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매너리즘의 정의의 역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Mannerism(Manierismus)이다.
매너리즘은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였으며 자연주의, 즉 ‘소박한 독단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미술 양식을 말한다.
고전기 이후의 미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에 의한 미술품 제작을 거장의 양식을 노예적으로 모방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이런 사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반니 벨로리의 저서 『안니발레 카라치 전기』에서였다.
바사리가 사용한 ‘마니에라 maniera’란 말은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개인적 혹은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으로 넓은 의미로는 양식style이다.
즉 ‘마니에라’는 유사한 예술작품의 바람직한 성격을 뜻하는 ‘우아함’이라는 말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니에라 bella maniera’, 또는 ‘현대적인 마니에라 la maniera moderna’는 라파엘로의 <성 미하엘>과 미켈란젤로의 <스무 명의 누드> 등에서 표현된 것처럼 그 시대의 가장 높은 수준의 미술 표현을 의미한다.
마니에라가 강조하는 것은 사실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우아함, 세련된 균형, 정교화, 능숙한 솜씨 등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고전적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적 이상에 의도적으로 반대하거나,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좀 더 미묘하고 세련된 우아함을 성취하고자 노력했으며, 코레조·라파엘로·미켈란젤로 등이 도달했던 최상의 완벽을 계속 추구하고자 했다.
또 전문가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기교나 새로움, 놀라움, 난해함, 심원한 암시 등을 함께 추구해야 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이론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었으며, 미적 효과를 더욱 열광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예술가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장려되었다.
이는 종종 과장되거나 병적인 것, 기괴하기까지 한 경향으로 기울기도 했다.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운동 표현과 모티프를 강조했으므로 미켈란젤로의 상승하는 나선형 또는 ‘뱀 형상 인체 figura serpentina’는 이들의 애호를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현실에서 취한 형상들을 공상적인 것으로 변형시켰으며 견고한 원근법적 구조가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바꾸었다.
고전적 균형, 편안함과 기능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이상은 불안정한 구도, 기형적 자세, 자의식 강한 예술상의 기교나 착종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마니에라란 개념을 공식화할 수 있는 일련의 진부한 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 결부시킨 사람은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술사학자, 그리고 골동품 연구가인 카를로 말바시아와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매너리즘을 고전주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성기 르네상스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하강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매너리즘의 성행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있다.
고대에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서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 하우저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이유는 아마 친퀘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은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떤 해결책에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근대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변증법적인 복잡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정리·극복하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노력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고전주의가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원인은 이탈리아의 정치·사회·경제적 불안정이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 독일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약탈(1527) 등으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의 장점인 조화와 안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이런 분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매너리즘을 유럽 전체에 확산된 하나의 적극적인 현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미술사가들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예술가들에게서 보이던 과잉된 표현, 즉 종교적 법열의 절정에 이른 경우로서 스페인의 엘 그레코를 들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장식적 우아함과 지적 에로티시즘은 프랑스의 퐁텐블로 화파 속에서 프랑스적 취향으로 발전했다.
만토바에서 줄리오 로마노와 함께 공동 작업했던 로소 피오렌티노와 프리마티초, 그리고 1552년 이후의 니콜로 델 아바테 및 살비아티는 새로운 이탈리아의 마니에라를 프랑스에 정착시켜 1세기에 걸친 지배적인 예술로 창출했다.
영국에서의 매너리즘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미니어처miniature(채식사본에 그려 넣은 삽화) 화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매너리즘이 영국에 끼친 영향은 미약했다.

역사적인 운동으로서의 매너리즘은 1590년대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안니발레 카라치의 새로운 고전주의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용어가 유행에서 사라져가는 양식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뵐플린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을 모든 양식의 추상적인 생성 발전의 한 단계로 보았다.
그들의 정의에는 라파엘로에서 달성된 ‘잠깐 동안의 절정’으로부터 퇴보했다는 부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서의 매너리즘은 ‘퇴보한 아카데미즘’ 혹은 ‘정신적인 위기 시대에 성숙된 상류사회 예술에 두각을 나타낸, 사라져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바로크로의 이행 시기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매너리즘을 단순히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결하는 교량으로만 취급한 뵐플린의 이론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드보르 작의 주도 아래 독일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을 엘 그레코에서 정점에 이른 유럽의 예술 운동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너리즘의 주요 특징을 미의식의 왜곡과 정신적 격렬함 등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이라는 말보다는 후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mannered’이라는 용어와 ‘매너리즘’을 구분하여, 매너리즘의 용어를 주로 1525~1600년의 유럽 미술에만 사용하도록 한정했다.
