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I Wahrheit und Methode』(1960)에서 칸트가 미에 대하여, 경험적이 아니라 경험 독립적으로 갖게 되는 관심에 관하여 묻는 것이라면, 이 물음은 감성적 쾌감의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에 관한 근본적인 규정에 비하여 새로운 물음일 것이며, 취미의 입장으로부터 천재의 입장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동일한 이론이 취미와 천재 두 현상의 연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본 가다머는 이 이론의 토대를 확고히 다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취미의 비평’을 감각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칸트가 감성적으로 판단된 것의 현존 방식에 관한 물음(가다머의 말로, 또한 그와 더불어서 자연미와 예술미의 관계에 관한 모든 문제 영역)을 아직 제기하지 않고 있음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가다머는 “이러한 물음의 차원은 우리가 취미의 입장에 종지부를 찍게 될 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해서 생각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열리게 된다.
관심이 깃들인 미의 의미는 칸트 미학이 원래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다.
관심이 깃들인 미의 의미는 자연과 예술에 대해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자연미와 예술미의 비교는 바로 미학의 문제들을 전개시키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43-1)라고 했다.
칸트의 시스템은 한 이율배반이 비판 철학의 원리들에서 용해되는 것과 더불어 하나의 취미의 변증법이 있음을 요한다.
이것은 취미판단 안에서 개념들의 그 역할에 관한 역설로서 판단이 개념들에 연류되었다면 그것은 이성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아닌 이성들에 의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이 개념들에 연류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것인 불일치의 주제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해결책은 그런 판단들에 어떤 결정적인 개념도 연류되지 않고 오직 초감각적인 것의 그 비결정적인 개념이나 그 판단하는 주체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에 잠재하는 자체로서의 것이 연류되는 것이다.
고상한 것에 대한 칸트의 분석은 전혀 다른 근거로 진행된다.
본질적으로 그는 이런 만족의 종들을 이성 자체의 장려함의 느낌으로 설명하며 인간의 도덕적 운명에 비했는데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났다.
첫째, 우리가 자연에서 대단히 거대한 것(수학적인 고상한)을 직면했을 때 우리의 상상은 그것을 이해하는 과제 안에서 주춤거리며, 우리는 영원한 완전성을 향해 이르는 개념들의 이성의 우월을 알게 된다.
둘째, 우리가 압도적으로 강력한 것(동력적인 고상한)에 직면했을 때 경험적 우리 자신들의 연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치를 대조에 의해서 다시금 도덕적 존재들로 알게 해준다.
이런 분석에서 그리고 자연에서의 미에 관한 그의 최종 비평에서 칸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가 다른 수준에서 영역들의 자율을 위해 투쟁해온 그 영역들 사이의 연결인 한 수준을 향해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는 일찍이 선험적 이해의 개념들과 도덕성의 영역으로 한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 자체 발아래 있는 미적 기본들, 욕망의 독립과 지식 혹은 도덕성의 관심을 보여주기를 시도했다.
미에 대한 경험이 아직은 자연의 오브제들을 우리에게 그것들이 우주적 이성의 인공물들인 양 알 수 있는 것들로 보이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리고 고상한 것에 대한 경험이 자연적 무형성과 두려움의 용도를 이성 그 자체로 찬양하게 만들기 때문에 마지막 분석에서 이런 미적 가치들이 하나의 도덕적 목적과 도덕적 요구, 인간 정신을 높이고 고상하게 하는 것을 만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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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
 

