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과 서교를 수용하는 것을 혹세무민하는 일이라고


서학의 도입을 반대한 이항로를 선구자로 한 위정척사파는 서학을 사설邪設로 보고 서학과 서교를 수용하는 것을 혹세무민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은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략이라는 시대적 조건을 배경으로 발전된 사상이다.
위정척사 사상이란 정학正學(유교적 학통)을 지키고 사학邪學(양이적洋夷的 세계관)을 배척하는 사상이다.
위정척사파는 물밀듯이 침입해 오는 제국주의적 세력인 천주교, 서구적 이데올로기, 문물, 무력침략 등에 맞서 동양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서학의 도입을 통해 근대화를 꾀한 남인 신서파信西派는 같은 성호학파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안정복, 신후담, 이헌경은 천주교를 배격했고, 권철신, 이벽, 이가환, 이승훈, 적약종, 정약용 등은 수용하는 입장에 섰다.
서학을 받아들여 신앙운동을 전개한 수용론자들은 마테오 리치가 저서 『천주실의』에서 소개한 방법을 좇아 서학과 유학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천주실의』는 서양 선비와 중국 선비가 스콜라 철학과 전통 유교를 비교하여 양자 사이에 유학의 태극설을 제외하고는 본질에서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스콜라 철학의 천주 이념이 중국 고대의 천명天命, 상제上帝 사상과 통하는 것이란 점을 역설했다. 우리나라의 서학 수용은 이렇듯 한자로 된 서학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럽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역을 통해 유럽 사상을 접한 것이다.
서양으로부터 직접 서양 사상을 접한 것은 개항 이후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건립한 사숙私塾에서 문명개화의 사상을 접한 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으로 가서 수학한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을 통해서였다.
『서유견문』에서 유길준은 태서학술泰西學術을 소개하면서 “철학, 차학此學은 지혜를 애호하야 이치를 통하기 위함인 고로 기근본其根本의 심원함과 공용功用의 광박함이 계역界域을 입立하야 한정하기 불능하니 인人의 언행과 윤기倫紀며 백천사위百千事爲의 동지動止를 논정論定한 자라”라고 적었다.
유길준은 개화하는 자는 모든 일을 “궁구窮究하며 경영하야 일신하고 우일신又日新하기를 기약하느니” 참 교육이란 허실화된 유교에서 벗어나 실학에 힘쓰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종홍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서양철학 연구의 선각적 저작으로 이인재의 『철학고변』을 꼽았다.
1912년경 저술한 이 책에서 이인재는 탈레스로 시작하여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소개한 후 아테네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4원인설로 물질, 형상, 공인工人, 목적을 내세우는데,
그 목적을 의리義理로 보는가 이익利益으로 보는가에 다라서 동·서양의 학문적 차이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고대에 있어 동양철학이 그리스 철학보다 훌륭했다는 점을 밝히면서 동양에서 철학이 퇴보한 것이 안타깝다고 적었다.
이정직은 『겸씨 철학대략 兼氏(칸트) 哲學大略』을 통해 칸트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칸트야말로 동양 유학자의 화신이 서양에 가서 태어난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여 비교철학의 안목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원서를 직접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흡수한 서양철학을 중국인이 소개한 한역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필로소피아費祿蘇非亞(혹은 飛龍小飛阿)라는 말은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의 번역에 다라 철학哲學이라는 용어로 바뀌었다.
조요한은 『관심과 통찰』에서 동양에는 서양의 철학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도학道學, 이학理學이 있었다면서
니시 아마네가 필로소피아를 주렴계周濂溪의 『통서 通書』에 나오는 ‘성희천聖希天, 현희성賢希聖, 사희현士希賢’의 희현의 정신과 통한다고 생각하여 희현학希賢學으로 하다가,
그것이 너무 유교적 새채가 짙다고 생각하여 1872년에 철학이란 명칭으로 확정했다고 적었다.
장지연은 1909년 11월 24일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필로소피아를 궁리학窮理學으로 규정하면서 “무릇 철학이란 궁리의 학이니 각종 과학 공부의 소불급처所不及處를 연구하여 명천리 숙이심明天理淑人心하는 고등학문이라”고 적었고,
1914년 최남선도 『청춘』에서 철학을 궁리학이라 칭하면서 “만유萬有 전반의 궁리는 1, 인식의 형식, 2, 실재의 본질, 3, 행위의 문제로 요약함을 엇나니 궁리학의 세 부문, 곧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은 이 각개에 응합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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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가 주장한 재현의 정확성은


