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반 고흐를 처음 만난 건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직후인 1887년 늦가을 돈도 바닥나고 병든 몸으로 슈페네커의 집에 묵고 있을 때였다.
고갱이 반 고흐와 테오를 만난 곳은 몽마르트르 화랑이 아니면 페티 불바드 전시회였던 것 같다.
혹은 두 곳에서 연거푸 만났을 수도 있다.
반 고흐와 테오는 1887년 12월에 슈페네커의 집으로 고갱을 방문하고 그의 작품을 직접 보았다.
테오가 부소&발라동 화랑에서 작품을 팔아주겠다고 한 것이 고갱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되었다.
테오는 12월 말경 고갱의 작품을 화랑에 진열하면서 피사로와 기요맹의 작품 옆에 걸었다.
이때 전시된 고갱의 작품은 1885~86년 디에페와 브르타뉴에서 그린 <목욕하는 브르통 소년들>과 근래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풍경화 <오고가는 사람들, 마르티니크>, <목욕하는 두 소녀> 등이다.

그때만 해도 고갱에게 반 고흐 형제는 신이 보낸 사자와도 같았다.
테오가 부소&발라동의 몽마르트르 지사에 발령받아 온 건 1886년 봄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그는 영향력 있는 딜러로 곧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커미션을 받는 조건으로 고갱과 거래하고 몇 주 안에 세 점에 대한 값으로 900프랑을 지불했다.
<목욕하는 브르통 소년들>과 다른 한 점은 팔기로 하고 구입한 것이지만, 네 사람이 있는 풍경화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는 자신과 형이 수집하려고 구입했다.
반 고흐 형제가 많은 돈을 주고 작품을 구입하기는 이때가 처음으로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를 함께 사용하는 아파트의 응접실 소파 위에 걸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자신의 작품과 반 고흐의 작품을 교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갱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을 받고 1887년 여름에 그린 <연못가에서 At the Pond>를 반 고흐에게 주었다.
반 고흐는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와 <연못가에서>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가 마음에 들어 에밀 베르나르에게 그 작품이 “대단히 수준 높은 시”라고 했으며, 고갱의 작품에는 “부드럽고 놀라운 기질”이 나타나 있고 시각적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느낄 수 있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로트레크와 어울렸지만 두 사람의 작품에는 호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테오는 훌륭한 화가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본 대로 모사하지 않고 자연과 대화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스스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했으며, 형과 마찬가지로 “고상한 시는 고통 속에서 탄생한다”면서 고갱을 이런 부류의 화가라고 했다.
반 고흐는 장 프랑수아 밀레를 그의 시대의 최고 화가로 꼽고 고갱을 동시대의 최고 화가로 꼽았다.
테오는 드가를 동시대의 최고로 밀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화가로 꼽았지만 반 고흐는 동생과 의견을 달리 했다.
반 고흐는 인간이 처한 상황이 미술에서 가장 훌륭한 주제가 되고 미술가의 최대 과제는 우리가 사는 생의 슬픔과 기쁨을 역사적 맥락에서 구현하는 가운데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드가를 칭찬에서 제외했다.

이 시기에 테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형에게 매달 평균 200프랑에서 300프랑을 주고, 고갱에게는 매달 작품 한 점을 받고 150프랑씩 지불하기로 했다.
돈이 떨어지면 슈페네커와 메이어 드 한에게 빌려 쓰던 고갱에게 테오가 매달 지불하는 돈은 매우 요긴했다.
테오는 고갱에게 형과 함께 아를에서 지내도록 권유했지만 그것은 사실 반 고흐의 아이디어였다.
테오는 형의 제안에 동의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갱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구제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테오는 고갱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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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와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마치 짐머만이라는 여인이 클림트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했습니다.
그때부터 클림트는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렬했습니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답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습니다.

