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말년에 타히티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많은 산문을 썼다.
더러는 반항적인 태도로 썼지만 그의 지성의 깊이와 인생관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산문도 있다.

“인생이란, 사람이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에 따라서, 아니, 최소한 그 사람이 지닌 의지만큼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덕, 선, 악 따위는 말뿐이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캐묻고 부서뜨려서 어떤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실행할 방법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창조주의 손에 일신을 맡기는 것,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
누구도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악하지 않다.
존재방식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같다.
지도자의 모사들이 그 반대의 말을 했는지 어떤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생애는 부질없이 짧더라도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참여하는 공동의 일에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와 문학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사상은 작품을 위해서만 눈을 갖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쓰면 작품은 짜부러지고 만다.“

1897년 4월 고갱은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사랑하는 딸 알린이 전염성 폐렴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그해 1월 19일에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그는 알린의 사진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스무 살의 딸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다.
이 소식은 한동안 그를 괴롭혔고 자살을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늘어가는 빚과 결막염 등 악화된 건강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딸의 죽음이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렸다.
고갱은 1897년 12월 자살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비소를 먹었으나 다 토해내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또한 자살하려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개미들이 자신의 시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 같아 독약을 많이 마셨는데 심하게 토하느라 독약이 도로 밖으로 나왔는지 그날 밤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거의 4m 가량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묘사했다.
그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관리 매매하는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1897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죽기 전에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마치려 하며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 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은 타히티에서 그린 것들 중 가장 탁월하다.
작품에는 고갱의 글이 적혀 있다.

“모두 비례에 어긋나 이그러진 거대한 모습 그리고 의도적으로 들어올린 두 팔, 두 경악스러움을 응시하며 누가 감히 자신들의 우명을 생각하는가.”

상징주의 시인 앙드레 퐁테나에게 보낸 편지에 고갱은 자신이 창조한 불확실한 모습의 자연과 모호함, 그리고 그것들의 추상성과 음악적 요소를 강조했다.
“저의 꿈은 무형의 것이고, 우화적인 것이 아니라 말라르메가 말한 음악적인 시이며, 대본은 필요 없습니다.”
고갱은 부인했지만 작품에 나타난 상징주의 요소들은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를 시사했다.
그는 인생과 초자연적인 불가사의함이 윈시주의의 모습으로 관찰될 수 없게끔 몰입시키며 인생의 주기를 출생에서 죽음까지 우화적으로 보여주었다.
인간의 숙명을 암시한 이 작품은 암울한 시대에 철학적 명상의 기진맥진함을 시위하며 동시에 인생에 대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작품 제목은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질문은 이미 철학과 종교에서 기원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에도 제기되고 있다.

고갱은 이 작품의 의미에 관해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미지는 드 샤반의 벽화에서 보듯 추상적이며 이야기처럼 서술적이거나 전통을 좇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그림과는 달리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적었다.
그는 인간의 근본, 존재, 운명의 문제와 언어와 자각을 넘어서 무한한 신비스러운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고갱은 관람자가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인간이 태어나고 살다 죽는 과정을 묘사했다면서 잠든 아기와 세 여인으로부터 그림을 읽게 된다고 적었다.

아기 발치에 있는 한 쌍의 여인은 1880년대 후반 고갱이 보로부두르에서 본 릴리프 시리즈의 한 장면으로 부처를 따른 여인들의 모습이다.
고갱은 릴리프에서 영감을 받았다. 팔로 턱을 괴고 관람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꿈>에서도 나타난다.
한 쌍의 여인 오른편 옆 등을 관람자를 향한 여인은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며 브라운색과 황금색이 혼용된 강한 색조이다.
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색조가 한 쌍 여인의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조와는 심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얼굴에는 순진함과 청순함이 나타나 있다.

