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구스타브 클림트를 여러분은 어떤 화가라고 생각하지요?

<키스>를 그린 화가?
선정적인 <다나에>를 그린 화가?
비잔틴 장식과 황금을 사용한 화가?
여성을 아름답게 이상화한 화가?
포르노그래피를 그린 화가?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

이 모두가 그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에로티시즘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아 제목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말에 합당한 설명을 이 책에서 하려고 합니다.
다만 그의 포르노그래피만은 여기서 제외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풍경화도 제외했습니다.

55해의 생애를 살다 세상을 떠난 클림트가 남긴 드로잉은 5-6천 점 가량 됩니다.
쓱쓱 단번에 대충 그린 것까지 합친 것입니다.
그는 여성의 인체에 집착한 화가였습니다.
거의가 인물화이며 그것들 가운데 95퍼센트가 여성이며 그들 대부분은 빈 상류층에 속했습니다.
매우 선정적인 인물화는 돈을 주고 산 직업모델들을 그린 것이지만 상류층 여성들도 기꺼이 누드모델이 그가 원하는 포즈를 취해주었는데, 이는 클림트 자신과 그의 회화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적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누드화는 클림트의 여성편력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지만 당시의 빈의 부르주아의 삶과도 관련이 있는데, 상류층 남자들이 그런 관능적인 인물화를 보고 즐기기를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서양 사람들이 향수에 젖을 만큼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실험이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는 비단 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독일의 대도시, 프랑스 그리고 그 밖의 도시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경향을 이해한다면 클림트의 회화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더 쉬워집니다.
빈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고 저술활동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인간의 내면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잠재의식에 대한 탐험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성과 관련된 자유와 억압 혹은 도덕과의 충돌에 관한 연구가 괄목할 만했습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에로티시즘이 중세 기독교에 의해 잠재의식 속으로 숨겨졌다가 인간 내면의 연구를 통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부끄러워했던 것들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면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이해한다면 클림트의 회화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더 쉬워진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침묵했습니다.
어떤 설명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의 작품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관람자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그의 완성된 인물화와 드로잉이 있지만 하나하나 설명을 붙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명 가능한 건 이해를 돕기 위해 자세히 언급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감상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클림트가 바라던 점이기도 합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보면서 여러분 자신의 에로티시즘을 생각하면 됩니다.
인체에 대한 구속과 억압이 있다면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미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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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의 예술이냐 외설이냐>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실레는 사춘기에 접어들기 이전의 소녀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눌렝바하의 비행소녀들이 실레의 작업실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몰래 실레의 작업실에 가서 모델이 되었으며 이 일이 알려지자 동네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실레가 소녀들을 끌어들여 춘화를 그려 판다고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관이 실레의 작업실을 수색했을 때 백 장도 넘는 에로틱 드로잉이 벽에 꽂혀 있거나 쌓여있었다.
<가두리 장식이 달린 담요 위의 두 소녀 Two Girls on a Fringed Blanket>와 <두 여인 Two Women>은 터부시되고 있는 레즈비언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서 보는 이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찰은 소녀들을 유혹한 죄로 실레를 유치장에 가두고 조사에 들어갔다.
1912년 5월 2일 라이헬이 뢰슬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실레는 열나흘 째 유치장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베네슈가 그를 방문했습니다.
실레는 눌렝바하의 유치장에서 매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지독한 곳이지요.
그는 성 폴텐에 있는 지역재판소에 불려갔으며 … 편지를 쓰거나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그가 드로잉들을 벽에 걸어놓았고,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네슈는 판사가 그에 대한 고발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주 후에 열린 재판에서 판사는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기소에 대해서는 기각했지만 에로틱한 드로잉을 소녀들에게 보여준 것은 유죄로 판결했다.
이 죄에 대한 최대 형량은 6개월 동안 중노역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판사는 실레의 회화에 호감을 나타내어 그를 구해주는 제스처로 재판과정에서 에로틱한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운 후 사흘 동안 구금한다는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는 모두 21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회화에 대한 판사의 이해로 실레는 운 좋게 가벼운 벌을 받게 된 것이다.
미성년자들을 유혹했다고 기소되었다면 최대 형량은 20년 동안 중노역을 하는 것이다.

