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정보가 많으면 뇌가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우리 뇌는 약 1.4kg의 무게로 두개골 속에 잘 보존되어 있으며, 어림잡아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인 뉴런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복잡한 세포조직체이다.
이런 수백억 개의 세포들은 이들을 통제하는 중심축을 갖고 있는데, 이 중심축의 가장 외피층이 피질로 알려진 회백질grey matter로 구성되어 있다.
각 뉴런은 축색돌기로 연결되어 뇌의 백질white matter을 구성하며, 수상돌기에 연결되어 뉴런이 시냅스synapes를 통해 다른 뉴런과 정보를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뇌가 현재의 시점까지 진화하는 데 수백만 년이 걸렸다.
뇌의 회백질과 백질은 기억, 사고, 이성적 판단, 감각, 그리고 근육의 움직임을 관할한다.
뇌에서 뉴런의 연결망은 우리가 경험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즉 사랑에 빠지거나 소설을 읽거나 땅콩을 먹거나 이를 닦거나 첫사랑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 등을 관장한다.

뇌에 신경망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 일생 동안 계속된다.
이 같은 신경망 혹은 신경회로는 뇌가 수용하는 데이터를 조직적으로 구성하는 틀을 제공한다.
신생아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많은 하드 드라이브와 베이직 프로그램이 내장된 새 컴퓨터라고 말할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데이터가 컴퓨터의 메모리로 들어오면, 메모리는 그 정보들을 접속시키는 최단 경로를 개발한다.
이메일, 워드 프로세서, 그리고 검색엔진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선호도와 반복적인 키워드 학습을 통해 몇 번 키보드를 두드려 단어나 문장을 완성하는 최단 거리나 여러 개의 명령어를 묶어서 하나의 키 입력 동작으로 만드는 매크로macro를 개발한다.
젊고 유연한 뇌가 정보를 접속시키는 최단 경로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신경회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움직이려면 뉴런이 다른 세포나 뉴런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뉴런은 성정하면서 많은 가지, 즉 수상돌기로 갈라지고 인접한 뇌세포의 기다란 연결망인 축색돌기와 접속되어 신호를 받아들인다.
뇌에 있는 수많은 세포들의 연결인 시냅스는 영유아기에 절정에 이른다.
두 살이 되었을 때 뇌의 전두엽에서 시냅스 연결이 가장 활발하게 되는데, 이때 유아의 뇌는 성인의 뇌와 무게가 비슷해진다.
사춘기가 되면 이 시냅스들은 약 60% 정도로 추려져서 성인기를 준비하게 된다.
이것이 신경회로의 연결가능성이 불필요하게 많아지는 걸 막고, 뇌가 필요한 것을 선택적으로 발전시키며, 소량의 정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진화적으로 발전해간 결과이다.
지나치게 정보가 많으면 뇌가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뇌에 대한 연구결과는 환경이 뇌의 기능과 형태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우리의 뇌 기능과 형태가 더 이상 변화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
이처럼 뇌는 환경적 자극과 반응의 조화 속에서 발달한다.

