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풍경화
 

  (이 글은 얼마 전 출간된 <자연과 삶, 손장섭>에 소개된 글입니다.
손장섭 씨의 청탁을 받아 여러 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일부분입니다.)

장르풍경화

성기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풍경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풍경은 인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배경에 불과했으므로 화가들은 풍경의 원근이나 독특한 분위기에 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연을 화면 구성상의 요소로 삼았을 뿐 자연 자체를 관조하여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서양 미술에서의 최초 풍경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 이름은 빈치 동네사람 레오나르도란 뜻인데 빈치가 그의 성이 되었다)가 그린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빈치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몇 점 남겼는데 펜으로 풍경을 드로잉할 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풍경화는 그에게 특별한 드로잉으로 1473년 8월 5일이라는 정확한 날짜를 명기했다.
이후 풍경은 회화의 고유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풍경은 매우 정감 있는 장면으로 묘사되었고 영국의 존 컨스터블과 프랑스의 카미유 코로의 풍경화가 유명하다.
프랑수아 밀레도 말년에 가세한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는 이 장르에 획을 그었다.
풍경화가 주요 장르가 된 것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화가들에게 자연은 신기를 지닌 실체였다.
에밀 놀데의 풍경화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신앙이 깊숙히 배어 있어 풍경에 찬송의 곡을 붙였다는 느낌이다.
모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는 이 장르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했다.
자연의 일시적 변화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의욕으로 풍경의 변화무쌍한 다양함을 선보인 것이다.
풍경에 대한 모네의 집착은 거의 실명에 이르게 했다.
빛에 의한 대기의 변화까지도 화폭에 담는 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몫이었다.

이렇듯 20세기 초반까지 풍경화는 회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되었다.
1차세계대전과 더불어 서양미술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살상하는 전쟁의 비극에 분노한 예술가들이 이성에 혐오를 느끼고 소위 다다dada로 불리우는 예술의 허무주의를 구가했다.
예술가들은 모든 전통을 전복시키는 일에 예술의 목적을 둘 정도였다.
반이성주의 예술가들은 1930년대에 세계적 경제공황과 더불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문제에 봉착했으며 여기에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를 맞아 현실도피가 대대적으로 행해졌는데 이것이 그럴싸한 말로 초현실주의인 것이다.
의식세계의 한계에 봉착한 예술가들은 그동안 억눌려온 무의식세계에서 자조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여기에는 무의식세계의 빗장을 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역할이 컸다.
그의 저서 <꿈의 해석>은 1900년에 이미 서점에 진열되어 있었고 예술가들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매달렸다.

이런 추이는 2차세계대전 후에도 지속되었다.
전후의 가장 두드러진 미술운동은 추상표현주의였는데 이 운동은 외부세계보다는 내면세계에 대한 탐험으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무의식이 창작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허무맹랑한 방법으로의 현실도피와는 달리 추상표현주의는 의식의 과정과 분출을 행위적으로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정치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경제에서도 최대 소비국가가 되었다.
1960년대에 성행한 팝아트는 바로 이 소비주의에 뿌리를 둔 미술운동이다.
유럽에서는 이를 신사실주의란 말로 불렀는데 미국과 유럽의 예술가들은 소비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대량생산으로 나아간 서구 물질문명을 자축했다.

하지만 이런 자축은 잠시뿐이었다.
물질과 대상에서 출발한 미술은 1970년대에 추진력을 상실했는데 화가 자신의 정신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화가들은 더이상 대상을 찾지 않고 철학과 논리에 매달렸다.
이런 성찰을 근거로 1980년대에 미술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졌는데 이를 다원주의라고 한다.
회화의 경우 장르와 양식은 더이상 우열을 가리는 수단이 되지 못했다.
모든 장르와 양식이 동등하게 취급된 것이다.
장르와 양식으로 우열을 가리던 모더니즘이 한계에 다달아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개시된 것이다.

