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 중에서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과 제자 앵그르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고상한 이상과 순수 이미지의 재활이 르네상스시대에 발생했고, 18세기 말부터 이런 양식이 다시금 두드러졌는데,
신고전주의로 불리우는 이의 대표적인 화가가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이고 그를 쏙빼닮은 후계자가 앵그르이다.
두 사람을 통해서 예술과 정치의 만남이 예술에는 불순한 동기를 남겨 본래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가 어떻게 왜곡되며,
정치에는 놀라운 선전 효과를 주어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게 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술과 정치의 만남은 정치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시작되었다.

다비드를 최고 화가로 만든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2년 프랑스 정부는 34살의 다비드에게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그릴 것을 의뢰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왕국 사람들이다.
로마왕국이 이웃의 알바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 집안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 집안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8세기의 걸작으로 미술사에 올랐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실제 모델을 사용하여 그린 것이며, 옷의 주름은 마네킹에 걸친 옷을 보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다비드는 장인에게서 명검과 명투구 등 고대인이 사용하던 소품들을 구입하여 오브제로 사용했다. 신고전주의란 고전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는 것 외에도 모델의 의상과 실내 그리고 그림에 사용되는 오브제들이 당대의 것들로 묘사해내는 것이다.
이 작품을 치밀한 계산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화면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으며 사내들의 결연한 맹세와 의지와는 대조적으로 오른편에는 예고되는 비극으로 절망에 빠진 아낙들이 비탄에 빠져 있다.
다비드는 왼편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호라티우스 맏형의 왼쪽 다리를 스무 번의 드로잉 끝에 만족할 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오른편 사비나의 노란 의상과 배경은 다비드의 제자 드루아가 그렸는데 제자가 스승의 작품에 부분적으로 돕는 건 보통이었다.
개인의 비극을 극복하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는 메세지가 담긴 이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을 앞두고 시민의 결속을 위한 고도의 의도와 계획에 의한 정치와 예술의 합작품이다.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살롱전에 소개된 지 7년 후인 1789년 7월 14일 8~9백 명의 시민이 폭정과 억압의 상징으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무기와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 군대와 충돌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봉화가 올랐다.
소위 7월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혁명세력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시민의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려 처형했다.
이로써 왕은 하늘이 낸다는 전통이 사라졌고 시민 중에서 국가의 통치자가 선출되는 새로운 역사가 서양에서 처음으로 발생했고 이 공화국의 첫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공화국을 위한 제단화 <마라의 죽음>
다비드는 쟈코뱅 클럽 외에도 여러 혁명 단체에 깊이 참여했으므로 따라서 혁명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회화가 혁명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혁명에 있어 마라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그는 시민에게 소크라테스에 비견될 정도로 정신적 대들보로서 ‘시민의 친구’로 불리었다.
그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이 확립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오래된 왕정에서 민정으로의 이양은 민주를 바탕으로 한 큰 과업이었으므로 행동을 강조한 건 당연했다.
마라가 23살 난 처녀 샤로트에 의해 1793년 7월 13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당파 집안 출신의 샤로트는 자신을 아시리아 장군 홀로 페르네스를 죽인 유대인 여자 영웅 주디스에 비견하면서 마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왕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한 그녀는 마치를 타고 카엥으로부터 11일 파리에 도착했으며 15cm 길이의 예리한 칼을 구입했다.
마라의 아파트로 갔지만 아내 시몬느 에브라르가 안으로 들이지 않자 신문 파는 사람이 시몬느를 성가시게 구는 사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터번을 두르고 식초를 탄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해야 했으므로 목욕탕에 조그만 탁상을 놓고 그곳에서 집무하곤 했다.
마라는 샤로트에게 반혁명분자들이 누구냐고 물었고 샤로트가 국민공회의 대의원 8명이라고 답하자 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그녀는 반혁명분자의 이름을 적었고 마라가 그들은 파리에서 단두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리 준비한 칼로 마라의 심장을 찔렀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그가 얼마나 혁명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를 말해주며 양식과 독창성에 빼어남을 알게 해준다.
그가 묘사한 마라는 예수 외에도 고대의 죽어가는 영웅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의한 명암이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마라의 모습을 더욱 미화시킨다.
그는 마라의 손에 편지가 쥐어져 있게 해 좀더 회화적 설명을 덧붙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793년 7월 13일: 마리 앤 샤로트가 시민 마라에게/ 당신의 친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정녕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다비드가 쓴 것이고 원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자유란 이름하에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전 불행하고 이는 당신의 보호를 요구하는 충분한 이유입니다.”

<황제옥좌의 나폴레옹>
로마대상을 수상하여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에 유학한 앵그르는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그의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이는 그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그가 선호한 모티프는 목욕하는 여인들의 다양한 동작이었다.
4년의 장학 기간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로마에 체류하면서 프랑스인의 초상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
1803년 리제 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1통령 보나파르트>를 그린 앵그르는 통령에서 황제로 즉위한 보나파르트를 그려 1806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다비드는 궁정화가로 나폴레옹을 직접 보고 그릴 수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렸다.
그는 스승이 그린 나폴레옹의 머리를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황제의 예복은 겉옷, 금색 레이스가 달린 비단 허리띠, 검뿐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을지라도 앵그르는 그의 위상을 나타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인 사건을 표현해야 했는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연히 고전에서 아이디어를 구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매우 좋아한 로마 황제의 현란한 모습이 일부 적용되어 복잡한 금색의 사용과 담비 모피가운과 벨벳이 사용되었다.
이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주피터의 모습을 방불케 했는데 주피터의 독수리가 나폴레옹의 발 아래 카페트에 디자인된 것만 봐도 주피터를 염두에 두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위상이 로마제국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샤를막느의 뒤를 이은 황제라고 믿었는데 샤를막느는 9세기 로마 황제이면서 프랑크족의 왕으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중앙 유럽의 전지역을 통치한 사람이었다.

터키의 후궁 <그랑드 오달리스크>
앵그르는 색을 칠하기 전 드로잉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회화에서 드로잉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크게 보았다.
그러나 1814년에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보면 그에게 색에 대한 절묘한 감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말로 ‘후궁’이란 뜻이다.
앵그르는 오리엔탈 비너스의 사지를 꽃잎처럼 부드럽고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고 그곳을 여행한 유럽인들이 쓴 기행문과 책자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해서 후궁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는 라파엘로를 거의 숭배할 정도였지만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고전적 미의 이상이 구현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의 프랑스 여인의 몸의 비례, 무감동한 우아함, 차거운 느낌과 육감적 느낌이 섞인 낯설음은 우피지에 소장되어 있는 파르미지아니노가 1535년경에 그린 <긴 목을 한 마돈나>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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