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최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1902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해변의 승마자들 Horsemen on the Beach>은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두 점이다.
동물과 사람의 친근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수평선으로 캔버스를 나누었으며 말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해변의 승마자들>은 마르키즈의 남자와 여자들이 말을 타고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드가가 경마장에서 그린 그림을 상기하게 하는데 고갱은 드가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갱은 <해변의 승마자들>을 그리고 몇 달 후 쓴 편지에서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지만 드가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드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전혀 색을 달리 사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안해냈다.
웃통을 벗은 세 명의 현대 폴리네시아인이 관람자를 향해 등진 모습으로 핑크색 모래사장을 나아가 다른 장소에서 달려온 두 기사와 만나는 장면이다.
백마를 탄 두 사람의 의상은 독특한데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모자가 달렸고 바지는 아주 짧다.
폴리네시아인의 의상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의상을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의상의 승마자를 1901~02년 변형드로잉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든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든 응용함으로써 창작에 있어 과거로 거슬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 제작한 많은 작은 그림에서 초기에 사용했던 모티프를 발견하기란 쉽다.
이는 팔기 쉬운 작품을 볼라르에게 많이 보내려고 한 데서 생긴 일이라고 짐작된다.

1902년 3월 볼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작품을 배편으로 보내겠다면서 몇 점은 약간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이용한 소품들이라고 했다.
아파트 공간이 좁아서 소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면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볼라르는 그에게 캔버스, 접착제, 화선지 등을 보냈고 고갱은 그것들이 사용할 만하다고 답장하면서 특정한 물감이 떨어졌으니 속히 보내라고 했다.
볼라르에게 스무 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Marquesien a la cape rouge>와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주제로 한 것들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신부 하아푸아니로 알려졌다.

1902년 8월 25일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라르에게 보낸 큰 캔버스를 언급하면서 “매우 공을 들여 제작했다”고 적었는데 그 해에 제작한 큰 캔버스는 두 점이다.
그중 중 하나가 <부름 The Call>(고갱 902)이다. 강가에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여인은 미역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걸어가는데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왼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는데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부르는 모습이다.
걷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변형드로잉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옛적 이야기 Barbarous Tales>는 고갱이 마르키즈 섬에서 그린 것들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쪽 빨간 머리의 여인은 <부채를 든 소녀>의 모델 토호타우아이다.
그녀 옆에 부처의 자세로 가부좌를 튼 여인은 실제 여인이 아니라 고갱이 갖고 있던 보로부두르 릴리프 사진의 인물을 삽입한 것이며, 뒤로 맹수의 발톱과 여우의 붉은 머리와 수염, 신부 복장에 초록색 눈을 한 그로테스크한 합성물의 존재는 1895년에 사망한 친구 화가 메이어 드 한이다.

1903년 2월 몽프레에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에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생각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착이 보인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술을 마셨고 타계하기 몇 달 전부터 아편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계한 후 집 옆 우물에서 모르핀이 든 유리병, 주사기, 편두통 치료제가 든 병, 설사와 구토 또는 배앓이를 진정시켜주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생산한 ‘뱀 기름’이 든 병 등이 발견되었다.
타계하기 전 몇 달 동안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 십자가 아래에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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