1907-8년에 같은 주제로 <희망 II>를 그리면서 스타일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습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므로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이상화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부 장관 폰 하텔은 그에게 임산부 누드를 전시회에 출품하지 말 것을 권했는데, 가뜩이나 빈 대학 벽화로 여론의 반발이 거센 때 에로틱 작품이 반발을 가중시킬 걸 염려한 때문입니다.
클림트가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으므로 임산부 누드화는 수년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했습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은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은 실레, 코코슈카, 클림트가 대표하는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입니다.
이들의 자유분방한 사고에 의한 회화가 궁극적으로 미술을 전통이라는 깊숙한 올가미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케케묵은 미학을 전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들에 의해서 미술은 더 이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로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작품이 꿈이나 잠재의식의 잡힐 듯 말 듯 불투명한 이미지일지라도, 그런 비이성적인 이미지들이 늘 투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우리 사고의 언저리를 맴돕니다.

클림트는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했으며 이는 그에게 주요 주제였습니다.
1905년에 그린 <여자의 세 시기>에서 이런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903년에 그린 <망자들의 행렬>은 인생에 대한 어두운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죽음과 삶>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 또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실레입니다.
<고뇌>에서 실레는 붉은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지만 장식적인 면이 강했는데 이는 클림트의 영향입니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실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습니다.


클림트는 1910년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르베, 르누아르와 더불어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듬해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미술전에 8점을 출품했는데 <죽음과 삶>이 일등상의 영광을 안겨주었고 로마와 플로렌스를 여행했습니다.

그는 1912년에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의 회장에 선출되고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전시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1913년에는 뮌헨, 부다페스트, 만하임에서 전시를 가졌고 이듬해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참가하고 브뤼셀로 여행했습니다.
말년 작품의 특징은 에로티시즘이었습니다.
여자의 갖가지 요염한 제스처와 누드에서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여성을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한 측면이 있습니다.
단순히 남성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누드가 아니라 여성의 자유로운 모습으로서의 누드, 수치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로운 몸인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가 탐닉한 자신의 성 의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한데, 그는 14명 이상의 사생아를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04-10년의 드로잉들을 보면 다양한 주제로 에로티시즘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묘하게 숨겨진 에로티시즘을 그가 세상 밖으로 내몰았으므로 우리는 상류층 귀부인으로부터 시골 처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여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술사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들의 누드를 그린 화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문자언어에 대한 심한 거부감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문서상으로 작품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작품에 대한 상당 부분이 규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드로잉들을 미술관에 가서 도우미의 도움 없이 관람하듯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클림트가 레즈비언의 사랑에 관심을 가졌음을 <친구>, <두 친구> 등의 드로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레즈비언의 사랑에 대한 에곤 실레의 노골적인 작품은 클림트의 영향입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작품과 동일한 제목으로 더욱 더 선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클림트는 에로틱 드로잉의 일부를 전시를 통해서 그리고 빈 분리파 간행물을 통해 소개했지만 대부분은 소개하지 않은 채 작업실에 남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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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빈 대학 벽화>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와 마취는 1894년 교육부 장관 폰 하텔에게서 빈 대학 대강당의 벽화를 위임받고 2년 후 벽화 스케치를 교육부에 제출했습니다.
1365년에 설립된 빈 대학은 파리 대학을 본떠서 설립되었습니다.
독일 왕 카를 4세가 1347년에 프라하 대학을 설립하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공작 루돌프 4세의 인가를 받아 경쟁적으로 설립한 것입니다.
루돌프의 형제이며 후계자인 알베르트 3세는 1383년에 재정을 늘이고 교육과정을 확대하며 불안정한 학교 시스템을 재정비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빈 대학은 동부 독일어권 지역에서 최고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의학·법학·신학 부문에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클림트가 제출한 그림은 모두 세 점으로 <의학>·<철학>·<법학>이었습니다.
<의학>의 경우 1901년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바이에른 정부가 <음악>을 구입했으므로 클림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작은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의학>을 1898년에 빈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하고, 미완성의 <철학>은 1900년의 빈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습니다.
중산층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지만 산업화와 경제적 붐을 통해 형성된 중산층은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실패와 현대 경제의 실패로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빈의 경제와 문화는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중산층이 정치·사회적으로 영향을 주기에는 힘이 미약하고, 문화적·경제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전통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겼으므로 클림트의 요염한 여인의 누드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좋아했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선정성에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클림트의 화면에 나타난 선정적인 여인의 누드와 해골이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대학에 장식될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항의가 일어났고 논란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빈 대학을 위한 그림으로 인해 빈에서 클림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1901년에도 교수 물망에 올랐지만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로 선임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파리나 베를린과는 달리 빈은 현대 미술이 성장할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를린 분리파가 1900년에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유럽의 중요한 화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07년에 완성한 <의학>·<철학>·<법학> 모두 1945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어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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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와 빈 분리파>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는 1897년 4월 3일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과 함께 빈 분리파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미술가연합이 엥겔하르트의 인상주의 회화를 인정하지 않자 19명의 미술가들이 연합을 탈퇴하여 분리파를 결성한 것입니다.
분리파의 결성은 오스트리아 미술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추진력이 약화되었지만 그 전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폈습니다.
클림트는 5월에 미술가연합에 탈퇴의사를 알리는 내용을 보냈습니다.
그의 편지는 공개되었고 탈퇴가 공식화되었습니다.
분리파 혹은 체제시온secession이란 기성 권위에 반발하는 것으로 전통 단체들과는 함께 작품을 전시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단체와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기성 단체들과 분리한 것을 말합니다.
최초의 분리파는 1892년 뮌헨에서 결성되었는데, 뮌헨 분리파의 지도자는 후에 바실리 칸딘스키의 스승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와 빌헬름 트뤼브너였습니다.
다음으로 빈 분리파가 결성되었고, 2년 후 베를린에서도 분리파가 결성되었는데 막스 리베르만이 이끌었습니다.
기성 단체들에 대한 반발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후원자이며 그보다 한 살 어린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극작가 헤르만 바르(1863-1934)는 빈 분리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당시 사회의 지식인들이 미술가들에게 요구하고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미술을 제공하는 것은 가장 현대적인 회화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시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마술사가 되어야 만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빈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미묘한 기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섬세한 바램, 그리고 끊임없는 희망을 선과 색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만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것들을 창조해야 만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도록 하게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열망을 일깨워놓았습니다.
자 우리에게 참다운 것을 주십시오!
오스트리아인의 미술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오래되고 감미로운 거리의 경관과 공원 난간에 쏟아지는 햇빛, 라일락의 향이 퍼지고 작은 빈 소녀들이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그리고 대문을 지날 때 안뜰에서 울려 퍼지는 왈츠를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영감을 주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왜 자신의 가슴이 행복으로 가득 찼는지 외치기를 바라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그래서 미소를 띠우면서 “그게 바로 진정한 빈이야!”라고 말합니다.
이런 진정한 빈을 여러분이 반드시 그려내야 합니다.