그리고 매너리즘의 긴장과 과장을 종교개혁과 로마의 약탈, 트렌트 종교회의(1545~65) 등이 원인이 된 일련의 교회 위기와 반종교개혁, 북유럽의 종교전쟁 등의 사건으로 야기된 일반적인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20세기에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신들과 매너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되살아난 매너리즘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으로 그 동기가 모호하고 서로 상반된 해석까지 낳았다.
매너리즘에 대한 좀더 명확한 역사적 평가는 1956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유럽 매너리즘의 승리 The Triumph of European Mannerism’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통해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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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아트의 수도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20세기 초 화가들과 작가들은 카페와 찻집, 화랑, 극장, 서점들이 즐비한 1880년대에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줄지어 살던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눈독을 들였다.
1920년대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 더스 패서스, 윌라 시버트 캐더Willa Sibert Cather(1873-1947) 등이 문화 반란의 중심인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살았다.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게이, 레즈비언, 성에서 해방된 사람과 자유연애 지지자,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 전위예술가, 화가, 작가들이 이곳에서 한데 어울렸고, 모두 상업화에 대한 거부와 독립 의지 속에 결속되었다.

1900년의 뉴욕 미술계를 지배하던 풍경화, 신고전주의, 또는 인상주의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두 가지 모더니즘 사조가 탄생했다.
하나는 사실주의로 20세기 초에 한 그룹의 필라델피아 화가들이 자신들의 이론가인 로버트 헨리Robert Henri(1865-1929) 주위로 모여 뉴욕에 정착한 뒤에 나타났다.
1907년, 국제디자인아카데미가 헨리와 나머지 일곱 명의 화가들 조지 룩스, 윌리엄 제임스 글래큰스, 존 슬론, 에버렛 신, 아서 B. 데이비스, 어니스트 로슨, 모리스 프렌더개스트의 전시를 거부하자 헨리가 보수적인 전시정책에 항의하여 결성한 에이트The Eight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그들은 에이트라는 명칭을 내걸고 맥베스 화랑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애시캔파 Ash Can(쓰레기통파)’라는 별명이 붙은 헨리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뉴욕의 소음과 악취, 도시와 뉴요커들의 현실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 다른 사조인 반추상과 입체-미래파는 존 마린, 에이브러햄 워코비츠, 조지프 스텔라, 막스 웨버 같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들 예술가들은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와 그의 화랑 291 덕분에 앙리 마티스를 발견했으며, 뉴욕을 입체파의 도시라고 평한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말을 자신들의 작품에서 표현했다.
스티글리츠는 1905년에 뉴욕 5번로 291번지에 현대사진의 산실이 된 화랑 291을 개관하여 1차 세계대전과 재정악화로 1917년에 문을 닫기까지 독창적인 사진예술을 대중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소개했으며, 미국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모더니즘 수호자들의 전투적인 태도가 뉴욕에서 국제모던아트전시회를 개최하게 했다.
1913년 2월 17일에 렉싱턴 애비뉴의 제69연대 병기고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Amory show에 전시된 작품은 1,650점이 넘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봐서 미국인이 유럽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시도로 뉴욕 미술계의 점진적인 해방을 입증하게 되었다.
아모리 쇼 이후 25년 동안 모던아트는 점차 뉴욕에 자리 잡아갔으며,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는 이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휘트니는 1900년에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7년에 그리니치빌리지에 작업장을 차렸다.
그 후 그녀는 유명한 예술가인 동시에 모던아트에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미술 후원자이자 수집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거절하자 1930년에 휘트니 뮤지엄을 창설했다.
그녀는 6천여 점의 작품을 소장했는데, 로이 리히텐슈타인, 짐 다인,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등 모던아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휘트니 뮤지엄의 공식 명칭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예술가가 아닌 미술 후원자들도 모던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1929년에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가 릴리 블리스, 애비 록펠러(로드 아일랜드의 상원의원 넬슨 앨드리치의 딸이자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아내), 메리 퀸 설리번의 주도로 개관했다.