알베르티는 초상화에 반대되는 주제화로서의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종류의 그림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역사화가 가장 어려운 미술의 유형으로서 다른 분야의 숙달을 요하기 때문이며, 글로 씌어진 역사처럼 사람의 활동상을 생생히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적었다.
내가 그림을 보면서 역사책을 읽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글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붓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둘 다 화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2)
알베르티는 소묘가 올바르게 되었을 경우, 즉 육안으로 거의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지극히 섬세한 선들로 윤곽선을 그릴 경우 그것 하나만으로도 썩 잘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3)고 했다.
도구를 사용해서라도 기하적으로 완벽한 소묘를 할 것을 화가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화가의 임무는 선과 색채로서 주어진 패널 위나 벽 위에다 사물의 가시적인 표면을 그리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정한 위치에서 보면 그것이 부조처럼 튀어나와 마치 사물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이라면서 회화를 철저한 자연주의에 입각한 시각으로 정의했다.
그는 심지어 단면도의 구조를 옮길 수 있는 하나의 장치까지 발명했는데, 그것은 화가와 그려질 대상 사이에 쳐 놓은 망net으로, 화가는 그 망을 통해 나타나는 대상의 윤곽선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눈으로 이어지는 이런 피라미드의 착안은 선원근법의 기초로서 알베르티식 망만이 선원근법에 따라 대상의 보임새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방법이다.
알베르티가 주장한 재현의 정확성은 르네상스 미술의 근간이 되었으며 이런 점이 음악에도 적용되었다.
음악이론가들은 음악을 인본주의적 훈련으로 보고 합창에서 감성적·윤리적 효과를 강력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보았는데 가사의 의미를 강렬하게 나타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재현의 정확성은 미술이 모방이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 데서 효과적인 기술에 관한 추론이다.
시에서도 이런 점이 분명했으며, 르네상스 시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시인들은 시가 인간 행위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따랐다.
하지만 모방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서 시가 드라마와 같은 일관성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시인이 거짓말로 독자들을 불멸로 인도했을 때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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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시작

  

낭만주의Romantik라는 말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용된 말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 국경에 있는 로마냐Romagna의 언어, 즉 라틴어의 방언 로망스어로 씌어진 이야기라는 의미이면서 공상적 혹은 경이적이란 뜻도 내포하게 되었다.
로마냐는 로마Roma에서 온 말이므로 굳이 말하면 로마에서 파생된 말이라 하겠다.
이 낭만적romantic이란 말의 근대적 기원은 17세기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통속어로 전래된 중세의 목인소설이나 기사에 관한 이야기
예를 들면 아더 왕King Arthur이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고 믿어지는 성배를 찾으려 한 원탁기사의 이야기와 같은 기사도정신에 입각한 중세 모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이를 전형으로 근대에 창작된 괴담에서 고딕, 낭만류의 황당무계한 바보 같음을 야유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로망스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들이 라틴어가 아닌 낭만적 언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기사도정신에 입각한 이야기chivalric를 프랑스어로 로망romaunt이라고 하는데
전기적인 이야기란 뜻으로 이것이 로맨스romance가 되었다.
중세에 대한 매료는 취미의 변화를 나타내는 증거로 충분했다.
프랑스의 기념물 뮤지엄은 1795년 알렉상드르 르누아르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는 수집된 중세 유적들을 연대순으로 정돈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이 뮤지엄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들로 하여금 중세의 정신과 풍습을 되찾게 만들었다.
특히 나폴레옹 황제의 아내 조제핀이 이 뮤지엄을 좋아했다.
뮤지엄은 왕정복고하에서 폐쇄되었지만 중세의 영향은 신고딕식의 교회로 나타났으며 가구들이 대성당 양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졌다.
낭만주의Romanticism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데
소수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낭만적 운동의 일환으로 자각했기 때문에 이즘ism이란 말을 붙여서 낭만주의라고 말하지만 이 운동에 속한 예술가들에게 목적에 대한 공감할 만한 의도적 추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낭만주의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방식"에 있었으므로 감상적 이상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잰슨은 저서 <예술의 기본역사 A Basic History of Art>에서 낭만주의가 도래한 동기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꼽으며 계몽주의는 이성을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에 반하는,
즉 감정주의의 물결이 일게 했으며 이런 물결 혹은 운동이 낭만주의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계몽주의가 이성과 감정 모두의 자유를 구가하면서 이성과 고전 규범에 근거해서는 신고전주의가 출현했고 감정과 어떤 규범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정신에 근거해서는 낭만주의가 꽃을 피웠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서로 상반되는 미학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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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자식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이번 자식의 이름은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입니다.
두 사람 세 사람의 예술가를 묶어서 책을 펴내고 있는데 이번에는 신고전주의의 대가 다비드와 황제 나폴레옹으로 썼습니다.
'미술과 정치'에 관심이 생겨 두 사람을 묶은 것이지요.

