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아트의 수도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20세기 초 화가들과 작가들은 카페와 찻집, 화랑, 극장, 서점들이 즐비한 1880년대에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줄지어 살던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눈독을 들였다.
1920년대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 더스 패서스, 윌라 시버트 캐더Willa Sibert Cather(1873-1947) 등이 문화 반란의 중심인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살았다.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게이, 레즈비언, 성에서 해방된 사람과 자유연애 지지자,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 전위예술가, 화가, 작가들이 이곳에서 한데 어울렸고, 모두 상업화에 대한 거부와 독립 의지 속에 결속되었다.

1900년의 뉴욕 미술계를 지배하던 풍경화, 신고전주의, 또는 인상주의 전통에 대한 반항으로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두 가지 모더니즘 사조가 탄생했다.
하나는 사실주의로 20세기 초에 한 그룹의 필라델피아 화가들이 자신들의 이론가인 로버트 헨리Robert Henri(1865-1929) 주위로 모여 뉴욕에 정착한 뒤에 나타났다.
1907년, 국제디자인아카데미가 헨리와 나머지 일곱 명의 화가들 조지 룩스, 윌리엄 제임스 글래큰스, 존 슬론, 에버렛 신, 아서 B. 데이비스, 어니스트 로슨, 모리스 프렌더개스트의 전시를 거부하자 헨리가 보수적인 전시정책에 항의하여 결성한 에이트The Eight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그들은 에이트라는 명칭을 내걸고 맥베스 화랑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애시캔파 Ash Can(쓰레기통파)’라는 별명이 붙은 헨리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뉴욕의 소음과 악취, 도시와 뉴요커들의 현실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 다른 사조인 반추상과 입체-미래파는 존 마린, 에이브러햄 워코비츠, 조지프 스텔라, 막스 웨버 같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들 예술가들은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와 그의 화랑 291 덕분에 앙리 마티스를 발견했으며, 뉴욕을 입체파의 도시라고 평한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말을 자신들의 작품에서 표현했다.
스티글리츠는 1905년에 뉴욕 5번로 291번지에 현대사진의 산실이 된 화랑 291을 개관하여 1차 세계대전과 재정악화로 1917년에 문을 닫기까지 독창적인 사진예술을 대중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소개했으며, 미국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모더니즘 수호자들의 전투적인 태도가 뉴욕에서 국제모던아트전시회를 개최하게 했다.
1913년 2월 17일에 렉싱턴 애비뉴의 제69연대 병기고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Amory show에 전시된 작품은 1,650점이 넘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봐서 미국인이 유럽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시도로 뉴욕 미술계의 점진적인 해방을 입증하게 되었다.
아모리 쇼 이후 25년 동안 모던아트는 점차 뉴욕에 자리 잡아갔으며,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1875-1942)는 이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휘트니는 1900년에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07년에 그리니치빌리지에 작업장을 차렸다.
그 후 그녀는 유명한 예술가인 동시에 모던아트에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미술 후원자이자 수집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집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거절하자 1930년에 휘트니 뮤지엄을 창설했다.
그녀는 6천여 점의 작품을 소장했는데, 로이 리히텐슈타인, 짐 다인,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등 모던아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휘트니 뮤지엄의 공식 명칭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예술가가 아닌 미술 후원자들도 모던아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1929년에 모마MoMA(Museum of Modern Art)가 릴리 블리스, 애비 록펠러(로드 아일랜드의 상원의원 넬슨 앨드리치의 딸이자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아내), 메리 퀸 설리번의 주도로 개관했다.
모마는 휘트니 뮤지엄과는 달리 회화와 조각뿐만 아니라 모든 시각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필립 굿윈과 에드워드 더렐 스톤이 설계한 1939년의 뮤지엄 건물은 후에 필립 존슨의 설계에 따라 증축되었으며, 존슨은 1953년에 뮤지엄의 정원도 설계했다.
모마는 2004년에 1조 원을 들여 일본인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로 하여금 증축, 리모델링을 하게 했는데, 요시오는 12만 점이나 되는 소장품들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1만7천 평의 넓이로 증축하면서 재료로 유리, 알루미늄, 화강암을 사용했다.
“도시 속의 도시, 도시 속의 뮤지엄을 디자인” 하겠다는 요시오는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고 단지 마실 듯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우리가 좋은 집을 원한다면 집에서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건축물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1939년에는 광산 투자로 재산을 모은 실업가 솔로몬 R. 구겐하임이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비구상회화 뮤지엄Museum of non-objective Painting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 뮤지엄은 1952년에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개명했고, 1959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뉴욕의 ‘영적 전당 temple of spirit’을 상징하는 둥근 로툰다rotunda(원형이나 타원형 평면 위에 둥근 지붕을 올린 건물) 뮤지엄으로 건립했다.
달팽이 모양의 외관과 나선형 계단으로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이 건축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로 올라간 관람객이 경사로를 걸어 내려오면서 벽에 걸린 전시작품들을 볼 수 있게 만든 파격적인 양식이다.

그리니치빌리지는 1940년대에 보헤미안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곳의 술집과 작업장들에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 클래스 올덴버그, 프란츠 클라인, 아슐리 고르키, 로버트 머더웰 등 뉴욕파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로 불리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화파나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고 미술에서의 개인주의를 강력하게 수호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미국으로 망명 온 유럽의 예술가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인 살바도르 달리, 앙드레 브르통,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들 모두 뉴욕으로 끌어들인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창조보조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문화적, 미학적 목적을 잘 아는 미술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 해럴드 로젠버그,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한 모마의 관장 앨프레드 바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대공황 시절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신들이 추상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적인 현대성을 주장했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1942년에 신생 화랑 금세기의 미술을 개관했다.
‘여성 카사노바’로 불린 그녀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성공한 구리재벌 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런던에서 화랑을 연 경험이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1943년에 최초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56)을 위한 개인전을 열었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인해 곧 ‘드리퍼 잭’이란 별명을 얻었다.
화랑 주인과 화가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폴록의 드리핑, 컬러필드의 선두자 마크 로스코의 채색된 직사각형, 프란츠 클라인과 그 밖의 화가들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뉴욕을 모던아트의 수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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