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서양화의 전래
16세기 우리나라는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또한 개혁이 모색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파士林派가 성장하여 훈구勳舊 세력과 대립했는데,
그들은 재지 중소지주 출신으로 공도公道를 내세워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 입장을 강화했다.
그들은 15세기 말부터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관직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다.
중종 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는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사림파가 훈구파와 대립하는 가운데 네 차례에 걸쳐 사화가 일어났다.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궁지에 몰린 중종반정 공신세력이 격렬하게 반격하여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서 거의 몰아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강화한 후 16세기 후반에는 훈구파를 대신해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정국을 장악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는데,
동인은 사림파의 이상을 준엄하게 내세우는 후배 사류들이 중심이 되었고 서인은 척신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선배 사류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때의 분열은 그 후 오랜 기간 조선 정치의 특색이 되는 붕당朋黨의 시초가 되었다.
대립의 과정에서 대개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문인이 동인으로 모이고 이이와 성혼의 문인은 서인으로 모이게 되어, 학맥이 세력을 결집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뒤 동인 내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하다가 주로 이황의 제자들로 구성된 남인과 조식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갈라지는 등 정국이 복잡하게 전개된 끝에 광해군 즉위 후에는 북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북인 정권은 기반이 약했으므로 무력을 앞세운 서인에 의해 권력을 빼앗겼는데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나타났다.
서인은 남인을 포섭하여 붕당정치의 질서를 회복했지만 그 후 서인과 남인은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등 갈등을 나타냈으며 17세기 후반까지 대체로 이런 질서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조선은 두 차례 전란을 겪었는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토요토미의 과대망상적 야욕과 대외무역의 이익을 늘리려는 다이묘大名들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일본의 침략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명이 손실되었고 농민들의 생활터전이 황폐해졌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이 사라졌다.
명나라 원군의 도움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큰 힘이 된 후 지배층의 사대의식은 더욱 커졌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급성장한 여진족은 1627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자신들을 형으로 섬기기를 강요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9년 후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만주를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 태종이 조선에 사대事大의 예를 요구하며 침략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전쟁에 패한 조선은 청나라를 임금으로 섬기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양화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로서 북경을 통해 천주상天主像과 함께 들어온 서양 문화를 소개한 서적들을 통해서였다.
1631년 인조 9년에 견명사遣明使 정두원이 북경에서 육약한陸若漢이란 이름의 서양인을 만나 그로부터 받은 서양의 화포, 망원경, 시계, 그 외에도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롤 포함하여 여러 권의 양서洋書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 직후인 1640년 청나라에 불모로 연행되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귀국하면서 북경의 서양인으로부터 서양 문화에 관한 다양한 서적과 함께 천주상, 지구의地球儀 등을 받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중국명 탕약망湯若望)과 교제하면서 천주교회에도 종종 간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이 중국에 소개된 것은 원나라 때로 프란시스코Francisco회 선교사가 1294년 북경 근처에까지 와서 교회를 설립하고부터였다.
처음 기독교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당나라 때인 635년이었지만 경교景敎(Nestorinism)로서 정통 기독교가 아니었다.
경교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주교의 교의를 신봉하던 교단으로 431년 에페소Ephesus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경교는 역대 황제의 비호하에 150여 년 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소현세자가 방문했을 당시 천주교회는 서양식 건축물로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창문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서양화가 장식되어 빛에 의해 화려한 색상이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