빈 분리파는 1898년 1월에 간행물 『베르 자크룸』을 창간하고 3월에 제1회 빈 분리파전을 개최했습니다.
전시회 포스터를 클림트가 디자인했습니다.
『베르 자크룸』은 콜로만 모저와 알프레드 롤러, 그리고 응용미술학교 교장 바론 펠리시안 폰 미르바흐가 편집을 맡았습니다.
『베르 자크룸』에는 빈 분리파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빈 분리파 미술가들은 이 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간결한 문장으로 공포했습니다.

1. 오스트리아 미술가들의 연합은 순수하게 미술적 관심을 고양시키는 것, 특히 오스트리아 내의 미술적 감각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내 그리고 국외의 오스트리아인 미술가들이 일체가 되어 선두를 달리는 국외 미술가들과 결실을 맺는 교류를 가지며, 오스트리아 내에 비상업적인 전시회 체계를 여는 데 앞장서고, 국외에서 전시회를 열어 오스트리아 미술을 소개함과 동시에 걸출한 미적 성취를 통해 국내 화단에 촉진제가 되며, 또한 오스트리아 미술에 대한 인식을 드높인다.

미술평론가 루돌프 로타르는 1898년에 열린 제1회 빈 분리파전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미술의 최고 목적은 즐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미술을 인류를 위한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는 클림트가 추구한 미학이기도 합니다.

