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질서를 추구하는 이슬람주의

 

 

 

이슬람주의는 폭력이 아니라 정치질서를 둘러싼 사상이라는 점을 다시금 주지시키고 싶다. 폭력은 지하드운동의 부수적 측면에 불과하다. 이슬람주의는 종교를 이야기하지만 그 사상은 정치적 지배 주변을 맴돈다. 신정질서의 근간이 바로 이슬람주의의 기본 특징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적 이슬람교를 부흥과 결부하는 데는 회의적이다. 이슬람교가 예로부터 정치의 적법성을 결정・주장하는 수단이 되어 왔더라도 이슬람주의는 이 영역에서 새로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가 세상을 재편하려는 정치적 노력의 일환이라면 이를 종교적 각성운동으로 간주하는 건 잘못이다. “신성한 종교의 귀환”— 일반적인 세속화를 지적한 막스 베버의 가설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학자 대니얼벨이 지어낸 개념— 으로 알려진 범세계적 현상은 대개 정치색을 띠고 있다. 종교의 정치화는 출처가 분명치 않으나 그 기원을 근대화와 맞닥뜨릴 때 빚어진 위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럽과 이슬람주의의 전체주의가 각각 위기에서 태동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 둘을 대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이슬람주의의 경우, 막강한 서방세계에 비해 개발이 부진했고, 근대화와 진보주의가 이슬람세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한 후 세속 지도자들의 위신이 흔들린 탓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주의는 문화적 근대화 개념과 가치관을 강력히 거부하며 기술적인 의미에서 근대화의 자질을 나치주의 및 공산주의와 공유했다. 미국의 사학자 제프리 허프는 나치가 근대 기술은 수용한 반면, 문화적 근대화는 거부한 점을 지적하기 위해 “반동적 모더니즘reactionary modernism” 이라는 용어를 지어냈다. 비교 정도는 괜찮지만 이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은 세계적인 선진 산업국가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현재 이슬람세계는( 이를테면 문화연구 프로젝트가) “개발도상 문화” 에 기초한 사회들로 규정한 국가들로 이뤄져 있다.
이슬람주의의 탈을 쓴 이슬람교의 귀환은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권리가 가미된 종교의 귀환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슬람교 신앙은 쇠퇴한 적이 없으나, 1924년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고 무슬림세계 전역에 세속 민족국가가 부상한 이후로는 정치적 타당성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정치적 이슬람교는 종교적・세속적 실험에 연이어 실패한 후 대안으로 이슬람교가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이슬람교는 근대화를 수용하기는커녕 그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그럼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은 전통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근대식 가치관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강력히 거부했지만 과학기술의 근대식 수단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면성이 바로 원리주의의 주요 특징이다.

