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앤디 워홀의 우상 마르셀 뒤샹


당시 뉴욕 화단에서 마르셀 뒤샹의 위치는 대단했다.
20세기 예술의 개선자라 할 만한 그의 명성은 1913년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소개한 후 더욱 높아졌다.
1915년 뉴욕 다다를 창설하면서 미국미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뒤샹은 불가해한 예술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재능있는 예술가들은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워홀도 그런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케이지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뒤샹은 워홀에게도 우상이었다.

1911년에 그린 〈커피 분쇄기〉(그림 12)는 나중에 그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그림 20)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 〈기차 안에 있는 슬픈 젊은이〉(1911)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그림 13)를 그리면서 사실주의 회화방법을 버리기 시작했다.
〈기차 안에 있는 슬픈 젊은이〉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그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12년 1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완성해서 그해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전시를 거절당했다.

뒤샹은 뮌헨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며 〈즉석에서 누드들에 둘러싸인 왕과 왕후〉(1912)를 비롯해 〈처녀〉의 드로잉 2점과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신부〉(그림 14)를 그리기 시작했고 〈독신자들에 의해서 벌거벗겨지는 신부〉(그림 15)의 드로잉도 그곳에서 한 것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에서 뒤샹은 인간의 유기적 신체를 기계의 모양으로 바꾸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신체와 성적 행위를 자동화했다.
뒤샹은 〈신부〉를 1912년에 친구예술가 프란시스 피카비아에게 주었는데 피카비아는 이 작품을 시인 폴 엘뤼아르에게 팔았거나 딴 그림으로 바꾸었다.
또 엘뤼아르는 그 작품을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소장한 다른 그림과 바꾸었고 브르통은 그것을 1934년에 뉴욕의 예술품 중개상 줄리앙 레비에게 팔았는데 지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2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움직임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화가 난 뒤샹은 이 작품을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에 출품하면서 뉴욕에서 활동하게 된다.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열린 아모리 쇼는 순회전으로 다른 도시에서도 개최되었다.
이때의 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소개하는 첫 대규모 전람회였기 때문에 미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전람회를 관람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티스의 그림 앞에 서서 예술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지 왜곡시키거나 사물을 일그러뜨려서는 안 된다는 전근대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샹은 가장 화제의 인물로 부상했으므로 조국에서 얻지 못한 영광을 미국에서 얻게 된 것이다.

1946년 모마의 책임자 제임스 존슨 스위니와의 인터뷰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인 1915년 나의 작업은 형태를 부수는 것으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선을 따라 형태를 분해하듯이 그렇게 작업했다.
그러나 나는 방법을 좀더 진전시키고 싶었고 더욱 진전시켜 아주 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였으며 결국 그것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로 진전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아이디어는 1911년 쥘 라포르그의 시를 위한 삽화를 드로잉하면서 비롯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미래주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그림은 1912년 1월 베른하임 준(Bernheim Jeune) 화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첫 전람회가 열렸던 무렵에 그린 것이지만 이미 1911년에 이 작품의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세베리니를 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작업에만 몰두했고 형과 함께 작업했다.
… 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게 된 동기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동력주의를 암시하는 관심이나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이 시사하는 것보다는,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형태분해에 대한 관심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나의 목표는 운동의 정지상태를 재현하는 것으로…… 회화를 통해 시네마 같은 결과를 나타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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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갔다.
파리에서 일 년 반 지내면서 파리의 화가들과 불화했고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남쪽의 빛이 더욱 찬란한 곳에서 창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톤 모베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반 고흐는 헤이그에서 한때 모베로부터 수학했는데,
헤이그 화파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모베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꾸밈 없는 진솔한 주제 예를 들면 해변의 모래언덕, 강변의 낮은 풀밭, 바닷가 등을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밝고 은빛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는 반 고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이었던 반 고흐는 모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밀레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때부터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프랑수아 밀레는 초기에 전통적인 신화와 일화, 그리고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전원의 장면들을 그리고부터 이러 장르에 집착했으며 농부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농부들의 우수적인 장면들을 강조했으며, 들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전원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농부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안주했으며 말년에는 그곳 바르비종 화파의 리더이자 가까운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밀레는 가난 속에서 생활했으며 오십이 된 1860년대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드로잉들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 외에도 조르주 쇠라와 카미유 피사로가 멜레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모베의 타계소식은 반 고흐로 하여금 초자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과 영원에 대한 사고가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의 상징주의로 나타났다.
1888년 6월 몇 주 동안 그는 이 작품에 전념하면서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던 영원”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며, 이런 문제는 185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적 최대 이유였음을 지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 중순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된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밀레의 주제에 들라크루아의 암시적 색을 응용했다.
또한 태양과 태양의 빛남을 주로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들에는 보색인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거칠게 남아 있도록 두텁게 칠했다.
옥수수를 모두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게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려넣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은 실재 모습이 아니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이제 막 일주일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작업을 마쳤다.
옥수수 밭과 풍경,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경작하는 들판, 지평선까지 보랏빛이 뭉실뭉실한 밭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타작한 후의 옥수수 밭을 지평선에 닿도록 했다.
지평선 끝에 작열하는 노란 태양과 노란 하늘을 그려넣었다.
그림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반 고흐는 화가가 자연과 알 수 없는 영원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신성 전체를 환기시키는 특권과도 같은 신성한 힘이 화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의 표현적 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 자신은 자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자연 혹은 신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화가로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자마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회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그도 가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삶을 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가 되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목사에 비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동일한 직업이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를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데 전념했는데, “갈망하는 영원”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자연과 영원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요람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영원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런 그의 사고가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 안에서 “이상과 추상”으로부터 “가능성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의 첫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흐는 6월에 그린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성을 달리 해서 10월에 다시 그렸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달리 구성했는데, 배경을 보면 알필레와 폐허가 된 몽마주르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말로 “작고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는 요소가 없고 열심히 공을 들여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그리면서 신속하고 자신감을 갖고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그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밀레의 농부와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면서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들라크루아의 노란색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하늘의 별처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매력적이라고 감탄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그는 테오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하겠다고 적었으며, 베르나르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도 종교화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적 힘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창조 행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는 예수 자신을 “순수한 창조력”을 가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현대적 상징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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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뒤샹은 예술과 무관한 것을 예술과 접목시키면서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터로 나가야 했지만 건강이 나빠 징집이 면제된 뒤샹은 대규모 학살 전쟁을 저지르고야마는 인간 이성을 비웃는 작품들로 전통미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1914년 병 말리는 기구를 사서 〈병걸이〉(그림 16)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궤변을 폈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미 만들어진(Ready Made)’ 물질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예술가의 창조 행위를 제작에 한정하지 않고 발견 또한 창조적인 행위임을 역설했다.
뒤샹은 〈큰 유리〉(그림 20)에 관한 글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것들은 미학적 유쾌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 무관심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좋거나 나쁜 데 대한 감각을 완전히 배제한 완전한 마취였다.”