모마는 휘트니 뮤지엄과는 달리 회화와 조각뿐만 아니라 모든 시각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필립 굿윈과 에드워드 더렐 스톤이 설계한 1939년의 뮤지엄 건물은 후에 필립 존슨의 설계에 따라 증축되었으며, 존슨은 1953년에 뮤지엄의 정원도 설계했다.
모마는 2004년에 1조 원을 들여 일본인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로 하여금 증축, 리모델링을 하게 했는데, 요시오는 12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들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1만7천 평의 넓이로 증축하면서 재료로 유리, 알루미늄,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시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뮤지엄을 디자인” 하겠다는 요시오는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마실 듯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우리가 좋은 집을 원한다면 집에서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1939년에는 광산 투자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솔로몬 R. 구겐하임이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비구상회화 뮤지엄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뮤지엄은 1952년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개명했고,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뉴욕의 ‘영적 전당 temple of spirit’을 상징하는 둥근 로툰다rotunda(원형이나 타원형 평면 위에 둥근 지붕을 올린 건물) 뮤지엄으로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이 건축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품들을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그리니치빌리지는 1940년대에 보헤미안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곳의 술집과 작업장들에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클래스 올덴버그, 프란츠 클라인, 아슐리 고르키, 로버트 머더웰 등 뉴욕파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로 불리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화파나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고 미술에서의 개인주의를 강력하게 수호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미국으로 망명 온 유럽의 예술가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인 살바도르 달리, 앙드레 브르통,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 모두 뉴욕으로 끌어들인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창조보조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문화적, 미학적 목적을 잘 아는 미술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 해럴드 로젠버그,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한 모마의 관장 앨프레드 바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대공황 시절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이 추상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적인 현대성을 주장했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1942년에 신생 화랑 금세기의 미술을 개관했다.
‘여성 카사노바’로 불린 그녀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성공한 구리재벌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런던에서 화랑을 연 경험이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1943년에 최초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을 위한 개인전을 열었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인해 곧 ‘드리퍼 잭’이란 별명을 얻었다.
화랑 주인과 화가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폴록의 드리핑, 컬러필드의 선두자 마크 로스코의 채색된 직사각형, 프란츠 클라인과 그 밖의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뉴욕을 모던아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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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오르피즘에 기초한 클레의 추상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클레는 재현적인 이미지를 남긴 작품에서 왜곡의 방법을 사용했다.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듯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형태와 색채 모두를 왜곡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추상은 인식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비해 왜곡은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실제로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왜곡은 사실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끌며 표현적 특징을 부각시키므로 시각적 은유로 나타난다.
특히 환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왜곡은 관람자에게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클레는 1914년 튀니지를 비롯하여 북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발현하는 순색들을 보고나서 색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좀 더 진전된 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년 동안 노력했다.
따라서 1914년 이전까지 그의 소묘작품은 훌륭하지만 색을 사용한 작품에는 걸작이 없고 튀니지를 다녀온 후부터 그의 화면은 표현적인 색채로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시적 위트가 있으며, 절도 있는 아이러니가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회화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갈망한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클레의 창작에 원천적인 영감을 준 것이 들로네의 오르피즘이다.
들로네는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신인상주의와 미셸-외젠 슈브뢸의 논문 「색의 동시대비 법칙에 관하여」(1839)를 연구했다.
슈브뢸은 프리즘으로 분해한 보색을 시각적으로 분석하여 병치된 색채가 인접한 색을 강조하거나 혹은 위치에 따라서 상이한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두운 청색은 인접한 노랑을 초록에 가깝게 만드는 반면, 밝은 청색은 동일한 노랑을 주황색에 가깝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슈브뢸의 색채의 동시대비 법칙을 받아들인 들로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색채가 형태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연결을 위한 색채이론의 미적 응용에 대한 들로네의 작업을 클레가 받아들였다.
들로네는 1912년 봄부터 빛의 유희에 관심을 두고 ‘창문’ 연작을 그렸는데, 클레는 <창문>89을 보고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클레는 색과 평면적 구조로 구성하는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미묘한 색조의 변화가 리드미컬한 효과를 냈다.