앉아 있는 세 여인 위 왼편에 자주빛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있다.
두 여인은 다정한 모습으로 산책하며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고” 그들 옆 왼편에 왼팔로 땅을 집고 오른팔을 위로 올려 손을 머리에 닿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거대한 웅크린 모습의 여인은 비례에 맞지 않게 큰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왼편 옆 화면의 중앙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과일을 따는 사람이 있다.
이 남자는 왼손에 과일을 움켜쥐고 있으며 눈은 거의 감은 상태이다.
그의 목과 머리가 유난히 크며 두 팔은 강인해 보이고 조각처럼 서 있다. 팔과 얼굴에 명암이 두드러진 이 남자의 목과 가슴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빛 색조이며 이 색조가 두 다리로 반복된다.
허리에는 흰색 천을 둘렀고 천의 윤관을 프러시안 블루로 표현했다.

이 남자는 유럽과 아시아의 합성물로 얼굴은 인디언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포즈는 렘브란트식(고흐 821-3, 822)으로 이와 같은 포즈의 드로잉을 고갱은 루브르에서 보았다.
렘브란트식 드로잉에는 남자의 얼굴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고갱은 얼굴이 왼쪽을 향하게 했다.

1897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이 작품 왼편 절반에 관해 적었다.

“아이 곁에 고양이 두 마리와 흰 염소도 한 마리 볼 수 있지.
신상이 하나 있는데 신비롭고 리듬 있게 두 팔을 쳐들고 내세를 가리키는 듯한 모양일세. ...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듯한 늙은 여인이 있네.”

고갱이 언급한 신상은 여신 히나로서 꽃처럼 생긴 둥근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불교와 힌두교 조각에서 이런 형태는 일반적이다.
하나는 프러시안 블루와 흰색을 섞어 칠해졌고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게 구성했다.
히나의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은 각각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빛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 것처럼 히나의 몸 전체는 밝고 히나의 턱과 왼족 볼 일부는 빛나지만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그늘이 져서 명암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히나 뒤에는 두 개의 커다란 초록색 광륜이 있고 이는 아시아 조각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만돌라와 같은 기능을 뜻한다. 달의 여신답게 히나는 달빛에 광채를 나타낸 모습이다.

왼편 끝에는 죽음에 다다른 늙은 여인이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운명에 맡긴 듯한 모습이라네.
그녀의 발치에 낯선 흰 새 한 마리가 두 발로 도마뱀을 움켜쥐고 있네.”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 노인의 몸은 낡은 가죽색이며 올리브와 붉은색이 몸의 일부에 강조되어 있다.
눈은 거의 감겨진 상태이고 다리는 거의 검정색으로 죽어가는 신체의 일부처럼 보인다.
여인은 페루의 미라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이런 미라를 1880년대에 본 적이 있으며 이런 형상을 나무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신상 오른편으로 걸어가는 여인과 공작처럼 생긴 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고갱은 1901년 9월 마르키즈 제도의 도미니카에 정착했고 2년 후 그곳에서 타계했다.
지역 주교와의 불화 때문에 교회장은 거행되지 못했으며 몇몇 작품은 음란한 것으로 간주되어 불태워졌다.
남태평양에서 지낸 기간에도 고갱은 프랑스에서 잊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망할 당시에 자신에 대해 내린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해 왔다”는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06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 고갱의 작품 227점이 전시되자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고갱의 업적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전시회는 마티스, 드랭, 뒤피와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대담하고 비자연적인 색채의 사용과 장식적인 단순성을 통해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고갱을 통해 자연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양식과 도상의 범주 안에 이국적, 원시적 요소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은 고갱이 20세기 화가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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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네오다다이스트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재스퍼 존스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한 예술가로, 팝아트에서 본다면 선구자였으므로 워홀이 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했다.
라우센버그는 뉴욕에 거주하는 뒤샹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다이즘을 부활시켰는데 이를 네오다다라 한다.