역시 그에 의해 예술품으로 선택된 피라미드처럼 생긴 다섯 층의 컵걸이는 지금 파리의 퐁피두센터 천정에 매달려 있다.
이처럼 뒤샹은 예술과 무관한 것을 예술과 접목시키면서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등급에 혼란을 야기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물질을 소개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예술에 대한 선입견에 반발하면서 피카비아의 “예술은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바램 이상은 아니다”라는 견해에 동조했다.
뒤샹이 기계생산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11년부터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나는 상점의 유리창을 통해 실제로 초콜릿을 가는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보고 그 장면에 매료되어 초콜릿 가는 기계를 나의 출발로 삼았다.”

실제 기계에서 영감을 받아 1913년 〈초콜릿 분쇄기〉를 그렸는데 남자의 마스터베이션을 상징하는 그림이기도 했다.
같은 해 자전거 바퀴를 사용한 움직이는(Kinetic) 조각 〈자전거 바퀴〉(그림 17)를 소개했다.
자전거의 앞바퀴를 둥근 의자 위에 조립한 것으로 바퀴를 밀면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조각에 운동을 포함시켰으며 의자와 바퀴를 연결하여 그것들과 무관한 새로운 형태로 만들면서 물질보다는 아이디어에서 미학을 찾으려고 했다.
원래의 작품은 없어지고 나중에 만들어진 모조품이 지금 퐁피두센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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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서양화에 대한 일본화의 영향


일본화는 1800년대 중반의 유럽 예술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주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일본 공예품, 의상, 판화 사본들은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으며, “일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마치 일본이 미술의 폭탄을 파리에 떨어뜨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모노를 입는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화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가 프린트의 발달로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구입해 수집했다.
빈센트 반 고흐(1853~90)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 화가들의 화풍과 구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꽃이 핀 오얏나무>와 <비 오는 날의 다리>를 모사했다.
그가 1888년 4월에 그린 <꽃이 만개한 배나무>는 <꽃이 핀 오얏나무>를 응용하여 그린 것이며, 한 해 전에 그린 수채화 <람파르 근처 거리>는 <비 오는 날의 다리>를 응용하여 대각선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가 1890년에 그린 <꽃핀 아몬드나무>도 일본화의 영향 하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 말에 <이탈리아 여인>을 그렸는데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모델은 카페 탬버렝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로 보이며, 여인의 넓적한 코와 큰 입술, 그리고 카네이션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본화의 영향으로 여인의 성격을 나타내기보다는 장식적으로 그리면서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색들을 사용했다.
그림이 평편하게 나타난 것과 화면 위와 오른편 장식은 일본화의 영향이다.