들로네와 만남은 선에 대한 연구에 몰두해온 클레로 하여금 색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색채 형태 회화로 들어서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빛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을 안 클레는 색채와 명암이 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색채를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숱한 농담의 위계로 보고 색조를 무게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암의 증감을 통해 무게를 조절하여 화면의 통일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10년 이전에 쓴 일기에서 색에 관한 세심한 관찰과 명암의 증감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자탄한 것을 보면 색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고 또한 많은 실험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들로네의 영향은 1914년 초에 그린 그림들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무제>209, 210가 그 예이다.
색면을 격자 모양으로 배열하는 구성이 그에게 창작의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색면의 격자 모양을 입체주의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들로네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공간과 오브제를 부순 후 회화적 목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런 양식을 사용한 것이지만 클레는 시각적 대상인 오브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평편한 구성을 위해 사용한 점이 다르다.
평편한 정사각형 색면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 시기에 몇몇 유럽 화가들이 구사하고 있었다.

클레는 현대의 거장들 가운데서 가장 창의적이고 대단히 많은 작품을 제작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완성작은 8천여 점에 달한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주요 공공 컬렉션에 속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베른 미술관의 파울 클레 재단의 컬렉션이다.
그는 수많은 다양한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각각의 양식들을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어 그의 붓질이 닿은 작품은 어떠한 양식으로 제작되었어도 다른 작품과 혼동할 우려가 없다.
비할 데 없는 타고난 상상력과, 최고의 솜씨, 탁월한 형태 감각을 겸비한 클레는 강의와 지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금세기의 혁신적인 미술에 어떤 예술가도 능가하지 못할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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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나라 독일로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의 예술여정은 15살 때인 1947년에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부터였다.
16살부터 21살까지 은행원이었던 쇤베르크는 25살 때에 대표적인 작품 <정화된 밤 Verklarte Nacht>을 작곡하여 천재성을 드러냈다.
35살 때에 피아노 소품 11-1번을 작곡하면서 음과 음 사이에 위계질서를 이루는 으뜸음을 사용하지 않고 음들이 화성적, 선율적으로 배합되도록 했는데, 이는 훗날 무조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범조성pantonality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1921년에는 12개의 음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대등하게 연관되는 새로운 작곡법인 12음 기법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를 작곡해 유명해졌다.
백남준은 이건우를 통해 12반음을 이용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이건우 선생님이) 어린 내게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세계에 관해 지독히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그게 1946년의 이야기인데, 오죽하면 내가 쇤베르크 연구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그 결과 동경대학 졸업논문을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로 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쇤베르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48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우 선생님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해와 열정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1932년 7월 20일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 가운데 태어난 백남준은 피아노를 배운 것은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아버지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고 있었고,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 절반을 차지한 섬유업계의 대부였다.
6.25동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백남준은 홍콩을 무대로 인삼무역을 하던 부친을 따라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의 여권번호가 7번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쉽게 이데올로기를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나는 6.25 때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뒤부터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백남준의 가족은 부산으로 갔고, 1950년 7월 27일 백남준은 이미 가지고 있던 일본 비자를 이용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고베를 경유해 동경으로 갔다.
일제 때부터 일본을 빈번히 왕래한 부친은 동경에 집과 사업체를 마련해두었다.
그는 1952년 4월에 동경대 교양학부 문과에 입학했고, 3학년이 되자 미학과 미술사를 동시에 전공한 후 1956년에 졸업했다.
그해 그는 독일로 갔다. 뮌헨에 도착한 그는 트라지불로스 게오르기아데스 교수의 음악사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이 진행되던 중 그는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서 작곡을 배우기 위해 프라이 부르크 음악대학으로 옮겼다.
포르트너 교수는 백남준이 12음계 음악을 포함한 전통 음악에 관심이 없음을 알고 그에게 쾰른의 서독일 라디오 방송WDR의 전자 스튜디오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포르트너 교수가 1959년 초 백남준을 위해 써준 추천서에는 “백남준과 같이 매우 특이한 현상”은 맡아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고, 또한 “백남준은 파리의 피에르 셰퍼 그리고 미국인 존 케이지가 수행한 소리와 음향 연출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다름슈타트에서는 여름이면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중요한 포럼은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적인 휴가코스’로서 그곳에서 백남준은 1957년에 연사로 온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1928-)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하기강좌에 강사로 초청되어 온 존 케이지를 만나 인생에 큰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1951년 여름 처음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 참가한 슈톡하우젠은 1947년에 쾰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동시에 쾰른 대학에서 음악학, 철학, 문헌학을 공부했다.
