중적 긴급 상황을 베네데토 크로체가 모범적 태도로 분석했다면서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미술비평은 칸트가 공식화한 바 있는 것들과 유사한 이율배반에 말려든 듯이 보인다.
한 편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미술품은 그것이 생겨져서 나온 그 제 요소로 환원시키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도 없으며 판단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테제는,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미술품은 그것이 속한 역사적 복합체로부터 유리된 어떤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아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훌륭한 증명서가 첨부되게 되었다.
이 테제에 동일한 힘을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안티테제가 대립하게 된다.
즉 미술품은 자체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도 없고 판단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미술품은 미술품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분산되어 있는 미술품의 제 요소는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만 그때 새로운 미술품의 전체 혼이 될 새로운 형태 즉,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는 자는 예술가뿐이기 때문이다라는 증명서가 첨부된다.

상술한 이율배반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즉 미술품은 확실히 자체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가치 자체는 단순한 것도 추상적인 것도 산술적인 단위도 아니며, 오히려 복합적이요 구체적이며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의 유기체, 제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다.
미술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제 부분들로 된 전체를, 전체에 있어서의 제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전체를 제 부분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면(여기에 제1명제의 진리가 있다), 제 부분도 실제로 전체를 거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제2명제의 진리이다). 그 이율배반은 칸트적 유형으로 되어 있으며, 해결은 헤겔적 유형으로 되어 있다.41-1)
벤투리는 크로체의 해결책이 미적 비평에서 역사적 해석이 중요함을 입증하며, 더 나아가 진정한 역사적 해석과 진정한 미적 비평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철학사가 칭찬한 인간을 즐겁게 한 모든 환상적 관념을 제거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철학이론을 필요로 하듯 미술사 또한 어떤 그림이나 조상이 미술품인지 혹은 예술적 창조인지 혹은 합리적·경제적·도덕적 소산일 뿐인지를 구별해 줄 이론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비평가가 자신의 감정에만 복종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그는 미술 비평가는 미술품의 효과적 구성에 작용하는 모든 요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크로체의 말을 거듭 인용했다.
미적 비평이 역사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해도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미술비평가가 고려해야만 하는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예술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나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기후적·인종적 조건인가?
그의 역사적 계기를 이루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인가?
그의 사생활인가?
그의 병리학적이고 생리학적 체질인가?
그가 다른 예술가들과 갖고 있는 관계인가?
그의 종교관인가, 도덕관인가?
이들 범주 가운데 어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들 모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관례적으로 말하듯 이들 모든 범주가 절대 필요한 것이라든가, 어떤 것은 절대 필요하고, 나머지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에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그 대신 정확한 대답은 그들 모든 범주가 절대로 필요할 수도 있고 그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렇게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체관으로부터 단 한 점의 미술품에 대한 사고로 옮겨가자마자(비평가는 오직 단 한 점의 미술품만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해서 시리즈와 그룹들로 형성된 미술품군과 시리즈들은 단 한 개의 예가 생각된 다음에만 생각될 수 있다), 비평가가 현재 꼭 붙잡고 있어야만 하는 사실의 요소들은 바로 그가 조사하고 있는 미술품의 효과적 구성에 참여하는 제 요소이고, 그가 자신에게 제시한 비평 문제의 해결에 절대 필요한 요소들뿐이다.
이들 요소들이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는 어떤 사람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결정된 문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만 해결되는 것이다.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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