1888년 여름 반 고흐가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일본 미술은 본토에서는 쇠퇴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87년 2~3월 카페 탬버렝에서 일본 화가들의 판화 전시회가 열렸을 때 반 고흐도 관람했다.
이 카페는 1885년 4월에 개점했다.
클리시 대로에 있는 이 카페의 여주인은 과거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아고스티나로 반 고흐의 애인이 되었다.
친구들의 말로는 반 고흐가 이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작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반 고흐는 예술가들이 주로 출입하는 이 카페를 자신이 모사한 일본 판화들로 장식했다.
그는 아고스티나의 초상을 <카페 탬버렝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오른편 가장자리 벽에 일본화가 걸려 있다.
그가 1887~88년에 그린 <페레 탕기의 초상>의 배경에도 일본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반 고흐가 탕기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린 것들다.
탕기는 클로젤에 미술품 재료를 파는 상점을 갖고 있었고 그곳은 화가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1841~1926)도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1876년에 <일본 소녀>를 그렸다.
실재 사람의 크기로 그린 이 작품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다.
카미유가 입고 있는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 여인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이다.
반 고흐가 1887년에 모사한 <고급매춘부(기생)>(열린미술관 174)의 포즈가 방향만 다를 뿐 모네의 <일본 소녀>와 유사하다.

모네는 이 작품을 포함하여 18점을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다.
전시회는 1876년 4월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에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그리고 홍일점 여류화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다.

에두아르 마네(1832~83)가 1868년에 그려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에밀 졸라의 초상>은 자신의 작품에 호평해준 졸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에 걸려 있는 일본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이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벽을 장식한 그림들과 책상 위의 잡다한 의도적으로 올려놓은 오브제들을 통해 마네의 회화적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은 <라 지롱드>(1868.6.9)에 살롱전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이 작품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평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적 화법을 사용했을 뿐 작품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오브제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화의 영향은 마네에게도 두드러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에서도 일본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마네를 포함하여 유럽 화가들은 일본 판화를 연구하면서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거리의 가수>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거리의 가수>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여가수를 묘사한 작품으로 살롱전에 받아들여졌다.
마네는 화실 근처 프티트폴로뉴 동네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림의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다.
빅토린은 마네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여가수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빅토린은 기타를 든 손으로 땅까지 닿는 기다란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렸고 버찌를 입가에 대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는데 입가의 붉은 버찌가 왼손에 들고 있는 노란 종이, 갈색, 회색, 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가 되었다.
배경을 어둡게 하여 빅토린의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는데 이런 점은 마네 작품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로서 그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이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유럽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작품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작품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화의 영향은 고갱의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하는 데서도 발견되며,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한 데서 그가 일본 화가들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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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탈 미술관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관해 강의해달라는 청을 받고 응한 것입니다.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 by Arthur Danto(1997)

Danto: <The End of Art>(1984), <Approaching the End of Art>(1985)
Hans Belting: <The End of the History of Art?>(1983) 의문부호를 빼고 1995년에 다시 출간

1984년 10월부터 단토는 <Nation>지에 미술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고 미술비평을 쓴다는 것에 대해 주제의 결핍 때문에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미술의 제작이 중단될 것이란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벨팅이 말한 대로 예술의 시대 이전에 무수한 예술이 만들어진 것처럼 예술의 종말 이후에도 예술은 무수히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예술이 존재하는 한 비평가로서 쓸 수 있는 예술은 여전히 풍부하다.

단토가 예술철학에서 다룬 것이 무엇인가?
예술작품의 개념과 예술작품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결국 그가 말한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칸트가 지적 탐구의 영역을 진, 선, 미, 즉 과학적, 도덕적, 미학적 영역으로 세분하고부터였다.
18세기에는 철학적 관심이 예술작품의 '유일성‘을 밝히는 데 있었고, 19세기에는 예술작품을 통해 얻게 되는 ’미적 경험‘의 본질과 예술작품이 창작된 과정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생겼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예술작품에 대한 유일성에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예술에 관한 이론들에 대한 탐색이 진행되었다.
예술철학은 예술에 관한 담론을 전제로 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내포한다. 오늘날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객관적 존재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는 언어로서의 인지주의적cognitivist 관점.
2.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표현주의적expression!ist 관점.
3.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제품으로서의 형식주의적formalist 관점.
4. 제도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정해진 것으로서의 제도주의적institutionalist 관점.
그러나 이 네 가지 정의 모두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하지 못하므로 철학적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단토는 우선 Modern art와 Contemporary art를 구분한다.
예술의 종말이란 철학적으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는 플라톤 이후 서구의 지배적인 오래된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Modern art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는 Post-Modern이란 말이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예술의 종말 이후’ 혹은 Contemporary란 말을 사용한다.

