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앤디 워홀의 우상 마르셀 뒤샹


당시 뉴욕 화단에서 마르셀 뒤샹의 위치는 대단했다.
20세기 예술의 개선자라 할 만한 그의 명성은 1913년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소개한 후 더욱 높아졌다.
1915년 뉴욕 다다를 창설하면서 미국미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뒤샹은 불가해한 예술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재능있는 예술가들은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워홀도 그런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케이지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뒤샹은 워홀에게도 우상이었다.

1911년에 그린 〈커피 분쇄기〉(그림 12)는 나중에 그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그림 20)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 〈기차 안에 있는 슬픈 젊은이〉(1911)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그림 13)를 그리면서 사실주의 회화방법을 버리기 시작했다.
〈기차 안에 있는 슬픈 젊은이〉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그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12년 1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완성해서 그해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전시를 거절당했다.

뒤샹은 뮌헨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며 〈즉석에서 누드들에 둘러싸인 왕과 왕후〉(1912)를 비롯해 〈처녀〉의 드로잉 2점과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신부〉(그림 14)를 그리기 시작했고 〈독신자들에 의해서 벌거벗겨지는 신부〉(그림 15)의 드로잉도 그곳에서 한 것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에서 뒤샹은 인간의 유기적 신체를 기계의 모양으로 바꾸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신체와 성적 행위를 자동화했다.
뒤샹은 〈신부〉를 1912년에 친구예술가 프란시스 피카비아에게 주었는데 피카비아는 이 작품을 시인 폴 엘뤼아르에게 팔았거나 딴 그림으로 바꾸었다.
또 엘뤼아르는 그 작품을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소장한 다른 그림과 바꾸었고 브르통은 그것을 1934년에 뉴욕의 예술품 중개상 줄리앙 레비에게 팔았는데 지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2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움직임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화가 난 뒤샹은 이 작품을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에 출품하면서 뉴욕에서 활동하게 된다.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열린 아모리 쇼는 순회전으로 다른 도시에서도 개최되었다.
이때의 아모리 쇼는 유럽의 모더니즘을 소개하는 첫 대규모 전람회였기 때문에 미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전람회를 관람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티스의 그림 앞에 서서 예술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지 왜곡시키거나 사물을 일그러뜨려서는 안 된다는 전근대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아모리 쇼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샹은 가장 화제의 인물로 부상했으므로 조국에서 얻지 못한 영광을 미국에서 얻게 된 것이다.

1946년 모마의 책임자 제임스 존슨 스위니와의 인터뷰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인 1915년 나의 작업은 형태를 부수는 것으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선을 따라 형태를 분해하듯이 그렇게 작업했다.
그러나 나는 방법을 좀더 진전시키고 싶었고 더욱 진전시켜 아주 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였으며 결국 그것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로 진전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아이디어는 1911년 쥘 라포르그의 시를 위한 삽화를 드로잉하면서 비롯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미래주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그림은 1912년 1월 베른하임 준(Bernheim Jeune) 화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첫 전람회가 열렸던 무렵에 그린 것이지만 이미 1911년에 이 작품의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세베리니를 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작업에만 몰두했고 형과 함께 작업했다.
… 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게 된 동기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동력주의를 암시하는 관심이나 로베르 들로네의 그림이 시사하는 것보다는,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형태분해에 대한 관심에 더욱 가까운 것이었다.
나의 목표는 운동의 정지상태를 재현하는 것으로…… 회화를 통해 시네마 같은 결과를 나타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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