유전자는 뇌 발달에 일부분을 담당하고, 인지능력과 특성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
그런 까닭에 어떤 가계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음악적, 수학적, 혹은 예술적 능력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다.
유전적 요인은 미세한 개성적 특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출생시 헤어졌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비슷한 취향과 취미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 인간의 개체를 구성하는 유전자의 총체로서 게놈genome이 혼자서 모든 걸 좌우하지는 못한다.
2만 개 정도로 추산되는 인간 게놈은 인간의 뇌에서 발달된 수억의 시냅스들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전코드 내의 정보량은 외부환경으로부터의 추가적인 투입이 없다면 수십억 개의 복잡한 신경망을 구성하는 데 불충분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자극이 우리 뇌의 동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뇌와 육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어떻게 진화되는지를 설명했다.
자연선택은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지만, “유리한 변이는 보존되고 해로운 변이는 거부된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모든 생물의 청사진인 DNA로 만들어진다.
유전자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유전자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만, 종종 후손의 유전자는 변이를 겪고 결함을 갖는다.
결함은 어떤 환경에서 후손에게 우성으로 나타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속성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원칙은 우성인자를 갖고 있던 개체가 어떻게 살아남고, 변영하며, 그들의 DNA를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런 유전적 변이는 오랜 시간 동안 발달해온 종들의 엄청난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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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인터넷 검색 때문에 디지털 원주민의 뇌신경망이 변화한다>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하버드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원기회복을 위해 20분 남짓 낮잠을 푹 자게하고 과제를 다양하게 부과한 결과 기술적 뇌 소모의 영향이 감소되었다.
이는 과제를 하면서 신경망이 휴식을 통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과제 수행에 가장 좋은 휴식과 재충전은 60분 정도 낮잠을 잤을 때였다.
이 시간은 수면 중 렘수면REM(rapid eye movement) 단계로 진입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과 일치한다.
렘수면은 수면의 4단계 중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수면 단계로 이 단계는 성인의 수면 시간의 20-25%를 차지하며, 하룻밤 동안 수면 중 4-5번 렘수면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젊은이들은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 채팅, 인스턴트 메시지, 화상회의, 이메일 등으로 사회적 연결망을 만든다.
아동과 십대들도 인터넷 사용에 매우 능숙하다.
이러한 디지털 원주민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만들어나간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경도된 세대뿐만 아니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세대도 첨단기술을 다루는 능력을 급격히 발달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뇌 신경망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디지털 이주민들도 결국 기술적으로 좀 더 능숙해질 것이며, 이로써 뇌 격차는 어느 정도까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수십 년 후에는 노동 인력의 대부분이 디지털 원주민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현재와 같은 뇌 격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그랬듯이 친구를 만나고, 데이트하며, 가족을 만들고, 취업 면접을 보는 등 전통적 대면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세계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성 기술social skill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유리할 것이다.

디지털 원주민이든 디지털 이주민이든 그들 사이의 이메일, 비디오게임, 인터넷 검색 등과 같은 행위는 신경망과 시냅스 연결을 변화시키고 여타의 기술적인 체험들과 더불어 인지능력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는 시각적 자극에 좀 더 빠르게 반응하도록 학습할 수 있으며, 짧은 순간에 이미지를 보고서 판단하는 능력을 높일 수도 있다.
이로써 많은 정보를 재빨리 추려내고, 중요한 내용을 골라내는 데 필요한 개선된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필터는 본질적으로 과부하를 어떻게 제어할지 학습하도록 되어 있으며, 이로써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영국의 노스 움브리아 대학의 팸 브릭스Pam Briggs 교수에 따르면, 건강 정보를 찾는 인터넷 이용자들이 한 사이트에 머무는 시간은 2초 이하이다.
브릭스 교수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발견은 피실험자가 주목하는 사이트가 검색과 관련된 데이터를 포함하고 있는 데 반해 이들이 그냥 지나쳐가는 사이트는 검색과 관련된 데이터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뇌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정보를 분석하고 행동을 진행할지 여부를 동시에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건 디지털 주의력 결핍증digital ADD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속하면서도 기민하게 주의를 집중하도록 맞춰진 신경망을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브레인 iBrain』의 저자는 오늘날의 잦은 인터넷 검색 때문에 디지털 원주민의 뇌신경망이 변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통적인 학습방법을 관할하는 뇌신경망 부분이 약화되고 점차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서 대인적 상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관할하는 뇌신경회로에서 개인 간의 관계를 통제하는 영역이 취약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뇌의 신경회로망 부분들이 변하더라도 우리의 의도에 따라서 어떤 뇌신경회로는 다시 활성화된다는 걸 밝혀냈다.

