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킨에게 찬사를 보낸 사람도 많지만


러스킨은 『근대화가론』 제1권을 1843년에 익명으로 출간했고, 제3, 4권은 1856-57년에 출간했으며, 제5권은 1860년에 완성했다.
러스킨은 시각적 인상을 그와 반대되는 개념적 지식보다 우위에 놓고 훈련된 감수성에 바탕을 둔 관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돌 The Stones of Venice』(1851-53년에 초판 간행)에 적었다.44)
“미술은 … 오로지 선하고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가 지닌 인격·활동성·살아 있는 지각을 표현할 때만 가치가 있다.
… 미술은 제작법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또 과학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 담을 수 있다.
… 만약 미술이 이런 것들, 즉 위대한 인간 정신의 활기, 지각, 창의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하다.”
러스킨에게 찬사를 보낸 사람도 많지만 혹평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가 지나치게 도덕성을 강조한 때문이다.
그의 도덕주의에 식상한 로저 프라이Roger Fry의 혹평은 다음과 같다.45)
러스킨은 늙은 사기꾼이다. … 그는 너무나 고결한 체한다.
그에겐 모든 것이 반듯해야 하는데 심지어 공들여 꾸민 궁전까지 도덕적이어야 한다.
솔로몬 피시맨Solomon Fishman은 『미술의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Art』에서 러스킨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의 작품을 지나치게 정확하다고 경시하면서도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작품의 세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칭찬했다면서 그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을 대가가 아니라 초보자로 간주한 때문이라고 했다.
러스킨은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공격을 받을 때면 재현적 기술을 넘어선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늘 주장했는데 재현적 기술을 단지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 때문이다.
피시맨은 러스킨의 미학이론에서 핵심적 역설은 모방과 표현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을 비롯하여 상반된 성격의 요소들과 관련 있다고 지적한 후 이런 모순을 당대의 산물로 가볍게 취급했다.
“미술은 진지하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러스킨은 관람자에게 미술품에 즉각적·감각적·감정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했는데 직관에 의한 통찰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관되지 못한 비평을 두고 조안 이반스Joan Evans는 “러스킨은 기질, 취미, 관심, 열광, 감수성과 같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받아들여 실질적인 일반화 없이 과장된 웅변술로 보편적 의의가 있는 것인 양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그가 생각한 통일성이란 자신의 개성이 지닌 통일성에 지나지 않는다”46)고 혹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킨이 비평에 남긴 업적은 재현적 정확성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외관의 재현이 전적으로 표현적인 힘에 종속된 데서 미술의 참된 목적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피시맨은 고딕의 본질에 관한 글에서 그가 양식을 첨두형 아치, 교차궁륭 같은 외부구조의 특성들로 정의하지 않고 제작자의 심리적 속성으로 정의하려고 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러스킨에 의하면 고딕식 자연주의가 가진 장점은 사실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생명력과 에너지인데, 이 생명력과 에너지는 형식에서 단번에 지각될 수 있으며 감정적 상태를 직접 표현하는 성질을 갖는다.
그는 보들레르와 더불어 근대 미술비평의 창시자로 칭송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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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자는 기술에 탄복하지 않고 의도에 탄복한다

 

예술은 감관의 감각을 규칙으로 삼는 기술이라는 것이 칸트의 정의이다.
예술이 규칙 내에서의 기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약 2150년 동안
예술의 정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어떤 생산물이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규칙을 기초로 기술에 의해 가능하게 표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규칙은 이차적인 구성요소이다.
예를 들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곡을 한 군데도 틀림없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연주를 듣게 되면 탄복하게 된다.
하지만 연주자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창작 의도를 전하지 못하고 단지 기교로서 악보상의 규칙을 지켰다면 우리의 탄복은 그 사람의 기술에 대한 탄복이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탄복도 아니고 작품에 대한 연주자의 해석에 대한 탄복도 아니다.
그저 놀라움일 뿐일 것이다.

