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 디 본도네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은 <르네상스 미술 Die Klassische Kunst>(1898, 직역하면 '고전 미술'이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대략 14, 15세기와 16세기로 나눠 16세기를 '고전 klassisch' 시대로 분류하고, 이 시대 미술품에 나타난 양식적 특징을 15세기 양식과 비교해 고찰했다.
그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메네치아 유파를 거의 배제하고 새 거장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작품을 다뤘다.
그의 양식stil(style)으로의 고찰은 비교 시각에 근거한다.
르네상스의 틀 안에서 고전 미술 양식을 15세기 이전 초기 양식과 비교한 것이다.
뵐플린에 의하면 르네상스 '고전' 미술은 고대와의 접촉이나 영향 하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절정의 꽃이다.
그가 말한 '고전'은 이탈리아 고전을 뜻한다.
회화에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1337)는 단테의 친구였다.
조토의 업적은 회화적 묘사에 있다. 그때까지 아무도 화면 안에 넣을 수 없었던 오브제들을 관람자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한 데 그의 회화적 특징이 있다.
이탈리아 미술을 조토가 열었다고 주장한 뵐플린은 <르네상스 미술>에 적었다.
"역사상 회화의 표현 한계가 이때보다 더 크게 확장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
조토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의 인간이었다.
서정시인이 아니라 관찰자였다.
흥분으로 감동시키는 표현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표현이 풍부하고 명료하게 말을 하는 예술가였다."
조토가 냉정하며 균형잡힌 그림을 그렸다고 판단한 뵐플린은 저서에서 조토는 섬세함보다는 토종의 투박함을 추구했으며 늘 진지하게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선이 아니라 명료함으로 효과를 냈다고 주장했다.
조토의 선은 매우 딱딱하지만 비상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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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나무인간>

 

나무인간은 은유적인 보스의 상상물이지만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나무인간을 자연을 배경으로 구성했다.
달걀처럼 생긴 나무인간의 몸통은 썩어가는 나무가지로 지탱되고 나무가지 아래에는 사람이 구두를 신고 있는 것처럼 배를 타고 있다.
하반신은 사라진 몸통 속에는 술집이 있으며 터키의 국기를 밖에 내걸었다.
나무인간의 머리 위 큰 냄비에는 커다란 물주전자가 있고 물주전자 안으로부터 사다리가 위로 솟아 있으며 그걸 사람이 타고 올라가 있다.
나무인간은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고 머리 위에 올려진 원반에는 악마와 저주받은 자들이 백파이프 주변을 걸어가고 있다.
비극적인 나무인간에 대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것을 통해서 보스의 상상력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하단 오른쪽 새의 머리를 한 괴물은 주전자를 쓰고 있어 코믹하기까지 하다.
이 괴물은 저주받은 자를 통채로 삼키고 먹은 것을 투명한 변기에 배설한다.
배설된 영혼은 변기를 뚫고 아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진다.
이와 유사한 괴물이 『툰데일의 지옥 환영』에 등장하며 동일한 방법으로 음탕한 성직자의 영혼을 소화시킨다.
구덩이 속에 이미 여러 영혼들이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스는 당대의 부패를 지옥으로 묘사하면서 지옥이 따로 존재한다 보지 않았다.
스페인 작가 프란치스코 고메즈 데 퀘베도Francisco Gomez de Quevedo(1580~1645)는 보스가 지옥을 방문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지옥의 악마들이 보스에게 자신들을 꿈 속의 허구적 존재들로 묘사한 데 대해서 불평하자,
보스는 자기가 악마들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적었다.
보스가 악마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이는 당대의 이단자 탄압 조건에 해당한다.
그의 신앙은 매우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색욕에 대한 벌은 하단 오른쪽에 잘 나타나 있다.
문서를 무릎에 놓고 호색적인 암퇘지에게 서명을 강요당하는 남자가 색욕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
암퇘지가 수녀의 모자를 쓰고 있어 벌 받는 사람은 수녀에게 못된 짓을 한 수도사였을 것이다.
옆에는 무장을 하고 잉크병을 주둥아리로 늘어뜨린 괴물이 있다.
류트와 하프 아래서 합창하는 자들도 색욕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며 나무인간 머리 위 백파이프는 술집을 빈번히 드나들며 음란한 노래로 사람들을 욕정에 빠뜨린 떠돌이 악사에 대한 질타로 보여진다.