뇌의 디지털 진화에 의해서 사회적 소외가 증가되고 자연발생적인 대인관계가 약화되고 있지만, 최근의 IQ 측정 결과에 따르면 지적 능력은 상당히 증대되고 있다.
IQ 평균지수는 디지털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서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으며, 멀티태스킹 작업을 하는 능력도 증대되고 있다.
뉴질랜드 유니테크의 신경과학자 폴 키어니Paul Kearney의 보고서는 컴퓨터게임이 실제로 인지능력과 멀티태스킹 능력을 높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 주에 8시간 게임을 하는 피실험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2시간 30분 만에 멀티태스킹 방법을 알아냈다.
로체스터 대학의 연구도 비디오게임 도한 주변시야의 파악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뇌가 계속해서 진화하고 주의 집중을 유도하는 방법들이 개선되면서 뇌의 반응 시간이 짧아지고 두뇌 활동은 더욱 효율적이 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뇌의 능력은 미래 세대에 더욱 증대될 것이며, 이에 따라서 이해력과 지능에 대한 현재의 정의는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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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비디오게임은 인지적 수행능력을 증진시키지만>

『아이브레인 iBrain』(2010, 출판사 知와 사랑) 중에서


비디오게임에 빠진 십대들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조차 전두엽 활동이 저하되었다.
유사한 패턴이 성인들에게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런 것은 뇌가 얼마나 가소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뉴욕의 베스메디컬센터의 제임스 로서James Rosser 박사와 그의 팀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개발된 심리기술mental skill이 실제 생활에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매주 3시간 이상 게임을 한 외과 의사가 복강경 수술 과정에서 게임을 하지 않은 이사에 비해 수술 실수가 40% 이하로 적었다.

비디오게임이 주는 시각적, 정신적 자극은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수십 통의 이메일을 처리하는 컴퓨터 사용과 비슷하다.
디지털 게임과 디지털 상호작용 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반응시간을 빠르게 하고 집중력이나 주변의 시각적 자극을 파악하는 능력을 잠재적으로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메일이나 인터넷 검색 작업은 많은 정보를 재빨리 걸러내는 능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디오게임 연구 결과는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에도 뇌 발달과 행동에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디오게임 자체는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디지털 기기들도 의사소통, 비즈니스, 사회적 교류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문제는 게임, 이메일, 인터넷 검색을 얼마나 해야 발달하고 있는 뇌와 이미 성숙한 뇌에 좋지 않은 양향을 주느냐이다.
따라서 일상에서 뇌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을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적당한 비디오게임은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인지적 수행능력을 증진시키지만, 지나치게 할 경우 자신을 둘러싼 현실세계에 둔감해진다.
적당한 장도의 비디오게임은 패턴인식, 체계적 사고 함양, 좀 더 나은 실행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베이비붐 세대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었던 때를 기억한다.
이들도 인터넷 쇼핑, 이메일 커뮤니케이션, 휴대폰 사용 등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쉽게 적응하지만 그들의 뇌신경회로망은 디지털 시대 이전에 이미 굳어졌다.

따라서 디지털 이주민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했다 하더라도, 이들의 접근방식은 디지털 원주민과는 다르다.
전형적인 디지털 이주민의 뇌에서 사회화와 학습방법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훈련되어 있다.
이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데 익숙하고 좀 더 방법론적으로 학습을 하며 꼼꼼하게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새로운 디지털 언어를 배우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는 이민자들이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새로운 언어 환경에 있는 상황과 흡사하다.
성인이 된 후에 외국어를 배우면, 유아기에 언어를 습득할 때와 다른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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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최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1902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해변의 승마자들 Horsemen on the Beach>은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두 점이다.
동물과 사람의 친근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수평선으로 캔버스를 나누었으며 말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해변의 승마자들>은 마르키즈의 남자와 여자들이 말을 타고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드가가 경마장에서 그린 그림을 상기하게 하는데 고갱은 드가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갱은 <해변의 승마자들>을 그리고 몇 달 후 쓴 편지에서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지만 드가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드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전혀 색을 달리 사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안해냈다.
웃통을 벗은 세 명의 현대 폴리네시아인이 관람자를 향해 등진 모습으로 핑크색 모래사장을 나아가 다른 장소에서 달려온 두 기사와 만나는 장면이다.
백마를 탄 두 사람의 의상은 독특한데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모자가 달렸고 바지는 아주 짧다.
폴리네시아인의 의상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의상을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의상의 승마자를 1901~02년 변형드로잉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든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든 응용함으로써 창작에 있어 과거로 거슬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 제작한 많은 작은 그림에서 초기에 사용했던 모티프를 발견하기란 쉽다.
이는 팔기 쉬운 작품을 볼라르에게 많이 보내려고 한 데서 생긴 일이라고 짐작된다.