“신성한 종교의 귀환” 은 세 가지 쟁점과 관계가 깊은데, 이를 이슬람교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교는 국가질서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종교적 제도다. 이슬람주의의 정교일치(딘와다울라) 사상은 이슬람교 자체라기보다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주요 경계를 표시하는 특징임이 분명해졌다. 세계에 확산된 근대화에 대응하기 위해 창출된 전통은 이슬람세계 전역에 만연한 “근대 이슬람교의 위기” 로 태동하게 된 것이다.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위기를 맞지 않았다면 국가사회주의도 없었을 것이고, 이슬람세계에 위기가 없었다면 이슬람주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종교적 원리주의로서, “다중적 근대성” 을 운운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화의 또 다른 양상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대표하는 조직(8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만큼이나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민주적 시민 사회의 허울을 두른다고 해서 전체주의 조직을 민주적인 것으로 바꿀 수는 없다.
셋째, 샤리아의 맥락에서 성취된 듯싶은, 민주정치의 이슬람주의화는 전체주의 질서를 위장한 것일 뿐이다. 이슬람주의의 신정질서 개념은 국민 주권뿐 아니라 정치적 제삼자의 입지를 인정하는 민주적 다원주의도 거부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진정한 신자와 불신자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사고한다.
나는 이 책 후반에서 이슬람주의가 “열린 이슬람교” 를 일컫는 진보주의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할 것이다. 민주적 다원주의를 포용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를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종교적 원리주의” 라는 용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나 나는 이 책에서 원리주의 개념을 분석 도구로 계속 활용할 것이다. 물론 그 용어가 이슬람혐오증을 일컫는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원리주의 프로젝트는 이 현상이 전 지역에 출현한 경위를 중립적으로 연구하는 데 토대를 둔다.
원리주의 프로젝트는 종교를 신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체로 간주하는 방법론적 접근법을 구사했다. 종교를 사회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에밀 뒤르켐의 종교・사회학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의 정치화가 사회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이는 종교적 원리주의 이데올로기가 창출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열성파나 정통파, 혹은 극단주의적 신념을 동의어로 쓰지 않고 그렇게 정의한다면 “원리주의” 라는 용어가 유용할 뿐 아니라 폭넓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원리주의가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고,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같이 경전을 둔 종교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한다. 모든 유일신 사상에는 종교적 정통성과 종교적 원리주의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종교적 정통성이 순수 전통주의라면, 후자는 구조와 수단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관에 기초를 둔, 범세계적이고도 보편적인 근대화의 맥락에서 비롯된 근대적인 현상이다. 원리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듯, 이슬람주의자들도 근대화를 배격하면서도 근대화에 젖어 있다. 즉 그들이 주장하는 이슬람교의 각성al-sahwa al-Islamiyya(알사화 알이슬라미야)은 이슬람식 근대화의 꿈을 일컫는다.
또한 “이슬람교의 각성” 은 꾸며낸 전통에 의존하기도 한다. 19~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세계에서는 범이슬람주의 운동가 자말 알딘 알 아프가니에게서 영감을 얻은 문화의 부흥주의가 존재했다. 부흥주의자인 알 아프가니는 이슬람주의자가 아닌 데다, 성스러움에 기초한 정치질서에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반식민지 운동의 일환으로 “제국주의에 대응” 하기 위해 이슬람교를 재건하고 싶어 했을 뿐이다. 오늘날, 하산 알반나의 손자인 타리크 라마단은 알아프가니와 그의 조부22를 잇는 영속성을 주장하면서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종교와 이슬람교의 부흥주의를 혼동하고 말았다. 이슬람주의자인 알반나는 부흥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둘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라마단의 노력은 잘못된 것이므로 그릇된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이슬람주의는 종교적 부흥주의가 아니다. 사실, 이슬람주의가 종교에 근간을 둔 정치질서를 추구한다고는 하나 정교일치에서 유추한 것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이슬람 경전에는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 “국가(다울라)” 는 코란이나 무함마드의 언행이 기록된 정경인 하디트hadith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신이슬람 질서” 와 “이슬람 정부hukuma Islamiyya(후쿠마 이슬라미야)” 도 마찬가지다. 이는 이슬람 전통이나 경전에 쓰인 평범한 용어가 아니다. 이슬람주의의 추종자들이 지어낸 용어가 전통의 부흥사상과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데서, 부흥주의자인 알아프가니와 이슬람주의자인 알반나의 주요 경계가 그어진다.
이슬람주의자가 주창하는 “이슬람국가” 에 본질을 부여하는 개념이 바로 샤리아의 시행tatbiq al-shari'a(타트비크 알샤리아)인데, 샤리아를 극단적으로 재해석하면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 샤리아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23 샤리아는 코란 본문에 단 한 차례 기록되었으며, 사전적인 의미는 “물가로 이어지는 길a path leading to water” 이란 뜻으로 바른 길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른 길” 이란 의례 및 도덕적으로 바른 행위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이슬람주의식 샤리아로 다스리자는 것은 정치적 요구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코란에는 없으나 총체적인 법률 개념을 위해 고안된 샤리아 전통을 꾸며냈으니, 이는 종교적 르네상스도, 고전적 샤리아의 부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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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의 지혜

 

 

 

어느 날, 선禪을 공부하던 어린 제자가 노선사에게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었다.

"난 몰라” 하고 노선사가 말했다.
제자가 놀라서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선사가 아니십니까!” 하고 외쳤다. 노선사가 말했다.
“그래, 나는 선사지만 망자가 아니란 말이다” .
불교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성격에 따라(특히, 선불교는 그런 성격이 더 강하다) 이 노선사는 제자에게 진실을 말했다.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만 제자의 질문은 여전히 중요했다. 그 해답을 안다면, 죽음뿐만 아니라 삶도 두렵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불교의 가장 큰 선물은 두려움이 없음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떤 일을 겪을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하거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해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서 거부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왜곡되고,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긴장과 불안이 생겨날 것이다인간으로서 우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우리는 삶을 인식하는 생명체인 동시에 삶의 한계를 인식하는 생명체이기도 하다. 무한성에 대해 숙고하고 영원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이 유한하고 일시적임을 알고 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의식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무상함으로 생겨나는 질문에 대해 기꺼이 숙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며, 그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나가거나 겉으로만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행동한다. 죽음을 부정한다면 부, 특권, 즐거움, 권력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죽을 때 “넌 가지고 갈 수는 없어”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죽어도 반드시 가져갈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부, 특권, 즐거움, 권력 따위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믿음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충실한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과 그 한계를 인정하기 싫을 때 흔히 사용하는 전략이다. 사람들은 부유해짐으로써 특별함을 느끼려고 한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이런 자만심에 빠져 있다. 흔히 다른 사람들은 머지않아 늙고, 병들고, 죽게 될지 모르지만,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가 정말 그런 불행에서 예외라면 우리가 그런 최초의 인류일 것이다. 현재 살아 있고 활력이 넘치는데,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 꾸며낸 이야기나 허튼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란 점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다. 죽음과 세금 외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이 말에서도 죽음을 궁극적인 문제로 다루기보다 세금처럼 단순한 골칫거리로 과소평가함을 볼 수 있다.
특별함이 죽음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첫 번째 왜곡이라면, 이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번째 왜곡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왜곡을 이용한다. 유명 인사에 대한 환상은 이런 속임수에 의해 나타난다. 우리는 유명 인사들의 삶에 환상을 품고 있어서 이들을 마치 올림포스의 신이나 여신처럼 여기고 이들의 행운과 불행, 음주운전과 불륜 같은 사건을 쫓다 보면 우리도 불멸의 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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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나를 드러내지 마라, 독창성이 중요하다

