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의 영향이 중국에서 나타날 무렵


서양화의 영향이 중국에서 나타날 무렵 소현세자는 입체감이 두드러져 살아 있는 인물로 착각할 만한 천주상을 갖고 귀국했는데,
그 천주상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궁중에서 불태워졌다.
소현세자가 천주상을 갖고 귀국하기 15년 전에 정두원은 견명사로 북경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이탈리아인 신부 로드리게즈Rodriguez로부터 천리경, 자명종 등 서양 물건과 함께 『서양국풍속기』 등의 서적도 선물로 받아온 사실이 있다.
『서양국풍속기』에 그림이 삽입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서양화법의 사실적 묘사였을 것이다.
서양화는 이런 경로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실학자 이익(1681~1763)은 형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실재처럼 보이도록 사실주의롤 묘사한 서양화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의 『기하원본 幾何原本』을 읽고 『성호사설 星湖僿說』에서 원근법, 명암법 등 서양 화법론을 인용한 후 감탄했다.

근년에 연경사행燕京使行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서국화西國畵를 많이 가져왔는데,
그 전각과 궁전인물 및 기물의 둥글고 모난 형태들이 완연히 진찌 같아 그의(마테오 리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이익은 서양화의 실문 그대로의 진형眞形을 묘사하는 탁월한 기법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 ‘화상요돌 畵像拗突’이란 글에서 이탈리아인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기하원본 幾何原本』 서문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중국에도 일찍이 없던 화법이라고 적었다.


그림 그리는 화술은 눈으로 파악하는 데 있으므로 멀고 가까운 것과 바르고 기운 것과 높고 낮은 것의 차이를 사물의 상태를 보고 해야 제대로 그릴 수 있고, 둥글게 만들고 모나게 만드는 방법도 평면 위에다 계산을 해야 물도物度와 진형眞形을 멀리서 측정할 수 있다.
작은 것을 그릴 때는 눈을 크게 뜨고, 가까운 것을 그릴 때는 멀리서 본 것처럼 하며 둥근 것은 눈을 둥글게 돌려야 한다.
상은 오목하고 우뚝하게 입체적으로 그려야 하며 건물은 밝고 어둡게 명암이 있게 그려야 한다.


사물을 사실주의로 표현하는 것은 고려 중기에서 조선 말까지의 두드러진 화풍이었다.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자연의 본체이며 생명의 본질을 신神으로 보고 전이傳移하는 전신傳神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천연 그대로 모사된 그림에서 천지 조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양식을 입신入神과 득신得神, 신필神筆과 신품神品 등의 평어로 최고의 경지와 가치로 간주했다.
이런 전신은 소식蘇軾(1036~1101)의 『전신기 傳神記』를 통해 북송대에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명말의 동기창(1555~1636)은 『화지 畵旨』에서 전신을 기운생동하는 문인산수화를 구현하는 화결畵訣로 중시한다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신론은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초상화의 정예精藝로 인식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강백년(1603~81)이 “범회사귀전신 凡繪事貴傳神”이라고 했듯이 회화가 중시하는 창작론으로 확대되었고 문인화가이자 평론가 강세황(1713~91)은 진경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전신론은 조선 후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권헌(1713~70)은 『전신론』에서 자신의 초상화 제작을 거부하는 이유로 모습을 닮게 하면서 그 정신까지 나타낼 수 있는 경지의 작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하곤(1677~1724)은 시를 짓는 것과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같다면서 적었다.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닮아야 비로소 어떤 사람을 묘사했다고 일컬을 수 있다.
만약 눈썹 하나 머리털 하나라도 닯지 않으면, 아무리 그림을 정교하게 잘 그렸다고 하더라도 신정과는 상관 없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이하곤은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전신첩 海嶽傳神帖>을 평했다.

무릇 그림에서 전신은 어려워 70~80%만 형을 닯게 나타내도 고수라 할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도들은 신의 전이도 이루어지고 형사도 모두 얻었다.


정선은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낸 후 진경산수화를 창출했다.
문인화의 특성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고려가 북송과의 긴밀한 문화교류에서 비롯한 것으로 고려의 문인들이 묵죽을 주제로 선호한 점에서 양자의 관계가 드러난다.
문동文同, 소동파 등의 북송 문인들이 묵죽을 즐겨 쳤고 이를 문인화의 한 전형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와 같이 고여의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과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같은 문집들에 문인들이 그린 묵죽에 대한 화찬과 화평이 들어 있다.
산수화에 있어 미법산수와 같은 남종화의 유입시기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남종화법이 시도된 것은 15세기 후반에 와서였고, 미법은 17세기 말부터 전개된 진경산수에 힘입어 소극적이나마 맥을 유지했다.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초기부터 미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정선은 양식의 해석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적인 필법이 매우 강해 미법이 거기에 묻히다시피 되었다.


사대부 출신의 정선은 17세기의 정신계를 지배한 성리학의 배경 속에서 조선이 곧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긍을 고차원적인 회화미로 표출해낸 진경산수를 완성시킴으로써 회화를 통해 사상성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법에 있어서도 문인산수화의 고전적 준법인 미점과 피마준 등을 이용하는 한편, 북종화의 부벽준의 변형이라고 할 빗발준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18세기 화가들 중 남종화 발전에 가장 기여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다.
영·정조英·正祖간에 활동한 그는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예원의 총수’로 불리었다.
그는 문인화가 신위申緯(1769~1845)와 대표적 화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다.
신위는 강세황 만년의 제자이다.
신위는 자신이 강세황의 수제자라는 얘기도 들었으며, 더벅머리 어린 시절에 죽석竹石 그리는 법을 배웠다고 밝혔다.
신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중에 “산수의 명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러 있지마는 사생寫生(화조·화훼)하는 사람은 전연 이름 있는 사람이 없다. … 400년간 강표암 상서 한 분만이 뛰어나게 그렸다”고 하여 강세황을 조선 사생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했다.
산수화,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를 위시하여 화훼, 정물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강세황은 서양 양식도 소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는 서화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감식·감상안을 가졌으며, 실로 수많은 서화평을 남김으로써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감식·감상에 높은 안목과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없었으므로 강세황은 감식 분야에서도 선구자였다.
남종화풍을 토대로 진경산수화를 그린 그는 단원 김홍도(1745~1806)와 김응환(1742~89)의 금강산도를 보고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신필이라면서 극찬했다.

혹자는 이르기를 “산천의 영靈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세밀한 데까지 다 그려내어 거의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라고 하나,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무릇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전신사조하기 위해 예를 갖추어 좋은 화가를 초빙할 때, 그가 그대로 모사하는 데 능하여 머리털 하나라도 닮지 않은 것이 없어야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산천의 영도 있다면 반드시 그들이 그 모습대로 그려낸 것을 싫어하지 않고 꼭 닮게 되어 전신이 이루어져야 만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