1902년 3월 볼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작품을 배편으로 보내겠다면서 몇 점은 약간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이용한 소품들이라고 했다.
아파트 공간이 좁아서 소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면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볼라르는 그에게 캔버스, 접착제, 화선지 등을 보냈고 고갱은 그것들이 사용할 만하다고 답장하면서 특정한 물감이 떨어졌으니 속히 보내라고 했다.
볼라르에게 스무 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Marquesien a la cape rouge>와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주제로 한 것들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신부 하아푸아니로 알려졌다.

1902년 8월 25일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라르에게 보낸 큰 캔버스를 언급하면서 “매우 공을 들여 제작했다”고 적었는데 그 해에 제작한 큰 캔버스는 두 점이다.
그중 중 하나가 <부름 The Call>(고갱 902)이다. 강가에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여인은 미역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걸어가는데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왼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는데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부르는 모습이다.
걷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변형드로잉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옛적 이야기 Barbarous Tales>는 고갱이 마르키즈 섬에서 그린 것들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쪽 빨간 머리의 여인은 <부채를 든 소녀>의 모델 토호타우아이다.
그녀 옆에 부처의 자세로 가부좌를 튼 여인은 실제 여인이 아니라 고갱이 갖고 있던 보로부두르 릴리프 사진의 인물을 삽입한 것이며, 뒤로 맹수의 발톱과 여우의 붉은 머리와 수염, 신부 복장에 초록색 눈을 한 그로테스크한 합성물의 존재는 1895년에 사망한 친구 화가 메이어 드 한이다.

1903년 2월 몽프레에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에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생각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착이 보인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술을 마셨고 타계하기 몇 달 전부터 아편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계한 후 집 옆 우물에서 모르핀이 든 유리병, 주사기, 편두통 치료제가 든 병, 설사와 구토 또는 배앓이를 진정시켜주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생산한 ‘뱀 기름’이 든 병 등이 발견되었다.
타계하기 전 몇 달 동안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 십자가 아래에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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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자신의 집을 ‘쾌락의 집’이라고 부르고 예술품과 장식품으로 꾸몄는데, 창조의 환경을 새롭게 하여 더욱 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집 문지방에 ‘열대의 대가’란 팻말을 붙였는데 행정사무관들은 그를 ‘열대의 악당’으로 불렀다.
그는 나무 깎는 일에 열중했는데, 가장 중요한 조각으로는 자신의 집 문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색을 칠한 것들이다.
오클랜드에서 마오리족의 주거지를 보고 영감을 받은 그는 다섯 개의 기다란 적색 나무를 이용해 문을 장식했다.
각각의 나무 패널은 폭이 약 38cm이다. 패널에 사람, 동물, 식물을 새기고 전체를 채색했다.
오른쪽 길게 세운 패널 중앙 아래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 부분이 있는데 자물쇠를 달았던 곳으로 짐작된다.
맨 위에 ‘쾌락의 집’라고 적혀 있는데 성적 즐거움이 내포된 의미로서의 쾌락의 집이다.
글 양쪽에는 두 여신의 얼굴이 왼쪽을 향하고 있고 오른쪽 여신의 얼굴 앞에는 공작새가 있다.
문 양쪽에는 여인의 누드가 장식되어 있다.
아래 양편에는 1889년과 1890년에 그가 제작한 릴리프 조각과 관련 있는 이미지가 있고 왼편에 ‘신비해져라’ 오른쪽에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글이 각각 적혀 있다.
그 밖에도 그가 1902년에 그린 <두 타히티 사람의 머리 Two Tahitian Heads>와 1898~99년 목판화와 조각으로 제작한 이미지들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히바 오아로 온 뒤에도 고갱은 여전히 원주민을 모델로 그렸으며 정물도 그렸다.
<부채를 든 소녀 Girl with a Fan>는 ‘쾌락의 집’에서 찍은 이웃 섬의 원주민 빨간 머리의 토호타우아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흰 드레스에 가슴을 노출하고 상상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배경을 엷은 금색에 빛을 발하게 했다.
토호타우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배경을 장식하지 않고 대부분 여백으로 남기고 그녀의 얼굴에 역점을 두었다.
토호타우아는 미인이지만 얼굴에 우수가 묻어났고 고갱은 한 순간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다.