Post-Modern은 양식인가 시기인가?
우리가 ‘포스트모던 회화' ‘포스트모던 영화’라고 말할 때는 포스트모던이 양식을 가리키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할 때는 시기를 지칭한다.
현재 포스트모던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영국계 미국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ks(1939~)는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 혼합,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라고 했다.
그는 After(Post) Modernism의 어의를 서술했을 뿐 Modernism을 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더니즘의 무엇을 계승 초월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춘향전은 춘향이와 이몽룡이 결국 서로의 사람됨됨이를 이해하고 깨달은 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종료한다.
이런 자각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남은 생애의 첫 번째 날이 되는 것이다.
Contemporary는 바로 이 자각의 시기이다.
현재가 어떤 위대한 이야기에 더 이상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디엔가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모던과 컨템퍼러리 미술의 차이이다.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이 없으며 모던하고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과거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품들로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 찬 장소로 여긴다.

Modern이 단지 just now를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듯이 contemporary도 지금 이 순간에 발생하고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모던은 1880년경부터 1960년대 어느 때까지 번성했던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지만 contemporary는 예술제작의 한 양식이 아니라 양식들을 사용하는 하나의 양식을 말한다.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승화되어 식별능력을 계발하는 토대로 이용될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양식적 통일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사실상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contemporary는 정보 혼란의 시대, 완전한 미적 정보 전달에 대한 효율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완전한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어떠한 역사의 경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단토는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를 탈역사적post-historical 혹은 역사 이후의 미술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1960년대는 양식들의 발작기였으며 ‘한갓된 실재 사물’이라 부르는 것과는 대조되게 특별나게 보여야 하는 특별한 방식이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사실주의자들과 팝아트를 통해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 외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개념미술은 시각예술품이 되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는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술은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작품은 “왜 나는 미술작품인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94)
아트 스튜던츠 리그와 시러큐스 대학에서 수학했고 전업 저술가가 되기 전에 미국 세관에 근무했다.
1942~49년 <네이션 Nation>지의 미술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초기에는 마르쿠스주의에 심취하여 계급 의식과 목적 의식을 지니는 강한 역사 감각을 가졌으며 미술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관심을 두었으나 후에는 비평에 있어 형식주의를 취했다.
그는 각각의 예술에는 ‘순수’를 향한 충동, 즉 다른 장르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하는 충동이 있으며 회화에서의 이 충동은 표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환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44년 4월 15일 <네이션>에 기고한 <추상 미술 Abstract Art>이란 제목의 글에서 “회화가 색채와 선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성질에만 국한되도록, 그리고 미술 이외의 다른 곳에서 더욱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연계되어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하지 않게 하라”고 주문했다.
그린버그의 영향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의 비평집은 미학 교과서로 간주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비평은 모더니즘 이론의 한 유형으로 오늘날에까지도 읽혀지고 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을 순수하게 시각적 경험과 관련된 지속적이며 자기 비평적 전통으로 인식했다.
그는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보았으며 사실상 파리와 뉴욕을 제외한 곳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을 무시했다.
그는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 Modernist Painting>(1960)에서 평편한 표면으로서의 회화의 물리적 성질을 인식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린버그는 과거 화가들이 회화 매체를 구성하는 평면적 한계를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한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에서는 이 같은 한계를 긍정적인 요소로 인식했으며 마네는 표면 아래의 평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관람자들은 옛 거장의 작품을 접할 때 작품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모더니스트 회화는 우선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옛 거장의 그림과 모더니스트 회화에 상관없이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그것만이 유일하고 필요한 방법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서 거둔 모더니즘의 성공은 자기비평의 성공이다.”

이를 두고 많은 미술사가들은 모더니즘의 비평적 입장을 전형화한 말이라고 동조한다.
그린버그는 말했다.

“모더니즘은 결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모더니즘 미술은 어떠한 단절이나 충돌 없이 과거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이 말에서 그가 미술사를 발전 또는 진보의 과정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단토는 그런 미술사관을 부정한다.
그린버그는 Kinetic art와 Pop art처럼 자신의 비평적 틀에 적당하지 않은 혹은 발전적이지 않은 미술 운동을 ‘진기한 미술 novelty art’로 제쳐두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 엘리트주의로 보았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엘리트 예술가들에 의해서 대중 미술보다 한층 격이 높은 미술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이는 곧 모더니즘이 소수 지성인들의 미술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미술이 소수 지성인들의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 방법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현상을 가리켜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지성인들을 위한 미술에서 대중을 위한 미술로의 전이를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이로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팝아트는 고급 미술과 대중문화 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곰브리치와 그린버그의 추종자들은 팝아트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퇴행적 미술운동으로 보고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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