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빈 대학 벽화>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클림트와 마취는 1894년 교육부 장관 폰 하텔에게서 빈 대학 대강당의 벽화를 위임받고 2년 후 벽화 스케치를 교육부에 제출했습니다.
1365년에 설립된 빈 대학은 파리 대학을 본떠서 설립되었습니다.
독일 왕 카를 4세가 1347년에 프라하 대학을 설립하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공작 루돌프 4세의 인가를 받아 경쟁적으로 설립한 것입니다.
루돌프의 형제이며 후계자인 알베르트 3세는 1383년에 재정을 늘이고 교육과정을 확대하며 불안정한 학교 시스템을 재정비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빈 대학은 동부 독일어권 지역에서 최고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의학·법학·신학 부문에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클림트가 제출한 그림은 모두 세 점으로 <의학>·<철학>·<법학>이었습니다.
<의학>의 경우 1901년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바이에른 정부가 <음악>을 구입했으므로 클림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작은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의학>을 1898년에 빈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하고, 미완성의 <철학>은 1900년의 빈 분리파전을 통해 소개했습니다.
중산층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지만 산업화와 경제적 붐을 통해 형성된 중산층은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을 전후해서 산업화의 실패와 현대 경제의 실패로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빈의 경제와 문화는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중산층이 정치·사회적으로 영향을 주기에는 힘이 미약하고, 문화적·경제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부르주아는 전통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겼으므로 클림트의 요염한 여인의 누드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더러는 좋아했더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선정성에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클림트의 화면에 나타난 선정적인 여인의 누드와 해골이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대학에 장식될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항의가 일어났고 논란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빈 대학을 위한 그림으로 인해 빈에서 클림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1901년에도 교수 물망에 올랐지만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대로 선임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파리나 베를린과는 달리 빈은 현대 미술이 성장할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를린 분리파가 1900년에 그를 멤버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가 유럽의 중요한 화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07년에 완성한 <의학>·<철학>·<법학> 모두 1945년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규정되어 임멘도르프 궁전에서 불태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