이제 화가들은 매우 자유로워졌다.
창작의 폭이 아주 커진 것이다.
아직도 장르나 양식을 트집잡는 평론가가 있다면 그는 자격미달이므로 평론에서 속히 떠나야 한다.
화가는 어떤 장르라도 선택할 수 있고 어떤 양식으로 그려도 무방하다.
오히려 장르와 양식에서 자유로운 것이 바람직하다.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미술적 재료란 것이 따로 있었고 장르에 걸맞는 재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당위성만 증명할 수 있다면 모든 재료가 미술적 재료가 된다.
교과서적인 재료나 기법에 있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적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재료와 기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결과를 위한 것이 된다.
무엇으로 그렸느냐 혹은 어떻게 그렸느냐 하는 질문은 호기심을 총족시키는 질문이 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무엇을 표현했느냐 혹은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고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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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사랑의 동산


중세 ‘사랑의 동산 Garden of Love’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13세기의 장편 은유의 시 『장미의 로맨스 Romance of the Rose』이다.
이것은 네덜란드어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문학과 예술에 있어 많은 모작을 낳게 했다.
이런 주제의 작품은 보스 당대에도 태피스트리와 엔그레이빙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런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새가 노래하며 연인들이 연못 주변을 거닐거나 노래하는 것이 보통이다.
보스는 유행하던 이런 작품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연인들이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는 행위와 물의 연관성은 보스 당대에 보편적 표현이었다.
<월별 노동 labours of the months> 시리즈에는 사랑의 시기인 5월을 물통 안에서 연인들이 서로 끌어안는 장면으로 표현되었다.
<젊음의 샘 (혹은 풀) the Fountain (or Pool) of Youth>도 에로틱하게 묘사되었다.
<지상 쾌락의 동산>에는 ‘사랑의 동산’과 ‘비너스의 욕장 Bath of Venus’과도 같은 주제가 있다.
원경의 호수를 자세히 보면 남자와 여자들이 한데 어울려 놀고 있지만 중간 연못에서는 성별이 구분되어 원형의 연못에는 여자뿐이고 남자는 다양한 형상의 동물들을 타고 주변을 맴돈다.
남자들이 동물 등에서 곡예를 부리는 것은 여자들을 보고 흥분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장면을 화면 중앙에 삽입한 데서 그가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 중세 도덕주의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선례에서와 같이 색욕을 먼저 자극하는 것을 여성으로 보았다. 15세기 말 이스라헬 반 메케넴의 엔그레이빙에는 젊은 처녀의 주변을 격렬한 몸짓을 하며 맴도는 남자들이 있다.
이는 전통으로 내려온 ‘모리스 춤 Morris Dance’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15세기 필사본 『신국』에는 고대 로마의 음탕한 관습에 대한 비판을 동산에서 누드로 춤 추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지상 쾌락의 동산>이 인간의 어리석은 자들 혹은 무지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려졌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바보들의 배>, <수전노의 죽음>, <건초 수레>와 일맥상통한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지상 쾌락의 동산>은 아름답게 나타났기 때문에 색욕을 죽을 죄로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보이지만 중세 사람들은 물질적·육체적 아름다움을 우리와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고 탐욕의 대상으로 보았다.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유혹적인 것들 이면에는 죄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예를 보스 당대에 유행한 상아로 제작된 작은 조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앞면에는 포옹하는 한쌍의 연인이 관능적인 여성 누드상으로 나타나 있지만 뒤에는 부패된 시체의 상이 새겨져 있다.
<지상 쾌락의 동산>을 통해서 보스는 우리에게 이것이 낙원이 아니라 일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거짓된 낙원임을 깨닫게 해주려고 한다.
이는 중세 문학에서도 널리 사용된 주제였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기독교에 바탕을 둔 도덕주의자였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쪽 제단화를 닫을 경우 구약성서 창세기 천지창조가 묘사되어 있다.
닫힌 세쪽 제단화는 세상이 열리기 전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컬러가 없다.
해와 달이 창조되기 전이라서 지상에 아직 빛이 내리기 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스의 창작이 아니라 전통이다.
인류가 지상에 생기고 번성하기 이전의 우주를 묘사하려고 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천지창조 Creation of the World>가 회색과 회색-녹색으로 패널에 그려져 있는데,
태초의 첫째, 둘째, 셋째 날을 묘사한 장면이라서 해와 달이 아직 생기기 전이므로 색이 있기 전의 상태이다.
왼쪽 상단 모퉁이에 창조주 하나님이 작게 묘사되었으며 머리에 관을 쓰고 교황처럼 앉아 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면서 하나님이 몸소 행동으로 천지를 창조했음을 드라마처럼 묘사했지만 보스는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으므로 성서의 기록대로 말씀으로 창조했음을 묘사했다.
하나님은 옥좌에 앉아 왼손으로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상단에 시편 33장 9절이 적혀 있다.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생기고
한 마디 명령에 제자리를 굳혔다.
For he spake and it was done;
he commanded and it stood fast.

