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 중에서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과 제자 앵그르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고상한 이상과 순수 이미지의 재활이 르네상스시대에 발생했고, 18세기 말부터 이런 양식이 다시금 두드러졌는데,
신고전주의로 불리우는 이의 대표적인 화가가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이고 그를 쏙빼닮은 후계자가 앵그르이다.
두 사람을 통해서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 예술에는 불순한 동기를 남겨 본래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가 어떻게 왜곡되며,
정치에는 놀라운 선전 효과를 주어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게 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술과 정치의 만남은 정치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시작되었다.

다비드를 최고 화가로 만든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2년 프랑스 정부는 34살의 다비드에게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그릴 것을 의뢰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왕국 사람들이다.
로마왕국이 이웃의 알바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집안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8세기의 걸작으로 미술사에 올랐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제 모델을 사용하여 그린 것이며, 옷의 주름은 마네킹에 걸친 옷을 보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다비드는 장인에게서 명검과 명투구 등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품들을 구입하여 오브제로 사용했다. 신고전주의란 고전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는 것 외에도 모델의 의상과 실내 그리고 그림에 사용되는 오브제들이 당대의 것들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이 작품을 치밀한 계산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화면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으며 사내들의 결연한 맹세와 의지와는 대조적으로 오른편에는 예고되는 비극으로 절망에 빠진 아낙들이 비탄에 빠져 있다.
다비드는 왼편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호라티우스 맏형의 왼쪽 다리를 스무 번의 드로잉 끝에 만족할 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오른편 사비나의 노란 의상과 배경은 다비드의 제자 드루아가 그렸는데 제자가 스승의 작품에 부분적으로 돕는 건 보통이었다.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는 메세지가 담긴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시민의 결속을 위한 고도의 의도와 계획에 의한 정치와 예술의 합작품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살롱전에 소개된 지 7년 후인 1789년 7월 14일 8~9백 명의 시민이 폭정과 억압의 상징으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무기와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 군대와 충돌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봉화가 올랐다.
소위 7월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혁명세력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시민의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려 처형했다.
이로써 왕은 하늘이 낸다는 전통이 사라졌고 시민 중에서 국가의 통치자가 선출되는 새로운 역사가 서양에서 처음으로 발생했고 이 공화국의 첫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다비드는 쟈코뱅 클럽 외에도 여러 혁명 단체에 깊이 참여했으므로 따라서 혁명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회화가 혁명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혁명에 있어 마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그는 시민에게 소크라테스에 비견될 정도로 정신적 대들보로서 ‘시민의 친구’로 불리었다.
그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오래된 왕정에서 민정으로의 이양은 민주를 바탕으로 한 큰 과업이었으므로 행동을 강조한 건 당연했다.
마라가 23살 난 처녀 샤로트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당파 집안 출신의 샤로트는 자신을 아시리아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 주디스에 비견하면서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한 그녀는 마치를 타고 카엥으로부터 11일 파리에 도착했으며 15cm 길이의 예리한 칼을 구입했다.
마라의 아파트로 갔지만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하곤 했다.
마라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8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리 준비한 칼로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그가 얼마나 혁명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그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그는 마라의 손에 편지가 쥐어져 있게 해 좀더 회화적 설명을 덧붙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793년 7월 13일: 마리 앤 샤로트가 시민 마라에게/ 당신의 친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정녕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다비드가 쓴 것이고 원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자유란 이름하에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전 불행하고 이는 당신의 보호를 요구하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황제옥좌의 나폴레옹>
로마대상을 수상하여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에 유학한 앵그르는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그의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이는 그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그가 선호한 모티프는 목욕하는 여인들의 다양한 동작이었다.
4년의 장학 기간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로마에 체류하면서 프랑스인의 초상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
1803년 리제 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1통령 보나파르트>를 그린 앵그르는 통령에서 황제로 즉위한 보나파르트를 그려 1806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다비드는 궁정화가로 나폴레옹을 직접 보고 그릴 수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렸다.
그는 스승이 그린 나폴레옹의 머리를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황제의 예복은 겉옷, 금색 레이스가 달린 비단 허리띠, 검뿐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매우 좋아한 로마 황제의 현란한 모습이 일부 적용되어 복잡한 금색의 사용과 담비 모피가운과 벨벳이 사용되었다.
이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의 발 아래 카페트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이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터키의 후궁 <그랑드 오달리스크>
앵그르는 색을 칠하기 전 드로잉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회화에서 드로잉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크게 보았다.
그러나 1814년에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보면 그에게 색에 대한 절묘한 감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말로 ‘후궁’이란 뜻이다.