예술과 정치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쳤을 때 가공할 만한 작품이 나옵니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무대로 합니다.
에필로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글을 따로 삽입했는데 혁명은 처음부터 고상한 목적으로 고상한 방법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훗날 학자들의 작품이지요.
본래의 실상은 각각의 이익집단의 첨예한 대립으로 출발하고 명분을 루소나 볼테르에서 찾은 것입니다.

책을 펴내는 걸 자식이 태어나는 것에 비유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밀월기간이 있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밤을 새우며 사랑을 속삭이는 기간 말입니다.
처음에 책 제목을 나름대로 정할 때는 나 자신 약간 흥분하게 됩니다.
다비드와 나폴레옹을 묶는 것이 얼마나 탁월한 아이디어인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자부심이 생겨 처음 얼마 동안은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자료를 모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밀월의 기간처럼 재미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임신한 여인이 입덧을 하고 몸이 불편해지지 않습니까?
엄청난 일을 저질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몸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만삭이 될수록 피곤해집니다.
책을 완결져야 할 터인데 머리가 복잡해지고 체력이 딸리는 걸 느낌니다.

임산부는 마지막에 해산의 고통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거의 500점에 이르는 도판을 제자리에 넣어 편집을 완성시키는 일이 해산의 수고에 비할 만합니다.
528페이지 분량의 편집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인쇄와 제본을 마치고 서점에 책이 진열되고나면 긴장이 풀려 몸이 노곤해집니다.
오늘이 바로 노곤한 몸에 종일 피로하고 누워서 이것저것 먹으면서 TV로 바둑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자부심을 갖게 되는 건 우리나라에 아직 다비드에 관한 책이 없습니다.
내가 폴록과 뒤샹을 쓸 때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런 대가들에 관한 책이 없지요.
미술사의 공백을 내가 메꾸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곤 합니다.

책을 쓰는 것이 내게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들여 쓰게 되고 몸이 늘어지는 일인데도 얼마 전에 <레오나르도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이란 제목으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어 달은 밀월기간이라서 정신없이 자료를 모으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얼마 전부터는 입덧하는 기간이라 조금씩 지치기 시작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대단한 과학자입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기 한 세기 전에 이미 이런 원리를 알아 달을 확대해서 관찰했고 그 밖에도 그의 과학적 발명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의 과학적 공로에 관해 쓰다보니 벌써 책 한 권을 다쓰고 두 권째 쓰고 있습니다.
아직 머리가 쌩쌩 돌아갈 때 열심히 책을 써야 한다고 나름대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집필에 열정을 태우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번 자식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런지 궁금합니다.
다행히도 교보문고에서 다량을 매절로 구입하여 어재 출발에 길조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두고봐야겠지요.
앞서 쓴 책 두 권은 재판에 들어갈 예정이니 독자들의 관심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사실 독자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책을 쓰다면 이는 노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난 처음부터 많은 독자를 기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책이 지식이 되는 그런 독자를 원합니다.
소수라고 하더라도 그런 독자를 위해 앞으로도 책을 쓸 것입니다.
작금 지식에 등한히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 착잡합니다.
지식이야말로 힘입니다.
지식은 자신감을 줍니다.
자신감이 생겨야 무슨 일이라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열한 번재 자식을 출산하고 몸을 풀면서 그동안 입덧한 고생을 이렇게 넉두리로 털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뿌농공주님,
전에 상품으로 책을 주겠다고 한 약속 잊지 않았습니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는 이 책 때문에 조금 후에야 나올 예정입니다.
해서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 사인하여 보낼려고 포장해놓았습니다.
공주님 사는 곳이 인천시이더군요.
내일 사람시켜 발송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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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공식 명칭이 없었으므로