라우센버그는 1949년 가을에 뉴욕으로 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는데 역사가 오랜 이 학교에 아실 고키와 폴록이 재학한 적이 있다.
이듬해 결혼한 라우센버그와 수잔 웨일은 커다란 크기로 청사진을 제작했는데 청사진은 이 시기에 몇몇 예술가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험되었다.
두 사람은 반윗 텔러 백화점의 쇼윈도를 장식했는데 이 백화점은 지금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아주 고급백화점으로 스페인 사람 살바도르 달리가 쇼윈도를 장식하기도 했다.
1951년 4월 잡지 《라이프 Life》가 두 사람에 관해 보도하여 그들 부부는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의 청사진 한 점이 모마의 사진전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1952년 여름 케이지와 함께 작업하면서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간소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 전체를 흰색으로만 그리거나 검정색으로만 그린 라우센버그의 그림들이 현재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케이지와 함께 참여한 〈연극작품 1번 Theater Piece No. 1〉은 즉흥적인 연기로서 서로의 연기에 별로 관련이 없기 때문에 해프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라우센버그의 양성애가 분명해져서 수잔은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이혼을 요구하며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자 라우센버그는 동성애자 시 툼블리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두 사람은 로마에 함께 머물다가 라우센버그 혼자 북아프리카를 여행하고 1953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툼블리는 이 무렵 어린아이 또는 정신박약아처럼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유사한 그의 회화방법은 평생 달라지지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온 라우센버그는 풀톤 스트리트에 거주하며 케이지와 자주 만났으며, 안무가 머스 커닝햄을 위한 의상과 무대장식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가 재스퍼 존스를 만난 것은 1954년이었으며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어 함께 프리랜서로 백화점 쇼 윈도를 장식하는 일을 했다. 펄 스트리트에 있는 허름한 빌딩에 각각의 화실을 마련한 두 사람은 매일 만나 서로의 공통된 미학에 관해 토론하면서 함께 작업했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쓴 캘빈 톰킨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스와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진지한 평론가였다.
내가 아이디어와 회화에 관해 의논한 화가는 존스가 처음이다.
아니, 시 툼블리가 첫 번째였다.
그러나 툼블리와 나는 평론에 관한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툼블리의 그림은 너무 개인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림을 다 그린 후에야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스와 나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를 거래할 수 있었다. 존스가 내게 ‘엄청난 아이디어를 주마’라고 말할 때면 나는 그를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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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날개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기 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수태고지>이다.
1470~73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867년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기 전까지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에 걸려 있었고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존 러스킨만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1907년, 수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이 출간되면서 사람들은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임을 믿게 되었다.
1475~78년경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삽입한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와 이 작품을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회화기법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산 살비 수도원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편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편의 천사와 배경은 레오나르도에게 그리게 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기법을 응용하여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들은 놀라우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박식한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투사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우며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기름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하지 않고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엑스-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패널이 보인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으므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통과하듯 그의 작품에 빛을 비추면 투명함을 보게 된다.

