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를 계획했다
 

  레오나르도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 두 사람 모두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알베르티의 이론을 좋아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에 관심이 아주 많았고 40살의 브라만테는 류트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기 좋아했고 또한 음악감상을 즐겼다.
두 사람은 각기 갖고 있는 지식을 나눴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브라만테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그는 같은 나라 예술가들에게 시기심을 갖지 않았고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칭찬했으며 훗날 라파엘로를 바티칸에 소개했다.

레오나르도는 강둑을 따라서 정돈된 이상적인 밀라노 도시를 구상했다.
노트북을 보면 그는 도시를 5천 채의 집이 있는 마을 다섯 개(우리나라의 구처럼)로 구획하고 각 마을에 3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했다.
그는 수로에 의한 십자형의 새로운 도시를 구상하면서 수로가 물품을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고, 정원에 물을 대며, 풍차칸과 수문으로 거리의 먼지를 닦아내게 했다.
그는 높고 낮은 두 지역으로 구획하면서 높은 지역에는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상류층과 고상한 건물들을 건립하고 수로 가까이 있는 낮은 지역에는 야수들이 돌아다니고 물품들을 보관하며 소매상인과 기술공 그리고 일반 시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오늘 날의 입장에서 볼 때 지독한 엘리트주의지만 레오나르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역을 따로 정함으로써 "끊임없는 고난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건물의 외관을 높이고 거리의 폭을 넓게 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이 건물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며 굴뚝을 지붕보다 높게 해서 연기가 위로 흩어지게 했다.
도로를 따라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물이 주거지역에서 흘러나가도록 했다.
노트북에는 건물 내 화장실이 넉넉해야 하고, 걸터앉는 시트를 현대화하여 회전문처럼 360도 회전해야 하며, 천장에 많은 구멍을 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1484년 밀라노를 강타한 전염병 페스트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도시계획에 좀더 적극적이었다.
페스트는 14세기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유럽 인구가 크게 줄 정도였다.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되고 사용한 옷과 침구는 사망 후 불에 태워졌다.
땅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할 때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은 방치되었고 야수들의 시체와 같이 수일만에 썩어 악취를 풍겼으며 자치제 기관에서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했다.
이 병은 공기로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건에 향수를 뿌려 코를 막았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 Decameron』에서 적은 대로 "형제가 형제를 떠나고, 삼촌이 조카를 남겨두고 떠나며, 종종 아내가 남편을 두고" 떠났듯이 최상의 방법은 모든 걸 두고 공기가 좋은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검은 죽음 black death"으로 불리운 페스트는 1479년 피렌체에서도 퍼진 적이 있었지만 수주 후 가라 앉았다.
그러나 밀라노의 경우 전 지역의 사분의 일에서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사망자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르러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은 셈이다.
공작은 피신했고 점성술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굴이나 곧 부패할 수 있는 음식물을 먹지 않았으며, 모든 방문객들을 멀리 떨어져 만났고, 편지는 강한 향수를 뿌린 후 뜯어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전염병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계획을 도심과 도시 밖으로 아주 넓게 확장해서 구상했다.
그는 지도와 밀라노에 관한 책자를 참조했는데, 그만이 도시계획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찍이 알베르티, 비트루비우스Vitruvius, 필라레테Filarete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대에는 브라만테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1439~1501/2)가 관심을 나타냈다.
레오나르도는 도시의 크기를 옛 요새와 새로운 요새 사이인 포르타 로마나로부터 포르타 토사(현재의 포르타 비토리아)까지 확장하고 전 지역의 십분의 일에 대한 구성을 디자인했다.
그의 프로그램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 데 있다.
도심에 성벽을 쌓고 한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주거지역이 목걸이처럼 일렬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 날의 동네와 마찬가지로 각 주거지역 내에는 집중화된 상업시설(쇼핑센터 같은)이 있고 광장이 있다.

그가 자신의 도시계획을 누구에게 보여주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트북에는 "존귀하신 루도비코 경에게"라고 적혀 있지만 미완성의 편지이다.
그가 정녕 자신의 도시계획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엄청난 예산이 드는 거대한 계획을 자신이 맡아서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다.


참고로 도나토 브라만테에 관하여

건축가이면서 화가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Donato di Angelo, 1444년경~1514)는 건축에 있어 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적 인물이다.
초기에 회화에 헌신했지만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르비노 근처에서 태어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궁전에서 수학했고 라벤나와 만투아를 여행했다.
처음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은 1477년으로 베르가모의 포데스타 궁전 외관을 장식했다.
그가 밀라노에 안주한 것은 1480년경이었으며 1481년에 현존하는 건축에 관한 디자인을 판화로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의 첫 건축물 산타 마리아 예배당을 디자인했다.
그가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프레스코화는 밀라노의 브레라Brera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480~5년경에 그린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다.
브라만테는 1499년 로마로 갔으며 1506년에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에서 화가로 활약한 기록이 없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건축에만 전념한 듯 보인다.
바사리에 의하면 바티칸 스탄즈에 있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파 The School of Athens>에 보이는 건축적 배경을 브라만테가 디자인했다.
라파엘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를 <아테네 학파>에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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