박물관의 공식 명칭이 없었으므로 당시 공식 기록인 『승정원일기』나 『순종실록』에는 단순히 박물관으로만 지칭되었다.
박물관의 설립을 보도한 1908년 1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제실박물관으로 적혀 있지만 이는 공식명칭이 아니라 황싱체제하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일 뿐이었다.
제실박물관이란 명칭은 일본의 것을 차용한 것으로 일본 박물관의 경우 관리 부서가 변경될 때마다 문부성 박물관, 내무성 박물관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1889년에는 일본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뒷받침하는 기관으로서 정체성을 내세우기 위해 제국박물관으로 개칭했다.
이어 1900년에는 그 중심을 청황가로 옮겨 명칭을 제실박물관이라 했다.
일제 시기의 신문과 잡지에서는 창덕궁 박물관, 창경궁 박물관 등으로 불렀으며, 창경궁이 1911년에 창경원으로 격하된 뒤에 창경원 박물관으로 지칭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모두 박물관의 위치를 지적하여 앞에 붙인 것에 불과했다.
일제 시기에 가장 널리 불리워진 것은 이왕가 박물관이었다.
이왕가 박물관이란 명칭은 1912년에 발간된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서부터 공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8월가지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제국이었지만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일본 황실 안에 조선의 왕계를 편입하여 일본 황실보다 격이 낮은 여러 왕가들 중 하나로 붙인 칭호가 이왕가였다.
한·일 합병을 알리는 일본 천황의 조서를 실은 『순종 실록』 부록의 1910년 8월 29일자 기사에 “전 한국 황제를 책봉하여 왕으로 하고 창덕궁 이왕이라 칭하니”라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이왕가 박물관이란 명칭은 일본 통치자의 입장에서 부른 것이었다.
왕실은 일본 황실의 아래격인 왕가의 하나로 편이되었으므로 이왕가는 총독부 산하가 아니라 일본 궁내성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왕직이 형식상으로는 일본 궁내성 관할 하에 있었지만 이왕직 장관 등 이왕직 직원의 임명과 징계에 관한 건이 조선 총독의 관할 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이왕직은 실질적으로는 총독부의 통제를 받았다.
이왕가 박물관은 궁내부 소속 신설된 어원사무국 산하에 속해 있었다.
박물관 사무책임자는 박물관부의 부장인 스에마쓰 구마히코였다.
궁내부는 본래 대한제국기에 설치된 황실사무국으로 황실뿐 아니라 여러 사업을 관장하는 거대한 기관이었지만 통감정치를 받으면서 직제가 줄어들어 왕궁의 사림과 능원 관리 등의 사무를 맡아보는 부서로 격하되었다.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에 의하면 1912년 12월 현재 소장품은 12,230점으로 불상, 금속공예, 석조공예, 목조, 칠기, 자수 및 직물, 도기, 기와, 유리, 회화 등으로 분류되었다.
상·하 두 권으로 된 이 사진첩에는 총 677점의 유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요한 소장품은 고려 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류와 삼국시대 이래의 불상과 금속공예품, 조선시대 회화류였다.
수집은 구입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고미야의 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08년 1월부터 먼저 진열품의 수집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때 마침 경성에 고려시대의 분묘에서 나온 찬연한 고려 문화를 볼 수 있는 다수의 도자기, 금속품, 옥석류가 많이 매매되고 있어서, 그것을 호기로서 그러한 출토품과 함께 삼국시대, 신라통일시대의 작품과 관련있는 중요한 조상의 구입에 노력하고, 혹은 조선시대의 회화, 공예품 등도 수집했다.
개성 근처의 고려 고분을 도굴해서 나온 고려 도자가 매매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이 고려 도자를 수집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별다른 수집품이 없던 이왕가 박물관은 4년 동안 무려 12,000점 이상의 소장품을 구입을 통해 확보했다.
박물관 주임 스에마쓰 구마히코는 1914년 4~6월에 전남, 충남, 경북 지방을 다니며 고려 유적을 조사했으며 5월에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의 고려 도요지에서 고려시대에 폐기된 불완전한 도자기 및 파편 등의 물건을 수집했다.
세관 사무관 출신인 그는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서무 회계 및 촉탁을 겸임하여 일했고 골동 취미로 고려 도자에 관심이 많았다.
박물관을 포함하여 창경원은 1926년까지는 매주 목요일에 순종의 산책 겸 관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휴관했다.
그러나 창경원에는 이미 벚나무를 수백 그루 심어 해마다 봄이면 벚꽃놀이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으며 1924년부터는 야간에도 개장했다.
1926년 4월에 순종이 서거하자 이듬해 7월 1일부터 창경원 전체를 연말연시 6일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개방했다.
이왕가 박물관은 1938년에 덕수궁으로 이전했다.
박물관 소장품은 석조전의 서쪽에 새로 지은 신관에 전시되었다.
덕수궁의 석조전에는 1933년부터 일본 근대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덕수궁은 여러 전각들이 훼철되고 변형되어 1933년에 공원으로 개방되었고, 이 때 덕수궁에서 가장 큰 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개조하여 미술 전시를 시작했으며 여기에 전시된 것이 일본 근대 미술품이었다.
이왕가 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옮겨지면서 두 전시관이 합쳐져 이왕가 미술관이 되었다.
이왕가 미술관은 해방 뒤 덕수궁 미술관으로 유지되다가 1969년에 국립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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