러스킨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뛰어나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어려운 몸짓을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 쪽으로 등을 3분의 2쯤 돌린 옆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수태고지>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정녀의 기다란 손가락과 가슴의 장식적 요소가 그러하다.
서툰 솜씨도 보이고 특히 동정녀의 팔과 탁자가 원근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고, 조화로우며 깊이가 있고 밝으며 공간감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그의 고유한 창조성을 충분히 알게 해준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관망을 보여주는 요소가 발견되는데 화면 앞의 꽃밭 외에도 천사의 날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실재 새의 날개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다른 화가들은 날개를 지나치게 꾸미고 어색하게 부착시켰지만 그의 날개는 자연에서 관망한 것이다.
인체와 동물의 몸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는 그는 날개가 어깨로부터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착했다.
과거 화가들이 도상적으로 날개를 어깨 조금 아랫부분에 형식적으로 단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면밀한 사실주의와 공상적인 날개를 하고 있는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의 천사들을 비교하면 자연주의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새의 날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비행도구를 고안하게 했다.
그는 1496년 1월 2일 “내일 아침 쇠띠를 만들겠다”고 적었는데 어려서부터 꿈꾸어온 비행도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1482년 그는 롬바르디아에서 “사람이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다.
또한 1490년대에 새들을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비행기구들을 스케치북에 디자인했다.
그는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은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고 적었으며, 1495년 혹은 이듬해에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한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비행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다.
중세에 바이드 드 오네쿠르가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낙하산 같이 생긴 날개를 고안했는데,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한 것으로 봐서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러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는 원리로 날아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러의 지름은 10m였고 날개의 길이는 12m였다.
문제는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는 기계였다.
그는 새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따라서 사다새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절대적인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크기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하여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백 파운드였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다른 재료와 함께 다양한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볍고 강한 재료로써 날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연구하여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금속과 각질을 생각했다.
이 기구의 운전자세를 정하는 것도 문제였기에 여러 형태의 기구를 디자인했다.
그중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카누처럼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으로 커다란 나비 모양의 패달, 키, 등삭, 돛, 핸들, 멜빵, 곤돌라, 승강구,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발명에 신념을 갖고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는 높은 곳에서 비행도구를 실험하고서 자신 있게 적었다.
“기다란 포도주용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날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직접 비행하는 실험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지만 수년 후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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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지워진 드 쿠닝

 

팝아트가 1960년대 미술의 주류로 자리하기까지에는 누구보다도 라우센버그와 존스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60년대 팝아트에 관해 기술한 워홀의 자서전 《파피즘 POPism》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케이지가 야외에서 음악을 발표할 때면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망치를 들고 무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케이지를 도왔다고 하며 당시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펄 스트리트(맨해튼 남쪽 차이나타운에 있다)에 있는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있었으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야외로 나오는 날이면 목욕을 했는데 화실에는 샤워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작은 싱크대에서 마치 창녀들이 고양이 낯짝을 씻듯이 몸을 씻었다.”


평소 워홀을 아끼던 디가 워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두 사람은 티파니 보석상의 쇼 윈도를 장식했는데 본명 대신 엉터리 이름을 사용했지. 밥(Bob, 라우센버그의 애칭)은 상업적 아이디어로 쇼 윈도를 장식했는데 어떤 때는 아주 형편없었어. 앤디, 넌 왜 화가가 안 되었니? 넌 누구보다도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디의 말은 워홀이 왜 순수미술 화가가 되지 않고 상업 미술가 노릇을 하느냐는 의미였다.

워홀은 디로부터 라우센버그와 존스에 관해 전해 들으면서 두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워홀과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은 이 무렵 젊은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었고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야말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정면으로 항거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었다.
두 사람도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초현실주의에서 예술가가 누려야 할 무한한 자유를 발견했다.
그러한 자유를 유감없이 발휘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라면 재료를 기분내키는 대로 사용했고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놀림을 사용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서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도전해야 했다.
어느 날 라우센버그는 21년이나 연배인 드 쿠닝에게서 직접 드로잉을 한 점 구입하면서 자신이 작품을 좀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 쿠닝은 젊은 예술가의 직접적인 도전에 당혹스러웠지만 돈을 받은 마당에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라우센버그는 드 쿠닝의 드로잉에서 가능한 한 지울 수 있는 부분을 지운 후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도 공격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그림 27).

마찬가지로 존스도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붓놀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납화법(Encaustic)을 통해 으시시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러한 색조로 그린 미국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등은 그림이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드러냈다.
이처럼 존스는 20대 중반에 이미 대가의 기질을 드러내며 팝아트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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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를 계획했다
 

  레오나르도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 두 사람 모두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알베르티의 이론을 좋아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40살의 브라만테는 류트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좋아했고 또한 음악감상을 즐겼다.
두 사람은 각기 갖고 있는 지식을 나눴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브라만테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같은 나라 예술가들에게 시기심을 갖지 않았고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칭찬했으며 훗날 라파엘로를 바티칸에 소개했다.