백파이프는 에로틱한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브란트가 ‘저능아의 악기 instrument of dunces’라고 부른 백파이프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류트의 동그란 구멍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남자가 류트를 켜는 것은 성교를 의미한다.
중세 도덕주의자들은 색욕을 ‘육신의 음악 music of the flesh’이라고 불렀다.
보스의 <지옥>에서는 악기가 영원한 고통을 가하는 고문도구가 된다.
<지상 쾌락의 동산>은 보스의 걸작이다.
복합적인 중세의 사고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교훈적인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했다.
근대의 물결이 이탈리아에서 일고 있었지만 북유럽은 아직 중세에 속했다.
근대가 도래할 것을 감지한 지식인들에게 종교적인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불안한 심리를 보스가 파노라마로 펼친 것이다.
이 작품과 <건초 수레>는 세쪽 제단화의 형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주제의 격렬함으로 봐서 형식만을 따른 것이지 교회나 수도원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한 건 아니다.
이 작품은 걸작으로 꼽혔으며 보스 생전에도 여러 점으로 모사되었다.
원작에 대한 모사품이 1530년대에 이미 다양한 종류로 있었음이 현존하는 것들로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태피스트리로도 제작되었다.
당시 태피스트리는 매우 발달되어 있었으며 궁정에서도 유명한 작품을 재현하여 장식으로 사용했다.
보스의 작품이 처음 태피스트리로 제작된 건 1542년 파리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cois I를 위해서였다.
늙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오게 해서 타계할 때가지 보살펴준 프랑수아 1세는 예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560년대에 이미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건초 수레>, <지상 쾌락의 동산> 등이 태피스트리로 재현되었으며 태피스트리를 주로 생산한 곳은 브뤼셀과 안트베르펜이었다.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원작을 먼저 모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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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도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칸트는 18세기 미학의 문제를 판단적 철학의 특징이 있는 형태에서 재조명했는데 미학을 철학적 시스템의 꼭 필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는 평가와 함께 최초의 모던 철학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자신의 고유한 예술론을 통해 가능성을 제시한 헤겔도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가리켜서 “미에 관한 최초의 이성적 서언”이라고 극찬했다.
루카치는 『미학』에서 철학사의 발전과정에서 후계자들과 해석자들에 의한 관념론적 왜곡은 흔했던 일로서 원래의 서술을 훨씬 능가해왔다면서 칸트의 예술의 절대적 무관심성이라는 공리는 그래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무관심성으로 인해 미학이 순전히 순수한 명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칸트를 혹평했는데 “칸트 이래로 예술, 미, 인식, 지혜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무관심’이라는 개념을 통해 온통 뒤섞이고 오염되어 버렸다”고 했다.
빙켈만과 괴테 그리고 고전주의자들에 비해 칸트의 새로운 인식이 미술품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거의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랄 만한 점이었다.
쿠노 프랑케Kuno Francke는 이에 대한 자신의 놀라움과 감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가 어떤 미적 경험도 없이, 그리고 어떤 예술적 영향이나 심리적 경험의 형식도 배제된 환경에서, 오직 추상적인 사유만으로 이러한 이념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진실로 그의 사변적인 천재성을 설득력 있게 입증해준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다룬 것은 복잡한 방법이었지만 예술들 가운데서 순수예술을 분리시킨 것으로 예술을 기능적인 것과 미감적인 것으로 나눈 후 미감적인 것을 순수한 것과 쾌를 주는 것으로 다시 나눴다.
그는 이것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분화하면서 플라톤의 방식대로 진리의 예술과 현상의 예술로 나누고 전자에 건축을, 후자에 회화를 분류했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예술과 예술에 의해 창조된 대상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예술로 나눴다.
그는 인간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세 가지 방법 즉 말, 소리, 몸짓이 있다고 보고 이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순수예술을 분류했다.
시와 수사법은 말에, 음악은 소리에, 회화, 조각, 건축은 몸짓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칸트는 미를 “인상이나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보편적이며 무관심적인 방법에 의해 주관적 필연성을 갖고 쾌를 주는 것”으로 규정했으며, 취미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결정짓는 기능인 미적 공통감 sensus communis aestheticus”으로 규정하면서 “취미판단은 인식적이 아니므로 따라서 논리적이 아니라 미적으로 이는 내가 그것의 근거가 오직 주관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바이다”42)라고 했다.