앵그르는 오리엔탈 비너스의 사지를 꽃잎처럼 부드럽고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고 그곳을 여행한 유럽인들이 쓴 기행문과 책자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후궁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는 라파엘로를 거의 숭배할 정도였지만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고전적 미의 이상이 구현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의 프랑스 여인의 몸의 비례, 무감동한 우아함, 차거운 느낌과 육감적 느낌이 섞인 낯설음은 우피지에 소장되어 있는 파르미지아니노가 1535년경에 그린 <긴 목을 한 마돈나>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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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 있어서 예술관의 기초로 기능하는 것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헤겔의 말에 주목하면서 적었다.
헤겔의 말에 대한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의 배후에는 그리스 이래의 서양적 사유가 놓여 있기 때문인데, 그러한 서양의 사유는 이미 발생한 존재자의 진리에 상응한다.
만약 이 말에 대한 결정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이러한 존재자의 진리로부터, 그리고 존재자의 진리를 넘어서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이 말은 효력이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명제가 말하고 있는 진리가 궁극적인 것인지, 그리고 만약 그러하다면 그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50)
헤겔에 있어서 예술관의 기초로 기능하는 것은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인데, “왜냐하면 예술미란 ‘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 미인 바, 정신과 그 산물이 자연과 그 현상들보다 높이 위치하는 만큼 예술미 역시 자연미보다 높기 때문이다.”
헤겔은 미술품을 다음 세 가지 규정 하에 파악한다.51)
1 미술품은 결코 자연의 산물이 아니며 인간의 활동을 통해 산출된다.
2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지며, 그것도 인간의 감성을 위하여 어느 정도이든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뽑아낸다.
3 그것은 자신 안에 목적을 지니고 있다.
쿨터만은 이런 세 가지 전제 하에 헤겔은 예술이 유한성의 내용과 형식들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감성적인 것과 현상하는 것 속에서의 절대(정신)의 현존이자 화해이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전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면서 헤겔의 말을 인용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감성적인 것은 예술에서 정신화된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것은 예술 속에서 감성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52)
헤겔은 미가 감각적 외관을 한 절대정신의 현현이라고 했는데 미를 관념의 현시로 본 옛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같아 폭넓게 받아들여졌고, 그의 이론은 유럽의 여러 나라로 알려졌다.
꾸쟁V. Cousin(1792-1867)은 “사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떤 관념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한 번 더 분명히 하기 위해 헤겔은 위대한 상에 호소했다.
우리가 인간의 모습에 대해, 짐승의 몸과는 달리 인간의 겉모습에서는 어디서나 생동하는 마음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예술에 대해서는 예술이 현상하는 것을 그 겉모습의 모든 지점에서 가시화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 따라서 예술에 대해서는, 내적 영혼과 정신성이 현상의 모든 지점에서 보여짐으로써 예술은 각각의 형태들을 천 개의 머리를 가진 거인으로 만들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53)
예술 안에 놓여 있는 목적에 관해 말했다.
“예술은 감성적 예술형상물의 형식 속에서 진리를 밝히며, 화해된 대립을 제시하도록 부름 받고 있으며, 그 자신 안에 있는 궁극목적을 이렇게 제시하고 밝히는 가운데 있다고 주장될 수 있다.”54)
쿨터만의 말대로 헤겔은 분명, 외적인 예술의 목적은 결코 예술의 본질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확신, 그리고 교훈, 순화, 개선, 영리, 명성과 명예를 위한 노력 등이 모두 외적인 예술의 동기로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되며, 예술적인 것의 본질에는 부적합하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헤겔학파의 사상가 피셔Friedrich Theodor Vischer(1807-87)가 예술에 의한 실재의 모방을 반박하는 글을 1846년에 출간한 『미학 Asthetik』에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예술의 목적은 결코 예술의 본질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헤겔의 미학을 구체적으로 해석한 느낌이다.
실재는 예술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피셔의 추론을 타타르키비츠는 다섯 항목으로 요약했다.
1 실재는 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2 실재가 조정되지 않는 무수한 물체들로 구성되어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상, 실재는 아름다울 수가 없다.
3 실재는 생의 과정에 종속되어 있고 미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고 있으므로 아름다울 수가 없다.
4 만약 실재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이고 비영구적인 미이다.
5 실재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가 미학자의 눈으로 실재를 주목하기 때문인 것이다.55)
피셔는 예술의 목적이 미를 창조하는 것, 즉 실재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예술이 실재의 모방이라는 오래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타당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피셔는 인간의 욕구에 맞춰진 인간적인 미를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목적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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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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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그룹전에서 호평을 받은 고갱은 고무되어 좀더 회화에 열중할 계획으로 1886년 7월 중순 대서양이 바라보이는 브르타뉴의 작은 항구 퐁타방으로 갔습니다.
조그만 항구 마을 퐁타방은 매우 원시적인 곳으로 인구가 1,51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퐁타방에서는 농업, 제분업, 어업 등이 소규모로 이뤄졌으며 1860년대 이후 경제적 수입은 그 지역을 찾는 관광객이나 작가들의 숙식 제공에 의존했습니다.
고갱은 캥페를레 인근의 촌락이면서 바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퐁타방의 여행자집’으로 알려진 메종 글로아느 여인숙에 묵었는데,
그곳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던 곳으로 보나의 제자 샤를 라발도 묵고 있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와 메이어 드 한을 만난 것도 이 여인숙에서였으며 나중에 그는 그곳으로 여행 온 폴 세뤼지에도 만났습니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이라서 약 20년 전부터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을 위해 이 지역에서 발행한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퐁타방에는 브르타뉴의 어떤 마을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개성있는 전통의상을 고수하므로 화가들의 모델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또 부수입이 생겨 아주 좋아합니다.