1897년에 올브리히가 디자인한 빈 분리파 건물이 이듬해 개관되자 분리파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1867-1908)는 유럽 근대 건축운동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의 제자입니다.
올브리히는 분리파 건물을 볼록하게 단순한 형태로 디자인하면서 둥근 지붕에 꽃무늬를 장식하여 아르 누보의 장식적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클림트의 스케치가 남아 있어 분리파 건물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 개관과 함께 1899년 11월 제2회 빈 분리파전이 이 건물에서 열렸습니다.
호프만, 모저, 아서 스트라서가 응용미술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게 되자 이 학교는 실질적으로 빈 분리파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빈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아래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기회를 제공하고 빈 현대미술의 선두집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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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20세기 문턱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성적 심리를 연구하여 에로티시즘을 과학으로 체계화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성의 본능(혹은 리비도)이 존재함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에로티시즘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4살 때 빈으로 와서 그곳에서 성장하고 빈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역작 『꿈의 해석』(1899)에서 꿈이 소원실현이 위장되어 표현된 것으로 신경증의 증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내부에서 욕망과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게 막는 금지 사이의 충돌이 타협한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는 꿈의 내용은 잠복된 의미를 베일로 가리고 있는 것으로 유아적 욕망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연구한 결과물에서 성욕의 개념을 관습적 영역을 넘어서 유아시절부터 지속되는 성애적 충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성욕을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에로티시즘이 대중화되었으며, 특히 광고에서 상품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
패션에서는 속옷뿐 아니라 겉옷에서도 성적 매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에로티시즘이 홍수를 이룹니다.
더러 영화는 겉으로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하지만 성행위를 노골적, 선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포르노그래피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의 문제는 예술적 가치보다는 성을 상품화하는 데 있습니다.


클림트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상징주의, 은유, 신화적인 요소를 <다나에>에서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나에>는 <키스>와 같은 시기에 그린 것입니다.
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그는 <유디트 I>에서 이미 실행에 옮긴 적이 있습니다.
<키스>와 더불어서 유명한 이 작품은 여인의 자위행위하는 모습입니다.

다나에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로 다나에가 낳은 아들, 즉 외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란 신탁을 알게 되자 왕은 딸을 청동의 지어진 성채에 가두었습니다.
다나에를 사랑한 제우스는 헤라의 질투를 피하기 위해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변신하여 그녀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가 교접하여 페르세우스를 낳게 합니다.
아크리시오스가 이 사실을 안 건 4년 후였습니다.
왕은 딸과 손자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던지게 했습니다.
다나에는 아들과 함께 바다를 표류하다가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 딕티스에 의해 구조됩니다.
딕티스의 형인 폴리덱테스는 섬의 통치자였습니다.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폴리덱테스는 잔치를 열고 세리포스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말을 할 필씩 갖고 오게 했습니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머리가 뱀인 괴물 고르곤 세 자매의 머리를 베어 말을 살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농담한 것인 줄 알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집행하게 했습니다.

페르세우스의 일에 헤르메스(신들의 사자로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합니다)와 아테네(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지혜, 예술, 전술의 여신입니다)가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헤르메스에게서 둥근 칼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고르곤 세 자매 가운데 메두사만은 불멸하지 않은 존재이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했다고 전해지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 가죽부대에 담았습니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로 날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꺼내 보여주자 폴리덱테스와 섬의 귀족들이 돌로 변해 버렸습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바쳤습니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돌아왔습니다.
게임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원반을 던지게 되었는데 아크리시오스 왕이 그 원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탁이 이루어졌습니다.

클림트는 신화의 모든 내용을 제거하고 제우스가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가 교접할 때 도취되어 희열을 느끼는 장면만 묘사했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성적 환상을 감추기 위해 신화를 즐겨 사용했으며, 다나에는 그에게 안성맞춤의 소재였습니다.
그는 금빛 소나기를 남자의 정자로 상징하여 다나에의 체내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웅크린 채 태아의 포즈를 취한 다나에는 성적 황홀감에 도취되어 눈을 감고 있습니다.
다나에는 클림트만의 소재가 아니었습니다.
독일 작곡가,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1940년에 <다나에의 사랑>을 오페라로 작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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