이는 보스 자신이 이해하는 우주론이면서 그림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그는 9절만 적어넣었지만 시편 33편 6~7절을 관람자가 알고 있을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
바닷물을 독에 담으시고
깊은 땅 속 창고에 넣어 두셨다.

보스는 시편의 저자와 같이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겨났으니,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시편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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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술’ 개념을 받아들인 괴테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는 1772년에 처음으로 저서 『독일의 건축예술에 관하여』를 출간했는데 당대의 예술론과 혁명적인 사유형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그는 레싱과 빙켈만으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는데 미학에 있어서 빙켈만의 성과들이 요즘 사람들에게 잊혀진 주된 원인은 나중 사람들이 그의 성과를 자신들의 논의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학에 있어서 그의 특징을 보상케는 다음 네 가지로 요약했다.
1 세공품에 관한 연구에서 인간의 정신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감각.
2 예술에 있어서 유기적 발전의 진가로의 이 감각의 확장은 사회적·정치적 조건들 안에서 상관적이다.
3 조형미술의 미 내에서의 표현의 다양한 양상들에 대한 논리상 필연의 인식.
4 형식적 미와 표현을 위한 상충하는 주장들과 그것들의 부분적 화해의 공개된 용인.
괴테는 또한 하만과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1744-1803)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입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건축의 대가 슈타인바흐Erwin von Steinbach를 열광적으로 찬미한 괴테는 고딕 건축예술과 18세기의 통상적인 건축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했다.
규칙이나 법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미술품이 지닌 완결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치를 두었다.
레싱에 의해 막 도입된 ‘조형미술’ 개념이 그에 의해 다시금 파악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34)
괴테는 인간에게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천재적 본성이 있음을 명백히 하려고 했다.35)
빙켈만과 마찬가지로 감성적인 견해를 모든 예술 관찰의 토대로 보았고, 이론을 단지 예술가 자신과의 관계에 한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줄쩌Johan Georg Sulzer(1720-79)의 『그 기원에서 본 참된 예술, 그 참된 본성과 촤상의 적용』(1772)을 비평하면서 괴테는 『프랑크프루트 학술소식지』에 기고했다.36)
어떻게든지 사변적인 노력이 예술에 유용하다면, 그것은 예술가와 직접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가만이 자신의 예술에서 어떤 삶의 축복도 느끼지 않고 그의 도구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단지 자신의 느낌과 힘을 가지고 거기서 살아가는 것이다.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대중에게 그들이 왜 멍청하게 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이 속해 있는지 생각하게 할 수 있는가?
… 예술로부터 감성적 경험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차라리 예술을 그냥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왜 그가 예술에 몰두해야 하는가?
그것이 유향이기 때문에?
모든 이론은 참된 향유로 향하는 길을 봉쇄해버린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론보다 더욱 해로운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어떤 예술론도 해로운 것으로 간주했는데 쿨터만은 이를 당대에 여전히 지배적이던 계몽주의적 관점에 대한 논쟁적 반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이후 어떤 기초가 될 만한 예술론을 발전시킨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파악한 것과는 조화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괴테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훔볼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옹호했다.37)
“조형미술에 대한 소질과 애착으로 짜여져 있는 괴테의 시적 충동, 또한 형태나 외적 대상을 자연대상의 내적 본질과 그 형성의 법칙으로부터 탐구하고자 하는 괴테의 열망, 이것들은 다만 다르게 작용할 뿐이지 그 원리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훔볼트는 괴테를 충분히 이했는데 괴테가 야코비F. H. Jacobi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유 핵심을 명백히 정식화한 데서 확인된다.
보십시오, 모든 글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를. 모든 것을 감싸고 구속하고 새로이 창조하며 고유한 형식과 기법으로 다시 세워놓는 내적 세계를 통해 우리 주위의 세계를 재생시킨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밀로 남습니다.
쿨터만은 모든 전통 형식을 거부한 듯한 청년 괴테의 혁명적인 사고에조차 고대 이래 예술론의 전체적 전통이 보여지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면서 샤프츠베리Shaftesbury(1670-1713)를 통해 넘겨진 플라톤적 예술 파악을 그에게서 발견하는 일은 쉽다고 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샤프츠베리는 미를 신성한 삶의 표현으로 믿었고, 훈련된 눈과 귀가 무엇이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지를 궁극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이 말한 광기 혹은 천재성은 샤프츠베리와 괴테의 미학에서 쉽게 발견된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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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술의 온상 카타콤