좀더 부언해서 예를 든다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전하기 위해서 운전하는 기술을 반드시 익혀야 만한다.
그러나 일단 기술을 익힌 후에는 그 기술이 안전운전을 보장한다 해도 운전자는 기술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기술을 의식하지 않고 다만 올바른 동기로 목적지를 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그곳으로 달릴 수 있어야 한다.
관람자들은 그 사람의 운전기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동기로 어디를 어떻게 갔느냐 하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규칙 이전에 의도가 나타나야만 하는데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규칙이 눈앞에 아른거려 (예술가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흔적을 보이는 일이 없이 그것이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예술이다."

미술품에 대한 이런 정의는 불변하는 것인양 서양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자연미를 운운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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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의 영향이 중국에서 나타날 무렵


서양화의 영향이 중국에서 나타날 무렵 소현세자는 입체감이 두드러져 살아 있는 인물로 착각할 만한 천주상을 갖고 귀국했는데,
그 천주상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궁중에서 불태워졌다.
소현세자가 천주상을 갖고 귀국하기 15년 전에 정두원은 견명사로 북경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이탈리아인 신부 로드리게즈Rodriguez로부터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 물건과 함께 『서양국풍속기』 등의 서적도 선물로 받아온 사실이 있다.
『서양국풍속기』에 그림이 삽입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서양화법의 사실적 묘사였을 것이다.
서양화는 이런 경로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실학자 이익(1681~1763)은 형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실재처럼 보이도록 사실주의롤 묘사한 서양화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의 『기하원본 幾何原本』을 읽고 『성호사설 星湖僿說』에서 원근법, 명암법 등 서양 화법론을 인용한 후 감탄했다.

근년에 연경사행燕京使行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서국화西國畵를 많이 가져왔는데,
그 전각과 궁전인물 및 기물의 둥글고 모난 형태들이 완연히 진찌 같아 그의(마테오 리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이익은 서양화의 실문 그대로의 진형眞形을 묘사하는 탁월한 기법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화상요돌 畵像拗突’이란 글에서 이탈리아인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기하원본 幾何原本』 서문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중국에도 일찍이 없던 화법이라고 적었다.


그림 그리는 화술은 눈으로 파악하는 데 있으므로 멀고 가까운 것과 바르고 기운 것과 높고 낮은 것의 차이를 사물의 상태를 보고 해야 제대로 그릴 수 있고, 둥글게 만들고 모나게 만드는 방법도 평면 위에다 계산을 해야 물도物度와 진형眞形을 멀리서 측정할 수 있다.
작은 것을 그릴 때는 눈을 크게 뜨고, 가까운 것을 그릴 때는 멀리서 본 것처럼 하며 둥근 것은 눈을 둥글게 돌려야 한다.
상은 오목하고 우뚝하게 입체적으로 그려야 하며 건물은 밝고 어둡게 명암이 있게 그려야 한다.


사물을 사실주의로 표현하는 것은 고려 중기에서 조선 말까지의 두드러진 화풍이었다.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자연의 본체이며 생명의 본질을 신神으로 보고 전이傳移하는 전신傳神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천연 그대로 모사된 그림에서 천지 조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양식을 입신入神과 득신得神, 신필神筆과 신품神品 등의 평어로 최고의 경지와 가치로 간주했다.
이런 전신은 소식蘇軾(1036~1101)의 『전신기 傳神記』를 통해 북송대에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명말의 동기창(1555~1636)은 『화지 畵旨』에서 전신을 기운생동하는 문인산수화를 구현하는 화결畵訣로 중시한다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신론은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초상화의 정예精藝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강백년(1603~81)이 “범회사귀전신 凡繪事貴傳神”이라고 했듯이 회화가 중시하는 창작론으로 확대되었고 문인화가이자 평론가 강세황(1713~91)은 진경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전신론은 조선 후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권헌(1713~70)은 『전신론』에서 자신의 초상화 제작을 거부하는 이유로 모습을 닮게 하면서 그 정신까지 나타낼 수 있는 경지의 작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하곤(1677~1724)은 시를 짓는 것과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같다면서 적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아야 비로소 어떤 사람을 묘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만약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닯지 않으면, 아무리 그림을 정교하게 잘 그렸다고 하더라도 신정과는 상관 없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이하곤은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전신첩 海嶽傳神帖>을 평했다.