칸트의 취미판단을 이해하기 전에 그가 확립시킨 역설적인 미적 경험의 특수성을 살펴보면 무관심성disinterested, 비개념성non-conceptual, 형식성form of the object, 심의 전체의 쾌pleasure of the whole mind, 필요성necessity(그러나 주관적이다) 보편성universality(그러나 어떠한 규칙도 없지만 주관적이다) 것들로 특징지워진다.43)
미의 가치가 보편적 원리로부터 추론되거나 증명될 수 없는 한 취미의 문제는 논증이나 증명을 통해 결정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척도와 선택된 모범의 평균치에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단순히 모방하는 것은 취미 본래의 개념이 아니다.
감성적 취미 영역에서는 모범과 표본이 탁월한 기능을 지니지만 칸트가 지적한 대로 이 기능은 모방의 방식이 아니라 계승의 방식을 따른다.
모범 혹은 실례는 취미가 나아갈 길을 인도해주지만 취미 고유의 과제를 빼앗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취미가 자체로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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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했던 르네상스
 

  가능했던 르네상스


중세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의 전령자 교황의 말씀을 듣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야 했고 라틴어를 익히게 되자 로마법과 로마 사회 시스템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비견할 만한 유산이 없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자연히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단순히 그리스 문화를 소개한 데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건 아니었고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데는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페트라르카이다.
오래 지속된 중세 기간 중에 많은 고전이 산실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게 된 사본들이 주로 베네딕트파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이 문헌들을 친구 보카치오와 더불어 온 힘을 다 해 발굴해내 필사하고 번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두 사람은 책벌레로 알려진 인문주의자들에게 협력을 청했다.
르네상스를 인문주의Humanism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인문주의가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다.
고전 문헌이 이탈리아에 가장 많았으므로 인문주의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여건으로 도시 문화의 부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게르만족은 인종격리 정책을 취하며 스스로 고립되었으며 도시생활을 모르는 채 시골 성채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문명이란 말은 도시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도시국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명이 있었지만 마케도니아에는 도시가 없었고, 그들은 농경, 목축생활도 할 줄 몰랐으며, 군대만 번성시켰기 때문에 문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에서 중세의 오랜 농촌생활로부터 처음 도시가 사회의 구심점으로 부활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에는 로마문명이 어느 지역보다 깊게 뿌리박고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지만 로마는 엄연히 건재한 카톨릭 세계의 수도였으므로 로마에는 고대문명의 자취가 확연히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 조건으로 많은 도시들이 서양문명의 전위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지중해는 물심양면으로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종족이 상접해 있어 이따금 충돌이 발생했지만 대게는 평화적 교류가 이뤄졌다.
특기할 만한 점은 산업과 지식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불어온 것으로 중국의 견직물과 도자기, 인도의 융단과 향료, 그리고 방직염색 화학기술도 동방에서 유입되었다.
기하, 대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철학 등도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이 모든 것들이 이탈리아의 여러 항구로부터 각지로 집산되었다.
교역은 부를 가져 왔고 부는 문화의 필요조건이다.
중세의 모든 부가 이탈리아로 모인 셈이다.
중세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대사업은 카톨릭 교회였다.
서양 카톨릭 세계의 모든 헌금은 로마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반도 전역으로 뿌려졌다.
농촌화된 유럽 나라들에서는 교역이 물물교환으로 이뤄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달되고 화폐의 유통이 강화되었다.
경제의 수원은 교회뿐 아니라 해운업에도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도시에는 우수한 선단과 선원들이 있어 폭풍우와 해적들을 물리치고 거액을 벌여들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료와 제품을 생산해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이런 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덕택에 부자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해 많은 미술품을 만들게 하고 삶의 질을 높였다.
르네상스를 성행시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상공업과 은행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금전만능 풍조가 현저했으며, 입신출세의 길도 열렸고, 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중세는 피라미드식의 폐쇄된 신분사회로 귀족계급이 정상을 점하고 있었지만, 신흥 부호들이 이 계급을 따라잡기 위해 예술을 보호 육성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질을 귀족들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십자군에서 공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교회를 건립하고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공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르네상스는 이러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으로 인해 교회를 세속화시켰다.