고갱은 파리에서와 달리 가난을 절실히 느끼지 않아도 되는 퐁타방을 고향처럼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에게서 ‘종합’이란 말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종합이란 자연을 덜 모방하는 걸 의미했습니다.
종합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추상과 같은 의미이며 사물을 덜 모방하는 데서 추상이란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종합이란 그의 말에는 사물의 형태를 축소시키는 기교와 밝은색을 사용하여 사물을 단순하게 정렬시킨다는 뜻도 내포되었습니다.

그는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주로 그리면서 피사로, 세잔, 드가로부터 익힌 화법들을 두루 응용해 독창적인 기법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형식과 기법을 발견하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음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스스로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해야 했습니다.
그는 <브르통의 네 소녀>를 그리고 이 작품을 위한 습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1880년대 브르통 소녀들이 이런 전통의상을 늘 입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녀들에게 돈을 주고 전통의상을 입고 모델이 되게 한 것입니다.

10월 중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자신과 클로비의 생계를 위해 도예가 에르네 샤플레와 함께 도자기를 제작했습니다.
퐁타방으로 가기 전에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을 통해 알게 된 샤플레는 일본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도예를 되살리는 일에 전념한 유명한 도예가였습니다.
파리에서 이미 도자기를 제작하던 고갱은 샤플레를 만나자 더욱 도자기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 페루를 점령하기 전 원주민들이 제작해 사용한 원시주의 조각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원시주의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를 장식하면서 불에 구울 때 색이 섞이지 않도록 인물과 사물의 윤곽에 선을 그려넣었고 형상을 가능하면 단순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시주의 도자기가 파리 사람들에게 낯설음과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습니다.
그는 에나멜로 광택이 나도록 장식했고, 또 가장자리를 다른 색으로 테를 둘러 장식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기 화병에는 전통의상을 한 퐁타방 처녀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도자기를 미술품으로 취급하기를 꺼려하자 고갱은 이에 대해 항변했습니다.

