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갔다.
파리에서 일 년 반 지내면서 파리의 화가들과 불화했고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남쪽의 빛이 더욱 찬란한 곳에서 창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톤 모베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반 고흐는 헤이그에서 한때 모베로부터 수학했는데,
헤이그 화파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모베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꾸밈 없는 진솔한 주제 예를 들면 해변의 모래언덕, 강변의 낮은 풀밭, 바닷가 등을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밝고 은빛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는 반 고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이었던 반 고흐는 모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밀레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때부터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프랑수아 밀레는 초기에 전통적인 신화와 일화, 그리고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전원의 장면들을 그리고부터 이러 장르에 집착했으며 농부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농부들의 우수적인 장면들을 강조했으며, 들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전원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농부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안주했으며 말년에는 그곳 바르비종 화파의 리더이자 가까운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밀레는 가난 속에서 생활했으며 오십이 된 1860년대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드로잉들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 외에도 조르주 쇠라와 카미유 피사로가 멜레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모베의 타계소식은 반 고흐로 하여금 초자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과 영원에 대한 사고가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의 상징주의로 나타났다.
1888년 6월 몇 주 동안 그는 이 작품에 전념하면서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던 영원”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며, 이런 문제는 185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적 최대 이유였음을 지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 중순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된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밀레의 주제에 들라크루아의 암시적 색을 응용했다.
또한 태양과 태양의 빛남을 주로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들에는 보색인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거칠게 남아 있도록 두텁게 칠했다.
옥수수를 모두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게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려넣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은 실재 모습이 아니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이제 막 일주일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작업을 마쳤다.
옥수수 밭과 풍경,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경작하는 들판, 지평선까지 보랏빛이 뭉실뭉실한 밭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타작한 후의 옥수수 밭을 지평선에 닿도록 했다.
지평선 끝에 작열하는 노란 태양과 노란 하늘을 그려넣었다.
그림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반 고흐는 화가가 자연과 알 수 없는 영원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신성 전체를 환기시키는 특권과도 같은 신성한 힘이 화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의 표현적 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 자신은 자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자연 혹은 신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화가로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자마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회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그도 가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삶을 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가 되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목사에 비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동일한 직업이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를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데 전념했는데, “갈망하는 영원”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자연과 영원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요람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영원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런 그의 사고가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 안에서 “이상과 추상”으로부터 “가능성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의 첫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흐는 6월에 그린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성을 달리 해서 10월에 다시 그렸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달리 구성했는데, 배경을 보면 알필레와 폐허가 된 몽마주르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말로 “작고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는 요소가 없고 열심히 공을 들여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그리면서 신속하고 자신감을 갖고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그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밀레의 농부와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면서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들라크루아의 노란색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하늘의 별처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매력적이라고 감탄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그는 테오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하겠다고 적었으며, 베르나르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도 종교화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적 힘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창조 행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는 예수 자신을 “순수한 창조력”을 가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현대적 상징으로 묘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