 
초기 기독교 미술품이 대부분 현존하지 않으므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독교 미술이 진전되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로마의 지하묘지 카타콤에 많은 벽화가 남아 있다.
지하묘지는 로마시 외곽에 있는데 로마법에는 시신을 시 밖에 안장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묘지는 처음에는 동일한 깊이로 터널식으로 파서 만들어졌지만 면적이 충분하지 않게 되자 아래로 연결해 9m에서 15m까지 깊게 파서 터널을 연결시켰다.
그러니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터널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묘지가 되는 것이다.
시신은 상자에 넣어 벽안에 매장하고 석판이나 벽돌로 덮었고 글을 새겨넣기도 했다.
글은 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는데 크리스천들의 국적이 여러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부자들은 방을 따로 만들어 벽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사람들은 매년 터널을 따라 친분이 있는 묘지를 찾아 가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로마 시 주위에서 발견된 카타콤은 45개인데 1950년에 새로 발견된 것도 있으며 앞으로 더 발견될 수도 있다.
특히 로마로 통하는 대로 압비아via Appia로 근처에는 무려 15개가 밀집되어 있다.
카타콤은 로마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하에 바위를 뚫고 묘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는 장례법은 고대 여러 나라에서도 행해졌다.
나폴리Naples와 시라큐스Syracuse 그리고 동로마에도 카타콤은 있었으므로 카타콤을 로마인의 특이한 묘지형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몰타 섬이나 소아시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고대 카타콤이 발견된다.
하지만 로마에서처럼 무더기로 발견된 곳은 없다.

19세기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데 로시De Rossi는 평생 카타콤을 연구했고 오늘날까지 그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로마 외곽에 카타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크리스천이 순교자들을 카타콤에 안장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순교자들의 수가 늘어났고 따라서 카타콤의 규모를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의 길이는 무려 20km에 달한다.

카타콤은 크리스천의 전용 묘역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사용했다.
230년과 310년 사이에 로마교회의 주교(교황)들 가운데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카타콤에 묻혔다.
이는 카타콤이 로마의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의 보편적 장례지였음을 말해준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카타콤은 더욱 더 크리스천의 묘지로 확고해졌으며 규모도 커졌다.
교황은 카타콤 안에 예배당을 만들기도 했는데 300년대 후반에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에 만든 지하 예배당은 길이가 31m에 폭이 17m나 되었다.
이것은 순교자 에리무스와 아키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한 예배당이었다.
500년 이후로는 카타콤은 거의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카타콤이 지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로마의 카타콤은 200년경에 만들어졌는데 250년경 이전에는 그곳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카타콤에 시신을 묻지 않게 된 것은 5세기 초였으며 교회는 크리스천의 유골을 보관하는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카타콤의 벽화를 보면 예술가의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전통적인 상징을 사용해서 그린 것들이다.
크리스천들의 벽화는 서양미술사에 새 장을 열었지만 시각적인 구성법은 당시 알려진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방법들과 다르지 않았다.
기본 주제는 낙원을 꿈 꾸는 구원으로 한결 같았지만 종교가 달랐으므로 이방인과 크리스천의 상징의 의미는 달랐다.
구원이란 주검에서 벗어나 영생하는 걸 의미했다.