종래에는 예술가의 보수를 지불하는 곳이 교회뿐이었으므로 카톨릭 미술만이 발전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이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면서부터 카톨릭 미술 외의 테마가 등장했으며 검열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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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지옥>


<지옥> 패널화의 배경은 밤의 장면이며 자연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인간이 창조한 문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도시는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완전히 만취된 상태이며, 여기저기에서 가학행위가 자행되고 있고, 심지어 악기조차 인간을 고문하는 형틀의 기구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악마의 유혹에 압도되었다.
보스는 엉망진창이 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쾌락의 추구가 고통의 응보가 되고 있음을 묘사했다.
그는 인류의 손에 의해 세상이 지옥화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옥의 왕자는 머리에 큰 냄비를 쓰고 있는데 냄비는 지구를 상징한다.
냄비 위 과부의 모습은 빠져나갈 출구가 없음을 의미한다.
하단에 도박으로 돈을 다 날린 사람의 손이 술집 테이블에 칼로 찔린 채 박혀 있다.
그의 몸을 새처럼 생긴 괴물이 누르고 있으며 괴물의 등에는 방패가 있고 방패에는 잘린 손이 칼에 찔린 채 있으며 위로 향한 두 손가락 위에는 도박에 사용된 주사위가 얹혀져 있다.
바닥에는 트럼프 패가 널려 있는데 사내의 모든 걸 잃게 만든 패이다.
<지옥>은 밤과 같이 어둡고 냉냉하다.
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하단에는 토끼가 피를 흘리는 저주받은 사람을 막대기에 매달고 운반한다.
저주받은 사람은 사냥꾼인 듯 하며 사냥감인 토끼가 오히려 사냥꾼을 포획했다.
지옥의 혼란을 말해준다.
인간세계에서 고통을 준 가해자는 지옥에서 피해자들에 의해 그 이상의 고통을 응보로 받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들이 지옥에서는 가혹한 고문도구가 된다.
쾌락을 상징하는 음악은 사라지고 류트와 하프는 죄인들을 매다는 형틀이 된다.
음악에 취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자들은 괴롭히는 도구가 된 악기에 의해 가혹한 벌을 받는다.
목관악기와 타악기가 있고 그것들 뒤로 사람들은 류트 아래 엎어져 있는 사람의 응덩이에 적힌 악보를 보고 합창을 하듯 제각기 악을 지른다.
엉덩이는 육욕을 상징한다.
악기는 나무처럼 생긴 지옥의 왕자 머리 위에도 있다.
핑크색의 백파이프는 성적 상징이며 마귀와 인간이 함께 댄스곡을 연주한다.
뒤로 거대한 크기의 두 귀가 있고 귀 사이에 나이프가 있다.
귀는 위협적인 경고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음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벌을 의미한다. 얼어붙은 호수에는 유난히 큰 스케이트를 타다 빠진 사람의 허우적대는 모습이 보이고 옆에 마찬가지로 커다란 스케이트를 타고 균형을 겨우 잡은 남자가 물구덩이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뒤에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보이는데, ‘스케이트타기’란 말은 옛 네덜란드인에게 위험한 상황을 의미했다.
중앙 왼쪽 끝에는 열쇄고리에 몸이 끼어 늘어진 자가 있고 뒤로는 거대한 한쌍의 귀가 지옥 군대 전차처럼 돌진하면서 앞에 매단 커다란 칼로 저주받은 자들을 해친다.
이 칼에는 보스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M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를 두고 보스가 특히 싫어한 칼 장인의 직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중세 예언자들이 M으로 시작되는 이름의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지옥> 중앙에 커다랗게 그려진 ‘나무인간 Tree-Man’은 <천국>에서의 ‘생명의 샘’과 대조가 되는 모티프이다.
보스는 나무인간을 따로 드로잉했으며 현재 베니스의 알베르티나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드로잉에서는 지옥을 가리키는 어떤 요소도 보이지 않아 <지상 쾌락의 동산> 오른쪽 날개를 그리기 위해 그린 드로잉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보스는 나무인간을 지옥을 가리키는 새로운 도상으로 사용했다.
많은 학자들이 나무인간의 얼굴을 보스의 자화상으로 본다.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깡마르고 머리카락은 은색이 도는 갈색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중앙 패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관람자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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