실레는 예술적으로 천재인 자신이 구금된 것에 대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희생양이 된 것이며, 심지어 예술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고통 가운데 위대한 예술이 탄생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대중의 조소가 자신이 천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유치장에서 쓴 일기를 보면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일이 미술가의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에로틱하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에로틱한 작품에 예술적 독특함이 있다면 그건 외설이 아니다. 그것이 외설이 되는 건 단지 관람자가 더러운 인간일 때에만 그러하다”고 적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나는 인간이 성적 느낌을 가지는 한 성적 고문을 겪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은 빈에 이내 알려졌으며 따라서 실레는 더욱 더 유명해졌다.
사실 그는 에로틱한 그림을 많이 그려왔고 그런 그림들만을 구매하는 컬렉터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춘화라고 하는 소문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이후 실레는 지나치게 에로틱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자제했다.
뢰슬러가 회상하기를 어느 날 실레를 방문한 한 변호사가 드로잉 몇 점을 구입하면서 “제게 보여준 것보다 더 진한 것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변호사는 좀더 선정적인 누드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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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조화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지면이 충분하지 않아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환경 뉴욕에서 활약했지만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묶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론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서로의 활약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창안해내고 이 분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워홀이 비디오아트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이며, 영상을 재료로 3차원의 작품을 제작한 백남준이라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대중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팝아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에 관해서 혹은 팝아트에 관해서 침묵한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을 한 권의 책에서 다룰 충분한 근거는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대중적인 이미지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혹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화랑에 걸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 변형시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워홀은 실크스크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캠코더가 시판되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양으로 가서는 과학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삼기 시작하면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좇아 자신의 작품 경향을 만들어나갔다.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백남준과 워홀은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활약한 1960년대는 과학의 결실이 풍성하게 수확된 시기였다.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건조해졌을 것이고 예술은 문명에 뒤쳐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은 이런 분야에서 선구자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그 밖의 예술가들이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접합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쏟아내게 된다.
그 후 나타난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ic art, 컴퓨터아트Computer art, 커뮤니케이션아트Communication art 등 이런 분야들을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전자예술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데, 전자예술의 선구자는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를 실행한 백남준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미술사에 빛날 것이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워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제작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감성, 기량, 야망은 복합체로서의 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그의 주요 영화작품을 이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은 사회문화적 표상을 만들어낸 워홀과 더불어서 영화에 나타난 그의 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경우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 고도로 전문적이며, 시각적이고,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들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 두 사람의 미학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관람자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초대받는다는 개념에서 탈피하여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존 케이지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미친 영향은 이 책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지만 워홀 또한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점을 좀 더 살펴본다면 일본 선불교의 영향으로 이는 동양의 사상이 서양미술에 그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미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명상적인 문화에서 찾았다.
백남준이 홀로 서양으로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으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의 문화로부터 원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대로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며, 이는 동서양 모두에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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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84년 6월 23일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비디오아트의 황제가 되어 귀국했다.
백남준의 귀국으로 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6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신화를 파는 것이 나의 예술’이란 제목으로 정중헌이 기고한 인터뷰기사는 백남준이 말한 “예술은 사기”라는 구절로 화제가 되었다.

“한 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이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갖가지 해프닝을 벌였을 때, 대중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가 한 말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 가능하다.
그가 한 말이 바로 그의 예술이다.
예술은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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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대형 매트릭스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백남준은 1982년에 32대의 컬러텔레비전과 여덟 대의 흑백텔레비전을 사용하여 <비라미드 V-yramid>를 제작했다.
이것은 1987년에 제작한 <보이스/보이스 Beuys/Boice>와 그 이듬해에 제작한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와 함께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작품이다.
휘트니 뮤지엄의 회고전에서 선보인 <비라미드>의 형태는 영상의 내용에 있어서 <TV 십자가>와 같다.
휘트니 뮤지엄이 구입 소장한 <비라미드>는 비디오와 피라미드의 합성어이다.
이 작품은 직각을 이루며 각각 20대의 텔레비전이 쌓아올려졌는데, 위로 갈수록 화면이 점점 작아진다.
이 작품에 사용된 비디오테이프는 특별히 편집한 <글로벌 그루브>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 Lake Placid &#3980;>의 연속적인 장면이며, 여기에 누드소녀, 피아노건반이 인쇄된 숄, 비디오테이프 <조곡 212>(1977)의 가옥 정면 등이 추가되었다.
1980년에 개최된 동계올림픽 장면을 담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은 제13회 동계올림픽 기념예술제 조직위원회로부터 제작을 의뢰 받아 현지에서 촬영한 것이다.
전체 장면은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스키, 스키점프 등과 같은 다양한 스포츠 종목의 동작에 집중되었다.
또 다른 모티프는 비행기와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알렌 긴스버그이다.
상영시간 4분의 짤막한 테이프이지만 1981년에 개최된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사용했다.
자료는 순전히 시각적인 관점에서 선택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이후 지속된다.