카타콤에는 물고기가 장식되어 있는데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물고기는 기원전 597년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시절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해온 메시아(그리스도와 같은 말로 유대어이다)를 상징한다.
크리스천은 물고기를 상형문자처럼 사용했는데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이크투스Ichtus로서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us, 하나님의Dei Deus 아들Filius 구세주Salvator'의 머리글자들이다.
물고기를 상징물로 사용할 때는 독립적으로 한 마리를 사용하지만 십자가를 곁들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물고기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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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십자가

 
초기 기독교 미술에 나타나는 십자가의 형태는 다양하다.
모자이크 작품과 그림에 종종 나타나는 콘스탄틴 대제가 밀비안 다리 전투에 사용했다는 X자 위에 P자를 올려놓은 치로 사인Chi Rho sign 십자가의 형태들도 다양하다.
라틴식 십자가의 기본형은 십자가의 횡단목보다 종단목이 더 길다는 점과 종단목이 곧바르게 서 있는 점이다.
이 기본형에서 갖가지 모양의 라틴식 십자가들이 만들어졌다.
이 기본형 끝 사방을 뾰족하게 한 것을 고난의 십자가Passion Cross라 하고, 기본형에 태양 광선을 둘로 표시한 것을 영광의 십자가Cross of glory라 하며, 기본형을 거꾸로 세운 것을 거꾸로 된 십자가Cross inverted라 하는데 이를 베드로의 십자가라고도 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 명칭이다.
T자형 십자가Tau Cross도 있는데 이는 로마제국이 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 십자형 십자가와 X자형 십자가Salitire Cross 외에도 T자형 십자가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T자형 십자가 위에 타원형 고리를 단 것이 있는데 이것을 고리 십자가라고 한다.
이것은 '생명', '영혼', '거듭 태어남',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기본형 십자가 위에 작은 횡단목이 하나 더 있는 십자가를 대주교, 주교 십자가Patriarchal, Episcopal Cross라 하고 더욱 작은 횡단목 하나를 더 추가한 것을 교황 십자가Papal Cross라 한다.
X자형 십자가를 성 안드레 십자가라고도 하는데 안드레가 이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기 때문이다. T자형 십자가는 '예언', '예수의 재림', '구약의 십자가', '예고 십자가 Anticipatory Cross' 등의 의미가 있다.
고리 십자가 형태는 이집트인이 사용하던 손거울 모양과 똑같다.
고리 부분의 타원형이 거울이고 아래 부분은 손잡이이다.
고대 이집트인에게는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날 것으로 믿었으므로 무덤 속에 고인이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부장품으로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집트 여왕의 무덤에서 이런 손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리 십자가가 이 손거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리스인의 십자가의 특색은 횡단목과 종단목의 길이가 같은 것이다.
네 팔이 모두 동일한 이런 기본형에서 다양한 형태가 생겼는데 네 팔의 끝부분을 뾰족하게 한 것과 넓게 한 것도 있다.
네 팔을 T자처럼 한 것을 능력의 십자가Cross Potent라 하는데 '치유'와 '회복'을 상징한다.
네 팔이 라틴식 십자가로 된 것을 십자 문자형 십자가Cross Crosslet라 하는데 '복음을 편다'의 뜻이다.
예루살렘 십자가Jerusalem Cross는 그리스식 능력의 십자가의 네 귀가 작은 그리스식 십자가의 기본형 네 개로 메워진 것인데 이것은 '세상의 사방 끝까지 복음을 편다'의 의미이다.
T자형 십자가에 뱀 혹은 모세의 지팡이가 곁들어진 것도 있는데 이에 대한 상징은 다음의 구절과 관련이 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민수기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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