무릇 그림에서 전신은 어려워 70~80%만 형을 닯게 나타내도 고수라 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들은 신의 전이도 이루어지고 형사도 모두 얻었다.


정선은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낸 후 진경산수화를 창출했다.
문인화의 특성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고려가 북송과의 긴밀한 문화교류에서 비롯한 것으로 고려의 문인들이 묵죽을 주제로 선호한 점에서 양자의 관계가 드러난다.
문동文同, 소동파 등의 북송 문인들이 묵죽을 즐겨 쳤고 이를 문인화의 한 전형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와 같이 고여의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과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같은 문집들에 문인들이 그린 묵죽에 대한 화찬과 화평이 들어 있다.
산수화에 있어 미법산수와 같은 남종화의 유입시기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남종화법이 시도된 것은 15세기 후반에 와서였고, 미법은 17세기 말부터 전개된 진경산수에 힘입어 소극적이나마 맥을 유지했다.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초기부터 미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정선은 양식의 해석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적인 필법이 매우 강해 미법이 거기에 묻히다시피 되었다.


사대부 출신의 정선은 17세기의 정신계를 지배한 성리학의 배경 속에서 조선이 곧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긍을 고차원적인 회화미로 표출해낸 진경산수를 완성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해 사상성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문인산수화의 고전적 준법인 미점과 피마준 등을 이용하는 한편, 북종화의 부벽준의 변형이라고 할 빗발준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18세기 화가들 중 남종화 발전에 가장 기여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다.
영·정조英·正祖간에 활동한 그는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예원의 총수’로 불리었다.
그는 문인화가 신위申緯(1769~1845)와 대표적 화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다.
신위는 강세황 만년의 제자이다.
신위는 자신이 강세황의 수제자라는 얘기도 들었으며, 더벅머리 어린 시절에 죽석竹石 그리는 법을 배웠다고 밝혔다.
신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에 “산수의 명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러 있지마는 사생寫生(화조·화훼)하는 사람은 전연 이름 있는 사람이 없다. … 400년간 강표암 상서 한 분만이 뛰어나게 그렸다”고 하여 강세황을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했다.
산수화,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를 위시하여 화훼, 정물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강세황은 서양 양식도 소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는 서화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감식·감상안을 가졌으며, 실로 수많은 서화평을 남김으로써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감식·감상에 높은 안목과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없었으므로 강세황은 감식 분야에서도 선구자였다.
남종화풍을 토대로 진경산수화를 그린 그는 단원 김홍도(1745~1806)와 김응환(1742~89)의 금강산도를 보고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신필이라면서 극찬했다.

혹자는 이르기를 “산천의 영靈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세밀한 데까지 다 그려내어 거의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라고 하나,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무릇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전신사조하기 위해 예를 갖추어 좋은 화가를 초빙할 때, 그가 그대로 모사하는 데 능하여 머리털 하나라도 닮지 않은 것이 없어야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산천의 영도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그 모습대로 그려낸 것을 싫어하지 않고 꼭 닮게 되어 전신이 이루어져야 만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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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는 매년 개최되는 살롱전을 통해


