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와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마치 짐머만이라는 여인이 클림트의 아들을 낳았으나 곧 사망했습니다.
그때부터 클림트는 임산부를 다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겪으면서 <희망 I>에서 임산부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병렬했습니다.
새 생명의 잉태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곧 죽음의 위협을 받고 죽음과 연결된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죽은 아들 오토 짐머만의 얼굴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어 그의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클림트는 헤르마라는 여자를 모델로 고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모델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워 거절했지만 클림트의 집요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모델이란 직업은 천하게 여겨지고 있었지만 클림트는 모델들을 각별하게 대했답니다.
모델 가족의 장례비를 주기도 하고, 집세를 대신 내주기도 해서 모델들은 클림트를 좋아했습니다.

1907-8년에 같은 주제로 <희망 II>를 그리면서 스타일과 상징의 형태를 달리 했습니다.
여기서는 죽음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고 여인의 뒤로 숨어 얼굴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호한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장식적으로 그렸으므로 젖가슴을 드러낸 임산부를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이상화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부 장관 폰 하텔은 그에게 임산부 누드를 전시회에 출품하지 말 것을 권했는데, 가뜩이나 빈 대학 벽화로 여론의 반발이 거센 때 에로틱 작품이 반발을 가중시킬 걸 염려한 때문입니다.
클림트가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으므로 임산부 누드화는 수년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했습니다.

클림트의 회화는 전통이나 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숨김없이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 학문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여하튼 실망하게 되고, 행복도 지식도 안겨주지 못하며, 운명은 필히 존재하고 인간은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과 지식을 추구하며 운명을 피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솔직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은 실레, 코코슈카, 클림트가 대표하는 당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특징입니다.
이들의 자유분방한 사고에 의한 회화가 궁극적으로 미술을 전통이라는 깊숙한 올가미에서 자유롭게 했으며,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케케묵은 미학을 전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들에 의해서 미술은 더 이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로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작품이 꿈이나 잠재의식의 잡힐 듯 말 듯 불투명한 이미지일지라도, 그런 비이성적인 이미지들이 늘 투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우리 사고의 언저리를 맴돕니다.

클림트는 인생의 본질에 관해 탐구했으며 이는 그에게 주요 주제였습니다.
1905년에 그린 <여자의 세 시기>에서 이런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903년에 그린 <망자들의 행렬>은 인생에 대한 어두운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죽음과 삶>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 또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생의 어두운 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실레입니다.
<고뇌>에서 실레는 붉은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지만 장식적인 면이 강했는데 이는 클림트의 영향입니다.
화가로서 불과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산 실레는 인생의 어두운 곳들만 찾아 헤맨 예술가였습니다.


클림트는 1910년 제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르베, 르누아르와 더불어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듬해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미술전에 8점을 출품했는데 <죽음과 삶>이 일등상의 영광을 안겨주었고 로마와 플로렌스를 여행했습니다.

그는 1912년에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의 회장에 선출되고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전시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1913년에는 뮌헨, 부다페스트, 만하임에서 전시를 가졌고 이듬해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참가하고 브뤼셀로 여행했습니다.
말년 작품의 특징은 에로티시즘이었습니다.
여자의 갖가지 요염한 제스처와 누드에서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여성을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한 측면이 있습니다.
단순히 남성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누드가 아니라 여성의 자유로운 모습으로서의 누드, 수치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로운 몸인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가 탐닉한 자신의 성 의식에 대한 표현이기도 한데, 그는 14명 이상의 사생아를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04-10년의 드로잉들을 보면 다양한 주제로 에로티시즘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묘하게 숨겨진 에로티시즘을 그가 세상 밖으로 내몰았으므로 우리는 상류층 귀부인으로부터 시골 처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다양한 여체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술사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여인들의 누드를 그린 화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문자언어에 대한 심한 거부감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문서상으로 작품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작품에 대한 상당 부분이 규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드로잉들을 미술관에 가서 도우미의 도움 없이 관람하듯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클림트가 레즈비언의 사랑에 관심을 가졌음을 <친구>, <두 친구> 등의 드로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레즈비언의 사랑에 대한 에곤 실레의 노골적인 작품은 클림트의 영향입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작품과 동일한 제목으로 더욱 더 선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클림트는 에로틱 드로잉의 일부를 전시를 통해서 그리고 빈 분리파 간행물을 통해 소개했지만 대부분은 소개하지 않은 채 작업실에 남겨두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