  <모나리자>는 한동안 레오나르도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코는 아내의 그러한 웃는 모습을 벽에 걸어놓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초상화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어로 <라 조콘다 La Gioconda>로 알려졌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프랑스 왕 프란체스코 1세가 4천 크라운(5만 달러)을 주고 구입하여 자신의 퐁텐블루 궁전에 걸었다.
이 초상화는 프랑스어로 <라 조콘드 La Joconde>로 불리었고 영어로는 <모나리자 Mona Lisa>로 알려졌다.
몬나 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바사리가 <미술가 열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서이지만 그는 생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미술가 열전>을 쓸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에 관한 바사리의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로렌초의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좋아한 여인이란 설이 유력하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서 타계하기 몇 달 전 아라공의 추기경이 그림의 여인을 피렌체에서 보았다면서 줄리아노의 여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름은 파시피카 브란다노가 된다.
그 밖에도 이 여인에 관한 설이 분분해서 이제 누가 과연 실제 인물인지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그림의 주인공은 남자이며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전히 <모나리자>로 불리우고 있다.
바사리는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구입하지 않은 이유로 4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오늘날 루브르 뮤지엄에 있는 이 작품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사리의 말대로 당시 그것이 미완성이었다면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갖고 프랑스로 가서 그곳에서 완성시켰을 것이다.
만약 그림의 주인공이 줄리아노의 애인이었다면 줄리아노가 1515년 필리베르타와 결혼했기 때문에 애인의 초상화를 집에 걸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줄리아노가 레오나르도에게 <누드 모나리자 Nude Mona Lisa>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 대한 복제는 여러 점 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이 수난을 겪었듯이 <모나리자>도 수세기 동안 수난을 겪었다.
패널 양쪽 7cm가량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림 위에 덧칠한 적이 있다.
얼굴 부분에는 연한 황록색 유약이 칠해졌다.
<모나리자>는 서양사람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모티프로 갖가지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레오나르도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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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Mona Lisa
 

  <모나리자 Mona Lisa>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정부의 배려로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1963년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소개되었는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백만 명 이상 관람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1503~6년에 그린 것으로 1512년 시그노리(시의회)의 멤버가 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마돈나 엘리사베타의 초상이다.
프란체스코는 실크 교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으로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과부가 된 리자 디 게라르디니를 1495년 세 번째 아내로 맞았는데, 몬나 리자Monna Lisa로 불리운 이 여인은 1505년에 나이가 스물여섯 혹은 스물일곱 살로 알려졌다.
몬나 리자는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499년에 죽었다.
아이의 죽음이 그녀의 미소 이면에 담겨진 특징이 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1503~6년 3년 동안 몬나 리자로 하여금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작업장으로 와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자신의 예술의 비밀과 뉘앙스를 이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몬나 리자를 부드러운 명암을 조명하면서 배경에 나무, 물, 산, 바다를 그려넣었다.
그녀는 접어 포개진 새틴을 단 벨벳 의상을 했고 레오나르도는 특유의 기교로 우미하게 주름지고 접힌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짧은 코에 사랑스러운 얼굴을 그리면서 잔잔한 바람처럼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포착했다.
그녀의 눈빛은 성숙해 보이지 않고 입술 가장자리는 미소로 인해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관람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아주 살포시 지은 그녀의 미소를 좋아한다.
입술 가장자리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약간 위로 올라갔다.
뵐플린은 저서 <르네상스의 미술>에서 몬나 리자의 미소를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그것은 물 위를 스치는 바람결처럼 이 얼굴의 부드러운 표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움직임이다. 빛과 그림자가 벌이는 유희와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속삭이는 대화이다."
뵐플린은 이런 개념과 표현이 16세기에 생겨난 것에 회의를 표하면서 미소가 16세기에는 유행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는 눈두덩이의 부풀어오른 부분이 아무런 표지 없이 높은 앞이마로 넘어갔음을 지적하면서 몬나 리자에게 눈썹이 없는 것은 당시 여자들이 눈썹을 밀어버리는 유행을 따랐기 때문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넓은 이마가 아름답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이마 윗부분의 머리가 밀려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뵐플린은 몬나 리자의 취향이 철저히 15세기적임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바로 직후 유행이 달라졌음을 지적했는데, 이마는 도로 내려왔고 강력하게 분할해주는 눈썹이 있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게 여겨지게 되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모나리자> 복제판에 멋대로 눈썹이 그려져 있음을 뵐플린은 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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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미의 판단들 다시 말하면