1953년부터 그는 다름슈타트의 강좌에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쾰른 전자음악 스튜디오 창설에 참가했으며, 후에 상임위원이 되었고, 1963년에는 예술부장이 되었다.
1954-60년까지 일련의 중요한 작품을 작곡했고,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 더불어 현대음악의 차세대 선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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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 워홀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1965년 5월 워홀은 소나벤드 화랑에서 열릴 전시회를 위해 파리로 갔다.
소나벤드가 워홀의 일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다.
소나벤드 화랑은 2차 세계대전 기간 피카소가 살던 집 근처에 있었고 워홀은 피카소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피카소를 좋아하면서 “피카소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가 마티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고 피카소에 관해 말할 때도 그저 “좋다” 또는 “대단하다”라고만 말했는데 과연 그가 대가들의 미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워홀은 자신이 회화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 미쳐 있었고,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어 “미국 영화가 최고다.
미국 영화는 분명하고 실제 같으며 영상이 놀랍도록 훌륭하다.
미국 영화는 말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다.
말을 적게 할수록 더 완벽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할리우드로 가서 제작자들을 만났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워홀이 파리에서 돌아오자 친구들이 공장에서 ‘가장 훌륭한 50인 Fifty Most Beautiful People’ 깜짝 파티를 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마다 워홀은 누가 들어오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았는데, 유명가수 주디 갈란드,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차례로 들어왔다.
모두 워홀이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들인데 그들이 워홀의 파티에 참석한 걸 보면 워홀이 유명인사가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에디가 뉴욕의 가장 이상적인 연인으로 알려졌다.
워홀의 영화 <음탕한 계집>(1965), <레스토랑>(1965), <부엌>(1965) 등에 출연한 에디는 <부엌>에 관해 “아주 비논리적인 영화로 성격과 동기가 없는 완전히 웃기는 영화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쓴 타벨은 “내가 할 일은 무의미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으며, 의미 없는 말을 쓰는 것이었다.
...
앤디가 ‘줄거리를 없애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성격 없는 배역들을 등장시켜야 했다”고 했다.
워홀과 에디가 함께 외출하는 일이 잦았고 함께 파티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T셔츠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고 파티에 간 적도 있었다.
워홀은 말했다.
“사람들은 에디가 나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랬던 것이 아니라 에디가 바랬던 것으로 내게도 놀라운 일이다.”
잡지 <에스콰이어>가 워홀에게 인생의 동반자로 누굴 꼽겠느냐고 묻자 워홀은 “에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내게 잘 해준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65년 9월 에디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워홀이 스타로 알려진 만큼 자신은 유명하지 못하다면서 투덜거렸고 워홀과 헤어져야겠다고 말했다.
에디의 친구들은 워홀과 헤어지면 배우로서의 인기가 하락할 것이라면서 워홀 옆에 바짝 붙어있으라고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워홀은 에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에디는 자신이 워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워홀은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에디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갔다.
워홀의 다음 영화에 에디의 역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주일에 5-6백 달러를 지불하면서 영화를 제작하는 워홀은 아직 본전을 못 건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에디를 주인공으로 쓰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화에 몰두하면서도 틈이 나면 워홀은 그림을 제작했다.
캠벨 수프통조림도 다시 수십 점 제작했는데, 그중 한 점은 캠벨사의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전기의자도 여러 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지만 밝은 색을 사용한 것 외에는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
1965년 10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현대미술관 관장 그린이 주최한 자신의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워홀은 친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갔다.
에디와 워홀은 주로 밤에 다투었고 낮에는 태연하게 연인처럼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중적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전시회 하루 전 날 많은 사람들이 워홀을 만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TV 카메라맨이 라이트를 들이댔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그림에 부딪치기도 했다. 관장 그린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림을 망치든지 도난이라도 당할 것 같아 관리인에게 벽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워홀에게 몰려와 사인을 요구했고 워홀은 두어 시간 사인을 해주다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워홀은 나중에 술회했다. “별난 전시회였다.
미술관에 그림은 없고 사람들만 있었다. 1960년대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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