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서양화에 대한 일본화의 영향


일본화는 1800년대 중반의 유럽 예술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주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일본 공예품, 의상, 판화 사본들은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으며, “일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마치 일본이 미술의 폭탄을 파리에 떨어뜨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모노를 입는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화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가 프린트의 발달로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구입해 수집했다.
빈센트 반 고흐(1853~90)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 화가들의 화풍과 구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꽃이 핀 오얏나무>와 <비 오는 날의 다리>를 모사했다.
그가 1888년 4월에 그린 <꽃이 만개한 배나무>는 <꽃이 핀 오얏나무>를 응용하여 그린 것이며, 한 해 전에 그린 수채화 <람파르 근처 거리>는 <비 오는 날의 다리>를 응용하여 대각선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가 1890년에 그린 <꽃핀 아몬드나무>도 일본화의 영향 하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 말에 <이탈리아 여인>을 그렸는데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모델은 카페 탬버렝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로 보이며, 여인의 넓적한 코와 큰 입술, 그리고 카네이션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본화의 영향으로 여인의 성격을 나타내기보다는 장식적으로 그리면서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색들을 사용했다.
그림이 평편하게 나타난 것과 화면 위와 오른편 장식은 일본화의 영향이다.

1888년 여름 반 고흐가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일본 미술은 본토에서는 쇠퇴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87년 2~3월 카페 탬버렝에서 일본 화가들의 판화 전시회가 열렸을 때 반 고흐도 관람했다.
이 카페는 1885년 4월에 개점했다.
클리시 대로에 있는 이 카페의 여주인은 과거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아고스티나로 반 고흐의 애인이 되었다.
친구들의 말로는 반 고흐가 이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작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반 고흐는 예술가들이 주로 출입하는 이 카페를 자신이 모사한 일본 판화들로 장식했다.
그는 아고스티나의 초상을 <카페 탬버렝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오른편 가장자리 벽에 일본화가 걸려 있다.
그가 1887~88년에 그린 <페레 탕기의 초상>의 배경에도 일본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반 고흐가 탕기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린 것들다.
탕기는 클로젤에 미술품 재료를 파는 상점을 갖고 있었고 그곳은 화가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1841~1926)도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1876년에 <일본 소녀>를 그렸다.
실재 사람의 크기로 그린 이 작품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다.
카미유가 입고 있는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 여인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이다.
반 고흐가 1887년에 모사한 <고급매춘부(기생)>(열린미술관 174)의 포즈가 방향만 다를 뿐 모네의 <일본 소녀>와 유사하다.

모네는 이 작품을 포함하여 18점을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다.
전시회는 1876년 4월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에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그리고 홍일점 여류화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다.

에두아르 마네(1832~83)가 1868년에 그려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에밀 졸라의 초상>은 자신의 작품에 호평해준 졸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에 걸려 있는 일본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이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벽을 장식한 그림들과 책상 위의 잡다한 의도적으로 올려놓은 오브제들을 통해 마네의 회화적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은 <라 지롱드>(1868.6.9)에 살롱전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이 작품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평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적 화법을 사용했을 뿐 작품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오브제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화의 영향은 마네에게도 두드러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에서도 일본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마네를 포함하여 유럽 화가들은 일본 판화를 연구하면서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거리의 가수>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거리의 가수>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여가수를 묘사한 작품으로 살롱전에 받아들여졌다.
마네는 화실 근처 프티트폴로뉴 동네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림의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다.
빅토린은 마네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여가수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빅토린은 기타를 든 손으로 땅까지 닿는 기다란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렸고 버찌를 입가에 대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는데 입가의 붉은 버찌가 왼손에 들고 있는 노란 종이, 갈색, 회색, 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가 되었다.
배경을 어둡게 하여 빅토린의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는데 이런 점은 마네 작품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로서 그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이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유럽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작품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작품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화의 영향은 고갱의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하는 데서도 발견되며,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한 데서 그가 일본 화가들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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