미술비평이 미술품 해석의 고유한 기능으로 출현한 것은 18세기 중엽이다.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 회원을 중심으로 루브르궁의 한 전시실에서 시작된 살롱전에 대한 디드로Denis Diderot(1713-84)의 비평에서 평론가의 역할이 인정되었다.
디드로는 매년 개최되는 살롱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그는 1759년부터 81년까지 살롱에 계속 참여했다.
리오넬로 벤투리는 디드로의 비평에서 미술비평의 새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주장했다.
디드로는 샤프츠베리의 『미와 덕론 Essai sur le merite et la vertu』을 1745년에 번역하면서 첨부한 자신의 글을 통해 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며, 후기 저작 『미의 속성』(1751), 『농아에 관한 편지』(1751), 『회화에 관한 소고』(1765), 『회화단상 Pensees detachees de la peinture』(1781) 등에서 백과사전 같은 예술론을 전개했다.
1751년에 발표한 「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본질미’에 관해 적었다.42)
미술품 속에서 우리는 본질적인 미를 지니게 된다.
본질적인 미는 그 기초를 질서에 두며, 인간적인 창조의 미는 그 기초를 예술가에게 달려 있는 질서라는 법칙의 자유로운 적용에 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질서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
끝으로 관찰로부터 일깨워지며 가장 통찰력 있는 예술가들에게서조차도 차이를 나타내는 체계적인 미는, 본질적인 미가 개입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는 아니다.
디드로에게 본질미와 더불어 ‘유기적 완전성’의 개념도 중요한데 그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43)
훌륭하게 구성된 회화는 하나의 유일한 시점으로부터 파악된 전체인 바, 그 전체 안에서 부분들은 모두 동일한 목표에 기여하며 그 상호 일치를 통해 동물 신체의 각 부위들처럼 현실적 전체를 구성한다.
디드로가 1775년에 발표한 『회화에 관한 에세이 Essay on Painting』는 유명한데 그의 유명한 경구 “자연은 결코 부정확하지 않다 Nature is never incorrect”가 적혀 있다.
보상케는 그를 가리켜서 낭만적 자연주의의 설교자면서 로맨스와 자연주의의 두 정반대 요소들이 난무한 시대를 두루 살면서 고전적이며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주의와는 대조가 되는 단일한 극단을 형성했음을 지적했다.43-1)
디드로의 전통을 이어받아 스탕달Stendhal(1783-1842), 보들레르C. Baudelaire(1821-67), 공쿠르 형제E. L. A. de Goncourt(1822-96), J. A. H. de Goncourt(1830-70), 영국의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이 비평활동을 활발히 했다.
러스킨의 『근대화가론 Modern Painters』은 중요한 그의 저작 가운데 하나이며 곰브리치E. H. Gombrich는 이 책에 관해 『미술과 환영 Art and Illusion』에 적었다.
플리니와 바자리에게서 시작된, 미술사를 시각적 진리를 향한 발전으로 해석해온 전통에 속하는 책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마지막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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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태어난 해는 0년일까?

 
마태는 예수가 태어난 시기를 헤롯대왕 재임시라고 했다.
헤롯이 기원전 4년에 사망했으니까 예수가 태어난 해는 최소한 기원전 4년이거나 그 이전이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 이전 Before Christ'이란 뜻의 B.C.와 '우리 주의 해에서 Anno Domini'란 뜻의 A.D.의 기준이 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제로zero 해는 그러니까 잘못 계산된 것이다.

예수보다 약 500년 후에 태어난 로마의 역사학자이자 사제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는 525년에 예수의 출생 연대를 로마 시 건국 후 753년 12월 25일로 계산하고 754년을 새로운 해, 즉 A.D. 1년으로 삼았다.
디오니시오스는 예수의 출생일을 별 근거 없이 12월 25일이라고 정했을 뿐 아니라 출생 연도에 관한 계산에 5년의 오차를 범했다.
그가 산술한 연대에 의하면 헤롯대왕은 749년에 사망했다.
헤롯대왕이 사망한 해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디오니시오스의 연대에 의하면 그것은 B.C. 4년에 해당한다.
만약 예수가 헤롯이 사망하기 수년 전에 태어났다면 예수의 출생은 그만큼 더 거슬러올라간다.
학자들은 안전한 방법으로 예수가 태어난 해를 B.C. 7년과 B.C. 4년 사이라고 추측한다.

누가는 복음서에 기록하기를,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재임할 때 유대인들에게 호적등록을 하라고 명령했고 다윗의 후손 요셉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약혼자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적었다.
그러나 헤롯대왕 생전에 구레뇨는 아직 시리아의 총독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B.C. 4년 이전에 유대에서 호적등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복음서에서 의심이 가는 기록은 또 있다.
동방에서 세 사람이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와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별이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었을까 하고 당시의 별자리를 천문학적으로 따져보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낙담하고 말 것이다.
천문학적으로 산술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예수가 누구이며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활동했을까에 관심을 돌리는 것이 그의 생애에 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은 나의 저서 <예수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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