몽프레에게 쓴 편지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과업에 대한 총평처럼 들린다.

자네는 오래 전부터 내가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알지 않나.
그것은 바로 모든 걸 시도할 수 있는 권리였네.
내 능력이 부족해서(이런 일을 하기에는 금전적인 어려움이 너무 컸으므로)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기본 원칙은 이미 실천되었네.
대중은 내게 아무 빚도 지지 않았네. 왜냐하면 내 작품은 그들에게 때에 따라서만 유용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자유를 누리는 화가들은 내게 빚을 진 걸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유가 저절로 생겨난 줄 착각하네.
더구나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네.
1902. 10

고갱은 마오리족 옷을 걸치고 살았다.
색이 있는 천을 감아 엉덩이를 가리는 파레우를 입고, 타히티인이 입는 셔츠를 걸치며, 거의 맨발로 지냈고, 초록색 천으로 만든 학생 모자를 착용했다.
그는 보다 원시적인 새로운 환경에서 순수한 마오리의 영혼이 나타난 모습과 풍경을 많이 생산하여 볼라르에게 속히 보내고 싶어 했다.
볼라르는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의사 프리즈오에게 팔았고 고갱의 작품을 통해 이윤을 넉넉하게 내고 있었다.

고갱은 그 지역의 남자와 여자들을 그렸으며 1901년 말에 그린 것이 <그리고 금빛 나는 육체 And the Gold of Their Bodies(Etl’ or de leures corps)>이다.
보라 빛 땅을 바탕으로 두 여인의 누드를 구성하면서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잎이 무성한 풍경을 배경으로 했다.
마오리족 마르키즈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마오리 여인은 세계 어느 여인에 비해 남자와도 같은 육체적 비례를 갖고 있다.
그는 마오리 여인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처럼 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를 하고 있다고 적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피부는 황금빛인데, 더러 사람들은 추하다고 말하지만 온몸이 동일한 색으로 누드일 때도 추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노란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에서도 여인의 피부를 이 색으로 한 것이다.

고갱이 이 섬에서 지낸 기간은 약 18개월이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따라서 작업에 대한 의지도 감소되었다.
1901~03년 마르키즈에서 지낸 말년은 타히티에서 지낸 기간에 비하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었던 시기이다.
1901년에는 왕성한 창작력을 보였지만 이후 병으로 작업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프랑스 공무원들의 지역행정에 반감을 나타냈다.
고갱은 1902년에 92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에 적었다. 『
노아 노아』에서처럼 많은 삽화를 장식하지는 않았지만 삽화를 삽입했고 두 개의 속표지를 4년 전에 제작한 판화를 풀로 붙였으며 바깥 표지를 두 점의 변형 드로잉으로 장식했다.
그가 타계했을 때 그의 집에는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과 『노아 노아』 외에도 삽화를 곁들인 『마오리의 고대 신앙』도 발견되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회화와 조각만큼 중요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된 것은 건강이 나빠지고 다리의 통증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자 그림과 조각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달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글쓰기에만 전념한 적도 있다.

1900년 볼라르와 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자유롭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건강이 창작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 전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는 프랑스 밖으로 자신이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모로코를 방문한 기록이 책으로 나와 인기가 있었고, 또한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잡지 『메르큐르 드 프랑스』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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