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자신의 집을 ‘쾌락의 집’이라고 부르고 예술품과 장식품으로 꾸몄는데, 창조의 환경을 새롭게 하여 더욱 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집 문지방에 ‘열대의 대가’란 팻말을 붙였는데 행정사무관들은 그를 ‘열대의 악당’으로 불렀다.
그는 나무 깎는 일에 열중했는데, 가장 중요한 조각으로는 자신의 집 문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색을 칠한 것들이다.
오클랜드에서 마오리족의 주거지를 보고 영감을 받은 그는 다섯 개의 기다란 적색 나무를 이용해 문을 장식했다.
각각의 나무 패널은 폭이 약 38cm이다. 패널에 사람, 동물, 식물을 새기고 전체를 채색했다.
오른쪽 길게 세운 패널 중앙 아래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 부분이 있는데 자물쇠를 달았던 곳으로 짐작된다.
맨 위에 ‘쾌락의 집’라고 적혀 있는데 성적 즐거움이 내포된 의미로서의 쾌락의 집이다.
글 양쪽에는 두 여신의 얼굴이 왼쪽을 향하고 있고 오른쪽 여신의 얼굴 앞에는 공작새가 있다.
문 양쪽에는 여인의 누드가 장식되어 있다.
아래 양편에는 1889년과 1890년에 그가 제작한 릴리프 조각과 관련 있는 이미지가 있고 왼편에 ‘신비해져라’ 오른쪽에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글이 각각 적혀 있다.
그 밖에도 그가 1902년에 그린 <두 타히티 사람의 머리 Two Tahitian Heads>와 1898~99년 목판화와 조각으로 제작한 이미지들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히바 오아로 온 뒤에도 고갱은 여전히 원주민을 모델로 그렸으며 정물도 그렸다.
<부채를 든 소녀 Girl with a Fan>는 ‘쾌락의 집’에서 찍은 이웃 섬의 원주민 빨간 머리의 토호타우아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흰 드레스에 가슴을 노출하고 상상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배경을 엷은 금색에 빛을 발하게 했다.
토호타우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배경을 장식하지 않고 대부분 여백으로 남기고 그녀의 얼굴에 역점을 두었다.
토호타우아는 미인이지만 얼굴에 우수가 묻어났고 고갱은 한 순간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다.

몽프레에게 쓴 편지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과업에 대한 총평처럼 들린다.

자네는 오래 전부터 내가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알지 않나.
그것은 바로 모든 걸 시도할 수 있는 권리였네.
내 능력이 부족해서(이런 일을 하기에는 금전적인 어려움이 너무 컸으므로)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기본 원칙은 이미 실천되었네.
대중은 내게 아무 빚도 지지 않았네. 왜냐하면 내 작품은 그들에게 때에 따라서만 유용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자유를 누리는 화가들은 내게 빚을 진 걸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유가 저절로 생겨난 줄 착각하네.
더구나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네.
1902. 10

고갱은 마오리족 옷을 걸치고 살았다.
색이 있는 천을 감아 엉덩이를 가리는 파레우를 입고, 타히티인이 입는 셔츠를 걸치며, 거의 맨발로 지냈고, 초록색 천으로 만든 학생 모자를 착용했다.
그는 보다 원시적인 새로운 환경에서 순수한 마오리의 영혼이 나타난 모습과 풍경을 많이 생산하여 볼라르에게 속히 보내고 싶어 했다.
볼라르는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의사 프리즈오에게 팔았고 고갱의 작품을 통해 이윤을 넉넉하게 내고 있었다.

고갱은 그 지역의 남자와 여자들을 그렸으며 1901년 말에 그린 것이 <그리고 금빛 나는 육체 And the Gold of Their Bodies(Etl’ or de leures corps)>이다.
보라 빛 땅을 바탕으로 두 여인의 누드를 구성하면서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잎이 무성한 풍경을 배경으로 했다.
마오리족 마르키즈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마오리 여인은 세계 어느 여인에 비해 남자와도 같은 육체적 비례를 갖고 있다.
그는 마오리 여인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처럼 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를 하고 있다고 적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피부는 황금빛인데, 더러 사람들은 추하다고 말하지만 온몸이 동일한 색으로 누드일 때도 추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노란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에서도 여인의 피부를 이 색으로 한 것이다.

고갱이 이 섬에서 지낸 기간은 약 18개월이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따라서 작업에 대한 의지도 감소되었다.
1901~03년 마르키즈에서 지낸 말년은 타히티에서 지낸 기간에 비하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었던 시기이다.
1901년에는 왕성한 창작력을 보였지만 이후 병으로 작업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프랑스 공무원들의 지역행정에 반감을 나타냈다.
고갱은 1902년에 92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에 적었다. 『
노아 노아』에서처럼 많은 삽화를 장식하지는 않았지만 삽화를 삽입했고 두 개의 속표지를 4년 전에 제작한 판화를 풀로 붙였으며 바깥 표지를 두 점의 변형 드로잉으로 장식했다.
그가 타계했을 때 그의 집에는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과 『노아 노아』 외에도 삽화를 곁들인 『마오리의 고대 신앙』도 발견되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회화와 조각만큼 중요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된 것은 건강이 나빠지고 다리의 통증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자 그림과 조각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달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글쓰기에만 전념한 적도 있다.

1900년 볼라르와 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자유롭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건강이 창작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 전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는 프랑스 밖으로 자신이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모로코를 방문한 기록이 책으로 나와 인기가 있었고, 또한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잡지 『메르큐르 드 프랑스』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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