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매너리즘의 정의의 역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Mannerism(Manierismus)이다.
매너리즘은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였으며 자연주의, 즉 ‘소박한 독단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미술 양식을 말한다.
고전기 이후의 미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에 의한 미술품 제작을 거장의 양식을 노예적으로 모방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이런 사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반니 벨로리의 저서 『안니발레 카라치 전기』에서였다.
바사리가 사용한 ‘마니에라 maniera’란 말은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개인적 혹은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으로 넓은 의미로는 양식style이다.
즉 ‘마니에라’는 유사한 예술작품의 바람직한 성격을 뜻하는 ‘우아함’이라는 말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니에라 bella maniera’, 또는 ‘현대적인 마니에라 la maniera moderna’는 라파엘로의 <성 미하엘>과 미켈란젤로의 <스무 명의 누드> 등에서 표현된 것처럼 그 시대의 가장 높은 수준의 미술 표현을 의미한다.
마니에라가 강조하는 것은 사실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우아함, 세련된 균형, 정교화, 능숙한 솜씨 등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고전적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적 이상에 의도적으로 반대하거나,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좀 더 미묘하고 세련된 우아함을 성취하고자 노력했으며, 코레조·라파엘로·미켈란젤로 등이 도달했던 최상의 완벽을 계속 추구하고자 했다.
또 전문가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기교나 새로움, 놀라움, 난해함, 심원한 암시 등을 함께 추구해야 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이론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었으며, 미적 효과를 더욱 열광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예술가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장려되었다.
이는 종종 과장되거나 병적인 것, 기괴하기까지 한 경향으로 기울기도 했다.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운동 표현과 모티프를 강조했으므로 미켈란젤로의 상승하는 나선형 또는 ‘뱀 형상 인체 figura serpentina’는 이들의 애호를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현실에서 취한 형상들을 공상적인 것으로 변형시켰으며 견고한 원근법적 구조가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바꾸었다.
고전적 균형, 편안함과 기능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이상은 불안정한 구도, 기형적 자세, 자의식 강한 예술상의 기교나 착종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마니에라란 개념을 공식화할 수 있는 일련의 진부한 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 결부시킨 사람은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술사학자, 그리고 골동품 연구가인 카를로 말바시아와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매너리즘을 고전주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성기 르네상스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하강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매너리즘의 성행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있다.
고대에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서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 하우저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이유는 아마 친퀘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은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떤 해결책에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근대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변증법적인 복잡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정리·극복하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노력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고전주의가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원인은 이탈리아의 정치·사회·경제적 불안정이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 독일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약탈(1527) 등으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의 장점인 조화와 안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이런 분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매너리즘을 유럽 전체에 확산된 하나의 적극적인 현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미술사가들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예술가들에게서 보이던 과잉된 표현, 즉 종교적 법열의 절정에 이른 경우로서 스페인의 엘 그레코를 들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장식적 우아함과 지적 에로티시즘은 프랑스의 퐁텐블로 화파 속에서 프랑스적 취향으로 발전했다.
만토바에서 줄리오 로마노와 함께 공동 작업했던 로소 피오렌티노와 프리마티초, 그리고 1552년 이후의 니콜로 델 아바테 및 살비아티는 새로운 이탈리아의 마니에라를 프랑스에 정착시켜 1세기에 걸친 지배적인 예술로 창출했다.
영국에서의 매너리즘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미니어처miniature(채식사본에 그려 넣은 삽화) 화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매너리즘이 영국에 끼친 영향은 미약했다.
역사적인 운동으로서의 매너리즘은 1590년대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안니발레 카라치의 새로운 고전주의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용어가 유행에서 사라져가는 양식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뵐플린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을 모든 양식의 추상적인 생성 발전의 한 단계로 보았다.
그들의 정의에는 라파엘로에서 달성된 ‘잠깐 동안의 절정’으로부터 퇴보했다는 부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서의 매너리즘은 ‘퇴보한 아카데미즘’ 혹은 ‘정신적인 위기 시대에 성숙된 상류사회 예술에 두각을 나타낸, 사라져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바로크로의 이행 시기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매너리즘을 단순히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연결하는 교량으로만 취급한 뵐플린의 이론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드보르 작의 주도 아래 독일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을 엘 그레코에서 정점에 이른 유럽의 예술 운동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너리즘의 주요 특징을 미의식의 왜곡과 정신적 격렬함 등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이라는 말보다는 후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mannered’이라는 용어와 ‘매너리즘’을 구분하여, 매너리즘의 용어를 주로 1525~1600년의 유럽 미술에만 사용하도록 한정했다.
그리고 매너리즘의 긴장과 과장을 종교개혁과 로마의 약탈, 트렌트 종교회의(1545~65) 등이 원인이 된 일련의 교회 위기와 반종교개혁, 북유럽의 종교전쟁 등의 사건으로 야기된 일반적인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20세기에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신들과 매너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되살아난 매너리즘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으로 그 동기가 모호하고 서로 상반된 해석까지 낳았다.
매너리즘에 대한 좀더 명확한 역사적 평가는 1956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유럽 매너리즘의 승리 The Triumph of European Mannerism’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통해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