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각기 다른 박자와 속도로 성장한다>
『아동 미술치료 Child Art Therapy』, 주디스 아론 루빈(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19세기 이래 수많은 미술교육가, 발달심리학자 등의 전문가들이 아동의 정상적인 미술 발달 과정을 밝히고자 아동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정리해왔다.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연구 대상은 주로 도식적 그림 표현에 한정되어왔으며, 현재도 그런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회화와 더불어 점토 등의 조형적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자들이 늘고 있지만, 그 수는 아직 미미하며 그 방식도 중구난방이다.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미술치료사로서 미술 행동의 인지적, 정서적 면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미술 활동 과정과 더불어 결과물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미술 발달 단계 구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발달이 지연되거나 고르지 못한 아동들을 치료하면서 미술 발달의 시작점을 상세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아동의 정상적인 미술 발달 단계를 기존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구별한다. 드로잉, 회화, 소조, 조각 등에 모두 적용 가능하면서 발달 초기 단계를 상세하게 다루는 방식이다.
그녀가 고안한 단계는 다음과 같다. 조작manipulating, 형성forming, 명명naming, 표상representing, 내포containing, 시험experimenting, 통합consolidating, 친숙화naturalizing, 개인화personalizing 등이다. 주디스 아론 루빈은 현실에서 이 단계들이 자로 긋듯이 명확히 구별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매 단계는 겹치기도 하고, 어떤 특징은 몇 단계를 넘어가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고 한다. 예컨대 조작manipulating은 미술 재료를 사용할 때면 언제나 나타난다. 단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주된 초점이 다른 특성으로 향할 뿐이다.
각 단계는 각 시기별로 가장 중심적인 발달 양상을 나타낸다. 각 단계별 특징은 복합적이며, 다층적이고, 영속적이다. 따라서 단계 구별은 사실 편의를 위한 인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의 연속과정 중 두드러지는 특성들을 추린 후 시기별로 나눠 기술하고 개념화해놓은 것이다.
아이는 각기 다른 박자와 속도로 성장한다. 운동, 지각, 언어 등 모든 발달이 그러하며, 미술 발달도 마찬가지이다. 발달 속도나 양상은 환경적 요인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경우든 정상이라 여길 수 있는 평균 구간은 폭이 매우 넓다. 그래서 다른 관련 변수들을 참조하지 않은 채 그림만으로 발달 단계를 진단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
미술 발달의 첫 번째 단계는 재료를 조작manipulating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작 단계의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물질들을 통해 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경험하는 것이다. 물감이나 찰흙이 주는 느낌, 모래나 나무의 질감 등을 통해 감각기관이 발달하게 된다. 감각 발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운동신경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아이는 낙서를 하고, 모양을 만들며, 사물을 뒤섞어놓으면서 손과 팔, 온몸의 운동신경을 발달시켜간다. 찰흙을 주무르거나 크레용으로 낙서하는 유아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근육 및 운동 발달 정도가 미술 활동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찰흙을 찌그러뜨리거나, 종이에 흔적을 남긴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아이는 점점 그 경험의 시각적인 면에 흥미를 보이게 된다. 찰흙의 모양이나 낙서의 색에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만드는 과정이 아닌 자신이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두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단계의 아이는 아직 완성된 결과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개인별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대개 이 단계는 1세에서 2세까지 지속된다.
지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발달이 진전되면서 아이는 점점 스스로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게 되어간다. 그리고 찰흙이나 크레용을 이용해 점점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은 특정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손에 쥔 재료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 해당하는 2-3세의 아이는 세로 선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으며, 찰흙을 말고나 판판하게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은 의도에 따라 재료를 솜씨 있게 다루기 시작한다. 물방울무늬를 그리거나, 선을 긋거나, 쾅쾅 두드리거나, 꼭 쥐고 주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을 수만 있었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이제 아이들은 게슈탈트Gestalt, 즉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분리된 형태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단계의 아이들은 표상적인 표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도적인 형태를 만들 수 있다. 한 점에서 뻗어나가기 시작해 원래의 점에서 끝나는 선, 즉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는 큰 발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독립된 형태를 만들고, 그것을 선이나 형태와 연관 지을 수 있다. 개인별 편차가 크지만 대개 이 단계는 2세에서 3세 사이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