레오나르도는 강둑을 따라서 정돈된 이상적인 밀라노 도시를 구상했다.
노트북을 보면 그는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우리나라의 구처럼)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새로운 도시를 구상하면서 수로가 물품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다.
그는 높고 낮은 두 지역으로 구획하면서 높은 지역에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상류층과 고상한 건물들을 건립하고 수로 가까이 있는 낮은 지역에는 야수들이 돌아다니고 물품들을 보관하며 소매상인과 기술공 그리고 일반 시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오늘 날의 입장에서 볼 때 지독한 엘리트주의지만 레오나르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을 따로 정함으로써 "끊임없는 고난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다.
도로를 따라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도록 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1484년 밀라노를 강타한 전염병 페스트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도시계획에 좀더 적극적이었다.
페스트는 14세기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유럽 인구가 크게 줄 정도였다.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고 사용한 옷과 침구는 사망 후 불에 태워졌다.
땅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할 때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야수들의 시체와 같이 수일만에 썩어 악취를 풍겼으며 자치제 기관에서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했다.
이 병은 공기로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건에 향수를 뿌려 코를 막았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 Decameron』에서 적은 대로 "형제가 형제를 떠나고, 삼촌이 조카를 남겨두고 떠나며, 종종 아내가 남편을 두고" 떠났듯이 최상의 방법은 모든 걸 두고 공기가 좋은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검은 죽음 black death"으로 불리운 페스트는 1479년 피렌체에서도 퍼진 적이 있었지만 수주 후 가라 앉았다.
그러나 밀라노의 경우 전 지역의 사분의 일에서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사망자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르러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은 셈이다.
공작은 피신했고 점성술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굴이나 곧 부패할 수 있는 음식물을 먹지 않았으며, 모든 방문객들을 멀리 떨어져 만났고, 편지는 강한 향수를 뿌린 후 뜯어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전염병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도심과 도시 밖으로 아주 넓게 확장해서 구상했다.
그는 지도와 밀라노에 관한 책자를 참조했는데, 그만이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찍이 알베르티, 비트루비우스Vitruvius, 필라레테Filarete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대에는 브라만테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1439~1501/2)가 관심을 나타냈다.
레오나르도는 도시의 크기를 옛 요새와 새로운 요새 사이인 포르타 로마나로부터 포르타 토사(현재의 포르타 비토리아)까지 확장하고 전 지역의 십분의 일에 대한 구성을 디자인했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 데 있다.
도심에 성벽을 쌓고 한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주거지역이 목걸이처럼 일렬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동네와 마찬가지로 각 주거지역 내에는 집중화된 상업시설(쇼핑센터 같은)이 있고 광장이 있다.

그가 자신의 도시계획을 누구에게 보여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트북에는 "존귀하신 루도비코 경에게"라고 적혀 있지만 미완성의 편지이다.
그가 정녕 자신의 도시계획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엄청난 예산이 드는 거대한 계획을 자신이 맡아서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다.


참고로 도나토 브라만테에 관하여

건축가이면서 화가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는 건축에 있어 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 인물이다.
초기에 회화에 헌신했지만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르비노 근처에서 태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전에서 수학했고 라벤나와 만투아를 여행했다.
처음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477년으로 베르가모의 포데스타 궁전 외관을 장식했다.
그가 밀라노에 안주한 것은 1480년경이었으며 1481년에 현존하는 건축에 관한 디자인을 판화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건축물 산타 마리아 예배당을 디자인했다.
그가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프레스코화는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480~5년경에 그린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다.
브라만테는 1499년 로마로 갔으며 1506년에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에서 화가로 활약한 기록이 없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건축에만 전념한 듯 보인다.
바사리에 의하면 바티칸 스탄즈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에 보이는 건축적 배경을 브라만테가 디자인했다.
라파엘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아테네 학파>에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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