칸트는 미의 판단들 다시 말하면 취미판단을 범주의 네 국면들인 관계 양과 특성 그리고 양상에서 분석했다.
첫째, 취미판단이 일반 판단들처럼 한 개념 하에서 재현된 것을 포함시키지 않지만 재현과 특별한 무관심한 만족, 즉 욕망과 관심의 독자적 만족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
둘째, 취미판단이 “이 장미가 아름답다”라는 식으로 논리적으로 특이한 형태지만 동의할 것을 강제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단순한 감각적 쾌의 보고와는 달리 객관적인 수락에 타이틀을 둔다.
아직은 역설적으로 어떤 논쟁도 그 누구에게 취미판단과 더불어 동의할 것을 강요할 수 없는 한 그것은 이성들에 의해 지지받을 수 있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셋째, 미적 만족은 실제로는 목적이나 기능이 없더라도 목적적인 형태의 한 오브제에 의해 일깨워지는데 어떤 일체로 해서 그것이 마치 이해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목적적 목적성 Zweckmassigkeit ohne Zweck”을 지녔다.
넷째, 아름다운 것은 미적 만족에 필요한 참조를 가진 취미판단에 의해 주장된다.
이는 우리가 그 밖의 모든 것이 비슷하게 동요될 것임을 보장할 수 있는 한 오브제에 의해 우리 자신들이 이 방법으로 동요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만족하는 것과 같은 것을 그것들이 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네 관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칸트는 그것들이 어떻게 이치에 맞게 당연한 결과를 유추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그런 판단을 미리 가정한 상태들이 그것을 만든 개인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납득이 될 만하게 모든 이성적 존재의 것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실마리가 미적 만족의 무관심에 제시되었는데 만약 우리의 만족이 개별적인 관심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일종의 상호 주관성을 고용할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통합적인 정당성 선험적 취미판단에는 좀 더 직관적인 연역을 모색하는 것이 요구된다.
칸트의 논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경험적 지식이 가능한 이유는 판단능력이 일반개념들과 특정한 감각-직관들을 상상 안에서 그것을 예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적인 판단의 경우들은 그렇지만 상상(재현들을 합성하는 사람처럼 자유로운 판단에서의)과 이해(판단의 우선하는 정당성 안에서의) 사이 한 일반적 조화를 미리 추정한다.
경험된 한 오브제의 형식상의 목적성은 칸트가 “상상의 자유로운 유희 a free play of the imagination”라고 하는 어떤 특정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인식의 힘인 상상과 이해의 조화에 대한 의식에만 의존하는 강한 무관심한 즐거움을 야기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취미판단에서 확언하는 쾌이다. 상호 지식을 공유하는 일반 가능성이 허락되어 우리 각기에게 상상과 이해의 협동이 있다고 미리 추정한 이래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 인식적 힘들의 조화인 적합한 지각적 상태들 하에서 느끼는 역량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취미의 진정한 판단이 모두에게 사실임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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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을 감상하는 계층이 생겼다
 

  르네상스는 엘리트 문화


양식의 차이로서가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을 전반적으로 말하면 엘리트 문화의 일부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당시의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한 계층으로 대체적으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들이었다.
단일성으로 말하면 중세 승려계급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지식인계층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미술품들을 당시 시민계급은 알지 못했으며 그들이 관람했더라도 예술가들의 고상한 미적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민과 지식인의 지성적 차이는 매우 컸으며 이런 격차는 유럽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중세 미술 역시 시민계층을 바탕으로 한 건 아니지만 르네상스의 미술처럼 철저히 시민을 배제시킨 미술은 과거에 없었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1953)에서 중세 교회문화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것은 교회가 로마 후기 문명과 연속적,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언어를 통해 표현된 중세 문화의 민중적 전통을 단절시키고 일종의 새로운 성직자계급으로서 자신의 문화적 독점을 확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하우저는 예술가들이 이런 계층의 비호 하에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그들의 후견 아래 있었다고 보았는데, 이는 예술가들이 교회와 길드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인문주의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권위에 종속된 것을 의미하며 이 엘리트층은 여태까지 교회와 길드가 누린 권한을 예술가들에게 행사했다.
주목할 점은 인문주의자들이 역사화와 종교화의 주제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 권위를 시위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구성과 기교에서도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인문주의자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로부터 독립한 댓가로 사회적으로 지위를 얻고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인문주의자들을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심판자로 인정해야 했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미술품을 감상하는 계층이 비평적이며 창작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관철시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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