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예술의 조화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지면이 충분하지 않아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환경 뉴욕에서 활약했지만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묶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론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서로의 활약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창안해내고 이 분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워홀이 비디오아트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이며, 영상을 재료로 3차원의 작품을 제작한 백남준이라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대중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팝아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에 관해서 혹은 팝아트에 관해서 침묵한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을 한 권의 책에서 다룰 충분한 근거는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대중적인 이미지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혹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화랑에 걸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 변형시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워홀은 실크스크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캠코더가 시판되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양으로 가서는 과학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삼기 시작하면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좇아 자신의 작품 경향을 만들어나갔다.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백남준과 워홀은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활약한 1960년대는 과학의 결실이 풍성하게 수확된 시기였다.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건조해졌을 것이고 예술은 문명에 뒤쳐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은 이런 분야에서 선구자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그 밖의 예술가들이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접합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쏟아내게 된다.
그 후 나타난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ic art, 컴퓨터아트Computer art, 커뮤니케이션아트Communication art 등 이런 분야들을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전자예술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데, 전자예술의 선구자는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를 실행한 백남준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미술사에 빛날 것이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워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제작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감성, 기량, 야망은 복합체로서의 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그의 주요 영화작품을 이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은 사회문화적 표상을 만들어낸 워홀과 더불어서 영화에 나타난 그의 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경우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 고도로 전문적이며, 시각적이고,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들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 두 사람의 미학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관람자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초대받는다는 개념에서 탈피하여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존 케이지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미친 영향은 이 책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지만 워홀 또한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점을 좀 더 살펴본다면 일본 선불교의 영향으로 이는 동양의 사상이 서양미술에 그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미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명상적인 문화에서 찾았다.
백남준이 홀로 서양으로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으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의 문화로부터 원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대로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며, 이는 동서양 모두에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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