나를 드러내지 마라
철학 글쓰기를 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자전적 고백을 시도하는 것이다. 자전적 고백은 흔히 “내 개인적 의견은~”이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같은 표현을 동반한다. 이는 주관적인 단언에 불과하다. 이렇게 개인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합리적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것과 무관한 불필요한 표현이다. 굳이 “나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모든 기존 신념을 의심한다고 믿는다”라는 말로 에세이의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나는 ~라고 믿는다”라는 표현은 상대의 반격을 유발하는 쓸데없는 표현이다. 결론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글을 쓴 나의 결론이다. “내 견해로는”이나 “나는 ~라고 강력하게 믿는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논증과정이 훼손될 뿐 아니라 결론이 합리적 분석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 믿음의 고백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 철학 글쓰기에서 피해야 할 표현들
“내 견해로는” “~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늘 ~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것 같다.” “어느 정도 옳은지 모르지만, 내 개인적 의견으로는” “~라고 굳게 믿는다.” “내 소견으로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관점에서는”

 

독창성이 중요하다
철학공부를 막 시작한 학생들은 독창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방법을 잘 모른다. 물론 무작정 타인의 저작을 자기 것으로 포장하려고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독창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저자의 지식을 훔치는 행위는 표절이다. 여러 사람들의 지식을 훔치는 행위는 연구조사다.
✚ 윌슨 마이즈너

반드시 비트겐슈타인이나 콰인 같은 훌륭한 철학자 수준의 사고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 에세이를 작성할 때 굳이 깜짝 놀랄 만한 이론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익숙한 주장을 제시하는 과정에서도 독창성은 발휘될 수 있다. 독창성은 다양한 출처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공부하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철학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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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陰陽五行의 관계

 

 

음양의 관계

음양호근(陰陽互根)이란 자연계의 일체 사물 현상 속에서 음양이 서로 뿌리가 되고 의존하는 관계를 말한다. 음은 양에 의존하여 생존하고 양은 음에 의존하여 생존한다. 음의 뿌리는 양이고 양의 뿌리는 음이다. 어느 한 족도 다른 쪽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음양호동(陰陽互動)이란 음양이 상호 자생하고 촉동하며 조장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老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했다.

음양소식(陰陽消息)이란 음양 양쪽의 수량과 비율이 소장(消長)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역학(易學)의 십이소식괘(十二消息卦)는 양이 늘어나면 음이 줄고 음이 늘어나면 양이 주는 가정을 형상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음양소장(陰陽消長)의 기본 원칙이다.

음양교감(陰陽交感)이란 음과 양 사이의 상호감응과 상호교합을 말한다.

음양호제(陰陽互制)란 음과 양 사이의 상호 제약을 말한다. 음양은 기능이 상반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양자는 상호 극제(克制)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과 인체생명기능의 동태평형을 유지한다.

음양쟁요(陰陽爭擾)란 음양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음양전화(陰陽轉化)란 일정한 조건 아래서 음양 양쪽이 그 반대방향으로 전화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음은 전화하여 양이 되고 양은 전화하여 음이 된다.

음양승복(陰陽勝復)이란 음이냐 양 어느 한 쪽이 항성(亢盛)하면 다른 한 쪽이 보복을 당하는 현상을 말한다. 음이 항성하면 양이 쇠해지고, 양이 성하면 음이 쇠해진다. 이는 음양이 서로 제약한 결과다. 어느 한 쪽이 지나치게 항성하면, 다른 한 쪽의 이상 반응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음이 이기면 양이 보복하고 양이 이기면 음이 보복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오행의 관계

오행 사이의 관계로는 생극(生克), 승모(乘侮), 승복(勝復), 제화(制化) 등이 있다.