도자기를 빚는 것은 한가로운 여흥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도자기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늘 아꼈던 물건이다.
신은 한 줌 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
한 줌 흙으로 우리는 귀중한 돌을 만들 수 있다.
한 줌의 흙과 한 줌의 재주로 말이다!

고갱이 제작한 많은 단지들은 전통적인 소박한 모델이고 그 외의 것들은 환상적이며 손잡이가 크고 장식적이었습니다.
공통점이 없이 다양한 형상을 한 이런 단지들은 페루의 전통단지를 상기하게 하지만 아름다움은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실용성을 늘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들입니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페루·멕시코·로마 양식의 단지들이 많이 그려져 있어 그가 다양한 이국적 단지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또한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파리 오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한 댄서들을 장식해 사변적으로 부조화의 미를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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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예술철학 - 베를린 1823년 강의. H. G. 호토의 필기록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한동원.권정임 옮김 / 미술문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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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예술철학』


하인리히 구스타프 호토Heinrich Gustav Hotho는 1835-38년에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를 출간했는데 헤겔의 강의내용들을 묶은 것으로 헤겔은 사망하기 3년 전 1828년까지 강의했다.
헤겔의 말이 『미학강의』에 적혀 있다.

이러한 대상에 대하여 미학이라는 이름은 본래적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미학’은 감성, 느낌의 학문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새로운 학문이며 비로소 철학의 한 분과로 되어야 할 어떤 것인 한, 미학은 그 근원을 당시의 볼프학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독일인들은 미술품을 그것이 산출해내는 느낌, 예컨대 공포나 동정과 같은 느낌에 입각해서 관찰했다.46)

헤겔은 ‘미학’이란 말을 처음 학문으로 사용한 바움가르텐의 이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미학이란 개념은 받아들였다.
그는 『미학강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미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갓된 명칭으로서의 그 말은 우리에게 별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보편적 언어가 되어버려 명칭으로서 사용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학문에 적합한 본래적 표현은 ‘예술철학’이며, 더욱 정확하게는 ‘아름다운 예술의 철학’이다.”47)

『미학강의』 서문에서 그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표현의 전체 구조 속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말을 남겨놓았는데, 그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확실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48)
그는 보편적 관점 그리고 특수한 것들을 규제하려는 요구에 부응해서 보편적인 규정의 근거가 효력을 발휘하더라도 우리의 미적 관심의 대상들은 규정이 아니라 오히려 심정과 느낌의 것들로 보았다.
이를 그는 환상 속의 일반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 어떤 구체적 감성적 현상과 통일되어 보존된 것으로 설명했다.
“우리의 현재는 그 일반적 상황에서 본다면 예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에 따라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면서 헤겔은 계속해서 『미학강의』 서문에서 말했다.

이러한 모든 관련 속에서, 예술은 그 최고 규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에게는 과거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예술은 그 참된 진리와 생명력을 상실하였다.
또한 예술은 그 초기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더욱 고차적인 위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 속에 놓여졌다.
이제는 직접적인 향유 외에도 우리의 판단이 미술품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었다.
미술품의 내용과 표현매체, 그리고 양자의 적합성과 부적합성을 우리가 우리의 사유적 관찰에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의 학문은 예술이 예술로서 그 자체를 위한 충족을 충분히 보장받았던 시대보다도 우리 시대에 와서 훨씬 더 필요하게 되었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는 관찰로 이끄는 바, 그것도 예술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는 목적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이해한다는 목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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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예술


헤겔은 모든 예술이 자연적 상징주의에 흥미를 가지는 그런 커다란 의미로서가 아니라 상징이 구현이나 재현에 상반된다는 좁은 의미로서의 상징예술의 지각적인 형태가 예를 들면 사자가 용기를 상징하듯, 새가 영혼을 상징하듯, 또는 신비스러운 존재이지만 신의 현존을 사원이 상징하듯 이성적인 내용을 간과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단순히 상징할 뿐인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자의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적절한 표현을 찾는 것인데 어떤 것도 아직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예술에서 지각적인 것들은 그것들 자체들을 떠나서 수수께끼와 같고 신비스럽기만 한 합리성을 가리키며, 종종 숭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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