백남준이 1982년에 제작한 <삼색 비디오 Tri-Color Video>는 여태까지 제작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멀티 모니터 설치로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선보였다.
256대의 컬러텔레비전과 128대의 흑백텔레비전이 사용되었고 여덟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다양한 영상을 반영했다.
384대의 텔레비전은 4대를 한 단위로 가로 세로 8블럭 12블럭의 거대한 직사각형을 이루면서 화면을 위로 향한 채 퐁피두센터의 무대 바닥을 거의 채웠다.
퐁피두센터를 찾은 관람자들은 이 설치작품을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비디오 바닥으로 생각했다.
백남준에 의하면 비디오아트는 늘 절반만 예술에 속하고 나머지 절반은 일상의 문화에 속한다고 했다.
<삼색 비디오>는 프랑스 국기를 모방한 것으로 청색, 백색, 적색의 영상을 반영했다.
백남준은 <삼색 비디오>를 통해 프랑스인에게 거대한 전자국기를 선사한 셈이다.
헝거리 조각가 니콜라스 셰퍼Nicolas Schaffe는 300m가 넘는 인공두뇌학적인 조명탑을 건설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조명탑을 세울 수만 있다면 레이저로 삼색을 하늘에 쏘아 프랑스 국기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지만 셰퍼의 아이디어는 물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큰소리만 치고 실행하지 못한 셰퍼에 비하면 백남준의 전자 프랑스 국기는 프랑스인에게 대단히 흡족할 만한 것이었다.

전시회를 위해 발행한 화첩 표지에 백남준이 이 작품을 위해 콜라주로 스케치한 것이 실렸는데, 미국 우표 여섯 가지를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같은 우표가 네 장씩 한 단위를 이루며 하나의 정사각형이 되고 있음을 본다.
다양한 우표의 모티프들은 384대의 모니터 위에 대각선으로 배열되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우표에는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1980년의 소방열차, ‘글 쓰는 능력-민주주의의 뿌리’라는 표제가 붙은 모래상자와 깃털, ‘국민의 보상 청원 권리’라는 표제가 붙은 여자 얼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1950년에 흑인 정치가로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랄프 붕체Ralphe Bunche, 그리고 인디언 추장 ‘미친 말’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이다.
이 우표들의 공통점은 인권과 평화로서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다.
지성이 결여되었다는 말을 듣는 백남준은 우표를 선정한 이유를 그것이 가장 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이저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은 1980년에 제작한 <레이저 비디오 공간 Laser Video Space>에서 구체화되었다.
레이저laser(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에 대한 관심은 1965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소논문들에서 레이저를 이용하여 소수의 TV 방송국의 독점방송을 극복하고 다수의 전문방송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상을 피력했다.
레이저는 처음에는 군대에서만 사용되었으나 농축된 가는 빛으로 흩어지지 않고 곧게 나아가는 레이저빔의 특성에 예술가들이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근거가 일찍이 1917년에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저를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에 들어서서였다.
레이저는 1965년에 일부 예술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시각적 설치, 시청각적 설치, 거대한 크기의 환경작품, 그리고 홀로그래피라는 특수 영역에 사용되었다.
백남준의 레이저작업은 방송보다는 레이저를 이용하여 비디오 이미지를 공중에 띄우는 영상작업으로 진전되었다.
백남준은 1980년 3월 25일 모마에서 강의했고 그 내용을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이 정리하여 ‘임의의 추출방식의 정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백남준은 말했다.