오행상생(五行相生)이란 오행 간에 서로 자생(資生)하고 촉진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 규율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이다.

오행상극(五行相克)을 오행상승(五行相勝)이라고도 하는데, 오행 사이의 상호제약과 극승(克勝)을 말한다. 그 규율은 목극토木克土, 토극수土克水,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이다.

오행상승(五行相乘)을 오행항승(五行亢乘)이라고도 하는데, 오행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는 것이 지나쳐 특이한 상극相克 반응을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승乘에는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능멸하거나 허한 틈을 타고 침습한다는 뜻이 있다. 오행상승은 두 방면으로 표현되는데, 오행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성하여 다른 하나를 제압하는 것이 지나쳐 그를 허약하게 하고 이로 인해 오행 간의 생극제화生克制化에 이상이 초래되는 것이다. 다음은 오행 중 어느 하나가 허약하여 이 때문에 그것을 이기는 다른 하나가 상대적으로 증강되어 허약한 것이 더욱 쇠약해지는 것이다.

오행상모(五行相侮)를 오행반모(五行反侮) 또는 반극(反克)이라고도 한다. 이는 오행 중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성하여 원래 자신을 제압하던 것을 도리어 제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두 방면으로 나타나는데, 어느 하나가 강성하여 자신을 제압하던 것을 도리어 제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하나가 허약하여 자신이 제압하던 것에 도리어 제압당하는 것이다.

오행승모(五行乘侮)란 오행 간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생극(生克) 관계를 말한다. 상승相乘과 상모相侮는 모두 비정상적인 상극 현상이다. 둘은 다르면서도 서로 연계되어 있다. 서로 다른 점은, 상승相乘은 오행의 상극 순서에 따라 지나친 극제克制 현상을 일으키며, 상모相侮는 오행의 상극 순서를 거슬러서 극제克制 현상을 일으킨다. 둘 사이의 연계는 상승相乘이 발생할 때에 또한 동시에 상모相侮가 발생할 수 있으며, 상모相侮 현상이 발생할 때에 또한 동시에 상승相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오행승복(五行勝復)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오행 간의 상승상제相勝相制, 극제복구克制復救, 선승후복先勝後復의 관계를 말한다. 『황제내경黃帝內徑』에서는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으로 인해 생기는 과도하게 극제克制하는 기운을 승기(勝氣)라고 한다. 승기가 생김과 동시에 일종의 상반되는 기운을 필연적으로 불러들이는데, 이것이 승기를 누른다. 이런 기운을 일러 복기復氣라고 한다.

오행제화(五行制化)에 두 가지 함의가 있는데, 첫째,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오행 간의 상생상극相生相克 관계이고, 둘째, 오행 간의 항해승제亢害承制 관계다. 오행의 항성함이 지나쳐 해가 되면 반드시 이를 제어하여 절제하도록 해야 사물의 정상적인 생성과 발전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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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간의 상태가 나타나는 구멍

 

 

한의학에서는 눈을 “간의 상태가 나타나는 구멍”으로 봅니다. 간의 건강 상태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황달 현상은 주로 간이 나빠졌을 때에 나타나는데, 이때 눈을 보면 노랗게 변해 있습니다. 간의 기능이 저하되면 당연히 시력이 나빠집니다. 한의학에서는 50세를 전후로 해서 간 기능이 떨어지고 담즙이 줄어들면서 시력이 나빠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찍 시력이 나빠진다면 간의 기능이 일찍 저하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간이 허해지면 공연히 눈앞에 꽃무늬 같은 것이 어릿어릿 나타납니다. 또 간에 있는 혈에 열이 있으면 마치 핏발선 것처럼 눈이 충혈되며 붓는 현상이 생깁니다.

눈은 간뿐만 아니라 오장육부五臟六腑 모두와 관련이 있는데, 오장육부의 정기가 모두 모여서 눈이 이뤄진 까닭입니다. 그래서 눈의 질병은 간단히 치료될 것 같으면서도 막상 치료에 들어가면 어려움이 많이 따릅니다.

눈의 흰자위는 오장 가운데 폐와 관련이 있으며, 검은자위는 간과, 눈동자는 신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양 눈의 바깥쪽 끝과 눈구석에 있는 빨간 핏줄은 심장과, 눈꺼풀은 비장(소화기 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건강한 눈이란 오장육부가 모두 조화롭게 제 기능을 다하는 걸 말합니다. 건강한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모두 투명하면서 빛이 나고 선명합니다. 또한 눈꺼풀은 누런빛을 띠면서 윤기가 납니다. 눈꺼풀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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