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나라 독일로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의 예술여정은 15살 때인 1947년에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부터였다.
16살부터 21살까지 은행원이었던 쇤베르크는 25살 때에 대표적인 작품 <정화된 밤 Verklarte Nacht>을 작곡하여 천재성을 드러냈다.
35살 때에 피아노 소품 11-1번을 작곡하면서 음과 음 사이에 위계질서를 이루는 으뜸음을 사용하지 않고 음들이 화성적, 선율적으로 배합되도록 했는데, 이는 훗날 무조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범조성pantonality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1921년에는 12개의 음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대등하게 연관되는 새로운 작곡법인 12음 기법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를 작곡해 유명해졌다.
백남준은 이건우를 통해 12반음을 이용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백남준은 훗날 회상했다.

“(이건우 선생님이) 어린 내게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세계에 관해 지독히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그게 1946년의 이야기인데, 오죽하면 내가 쇤베르크 연구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그 결과 동경대학 졸업논문을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로 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쇤베르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이 1948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우 선생님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해와 열정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1932년 7월 20일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 가운데 태어난 백남준은 피아노를 배운 것은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아버지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고 있었고,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 절반을 차지한 섬유업계의 대부였다.
6.25동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백남준은 홍콩을 무대로 인삼무역을 하던 부친을 따라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의 여권번호가 7번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쉽게 이데올로기를 버린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는 훗날 술회했다.

“나는 6.25 때 북한군이 우리 집에 들어와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난 뒤부터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났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백남준의 가족은 부산으로 갔고, 1950년 7월 27일 백남준은 이미 가지고 있던 일본 비자를 이용해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고베를 경유해 동경으로 갔다.
일제 때부터 일본을 빈번히 왕래한 부친은 동경에 집과 사업체를 마련해두었다.
그는 1952년 4월에 동경대 교양학부 문과에 입학했고, 3학년이 되자 미학과 미술사를 동시에 전공한 후 1956년에 졸업했다.
그해 그는 독일로 갔다. 뮌헨에 도착한 그는 트라지불로스 게오르기아데스 교수의 음악사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이 진행되던 중 그는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서 작곡을 배우기 위해 프라이 부르크 음악대학으로 옮겼다.
포르트너 교수는 백남준이 12음계 음악을 포함한 전통 음악에 관심이 없음을 알고 그에게 쾰른의 서독일 라디오 방송WDR의 전자 스튜디오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포르트너 교수가 1959년 초 백남준을 위해 써준 추천서에는 “백남준과 같이 매우 특이한 현상”은 맡아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고, 또한 “백남준은 파리의 피에르 셰퍼 그리고 미국인 존 케이지가 수행한 소리와 음향 연출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다름슈타트에서는 여름이면 국제신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중요한 포럼은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적인 휴가코스’로서 그곳에서 백남준은 1957년에 연사로 온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1928-)을 만나 교류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하기강좌에 강사로 초청되어 온 존 케이지를 만나 인생에 큰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1951년 여름 처음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 참가한 슈톡하우젠은 1947년에 쾰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동시에 쾰른 대학에서 음악학, 철학, 문헌학을 공부했다.
1953년부터 그는 다름슈타트의 강좌에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쾰른 전자음악 스튜디오 창설에 참가했으며, 후에 상임위원이 되었고, 1963년에는 예술부장이 되었다.
1954-60년까지 일련의 중요한 작품을 작곡했고,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 더불어 현대음악의 차세대 선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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