“21세기 회화는 극도로 복잡하면서도 극도로 단순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벽지가 될 것이다.
규격화된 전자캔버스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정보가 가득 차 있더라도 그것을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어느 항목이건 어느 페이지이건 찾고 싶은 곳만 찾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나 텔레비전을 볼 때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임의로 찾아볼 수 있는 임의 추출random access 방식이 개발될 때까지는 책이 존재할 것이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은 백남준과 사진작가이자 디자이너 호르스트 바우만Horst H. Baumann의 공동 설치작품이다.
바우만의 기술적 도움이 없었다면 백남준은 성취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비디오 프로젝션 작업을 해온 바우만은 1971년에 첫 프로젝트를 암스테르담에서 실현시킨 적이 있었다.
그가 백남준과 함께 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전통적으로 규격과 모니터에 한정되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해체하고 더 큰 공간적 효과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화면을 설치하지 않은 채 바른 비디오 환경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80년 가을 뒤셀도르프에서 그리고 이듬해 초 베를린에서 선보인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은 하나 또는 두 개의 레이저 외에 일곱 대의 모니터를 활용한 작품이다.
모니터의 영상이 레이저 프로젝션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커닝엄의 춤추는 장면도 있어 그의 춤은 무중력 속에 활보하는 우주인처럼 보였다.
이 영상 자료는 1975년에 제작한 <백남준의 머스에 의한 머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페터 콜프가 편집한 이 비디오테이프는 댄스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모은 것으로 추상적이며 선 모양을 한 영상의 특성 때문에 레이저 프로젝션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이 모니터 화면에 동시에 나타나는 영상을 복사해 비디오 설치의 확대를 묘사한 데 반해 <레이저 비디오 공간 II>에는 모니터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에 사용된 동일한 비디오테이프가 두 개의 레이저에 의해 공중에 투사되었다.
이런 형식의 비디오 환경을 1982년 휘트니 뮤지엄에서의 회고전에서도 볼 수 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I>에 사용된 레이저 기술이 영상의 비물질화를 한층 진척시켰다.
멀티 모니터 설치가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임의의 숫자로 확대시킨 것이라면 레이저 프로젝션에서는 레이저 영상이 윤곽의 흐려짐이 없이 모든 지면에 투사되어 벽과 바닥, 천장 또는 자유롭게 공간에 걸린 그레이팅(격자)에서 동시에 관찰될 수 있었다.

<레이저 비디오 공간 I>에 이어서 개발된 <비디오 레이저 환경 Video Laser Environment>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 설치와 바우만의 레이저 프로젝션을 결합시킨 것이다.
36대의 모니터가 직사각형으로 접합되었고, 비디오벽에 설치된 레이저는 양측 벽에 대칭적으로 투사되어 가느다란 영상들을 천장에 투사했다.
<글로벌 그루브>와 백남준이 레이크 플레이시드 동계 올림픽 장면을 담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으로 편성된 비디오테이프가 레이저 프로젝션과 비디오 설치에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모니터의 나열이 전자상가의 텔레비전 벽면을 상기하게 했고, 공간이 밝아 레이저 프로젝션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니터의 다면체는 새로운 요소로 백남준은 <비디오 문>(1982)에서 이런 형식을 취했다.
브라운관의 전선을 바꿔 접합함으로써 영상을 거꾸로 혹은 측면을 바꾸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법을 1963년 부퍼탈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멀티 모니터 설치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가 1982년 베를린의 국제 무선전신 전시회에 출품한 <비디오 환경>은 <비디오 레이저 환경>의 형식을 약간 변형한 것이었다.
<비디오 환경>에서는 레이저가 사용되지 않았다. 32대의 모니터를 두 개의 직사각형 평면이 되게 했으며, 각 평면은 각각 4대의 모니터로 만든 네 개의 열이 되게 했다.
화면의 다면체는 비슷한 회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비디오테이프도 <글로벌 그루브>와 <레이크 플레이시드 ‘80>의 합성 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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