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지워진 드 쿠닝
팝아트가 1960년대 미술의 주류로 자리하기까지에는 누구보다도 라우센버그와 존스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
60년대 팝아트에 관해 기술한 워홀의 자서전 《파피즘 POPism》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케이지가 야외에서 음악을 발표할 때면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망치를 들고 무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케이지를 도왔다고 하며 당시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펄 스트리트(맨해튼 남쪽 차이나타운에 있다)에 있는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있었으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야외로 나오는 날이면 목욕을 했는데 화실에는 샤워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작은 싱크대에서 마치 창녀들이 고양이 낯짝을 씻듯이 몸을 씻었다.”
평소 워홀을 아끼던 디가 워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두 사람은 티파니 보석상의 쇼 윈도를 장식했는데 본명 대신 엉터리 이름을 사용했지. 밥(Bob, 라우센버그의 애칭)은 상업적 아이디어로 쇼 윈도를 장식했는데 어떤 때는 아주 형편없었어. 앤디, 넌 왜 화가가 안 되었니? 넌 누구보다도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디의 말은 워홀이 왜 순수미술 화가가 되지 않고 상업 미술가 노릇을 하느냐는 의미였다.
워홀은 디로부터 라우센버그와 존스에 관해 전해 들으면서 두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워홀과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은 이 무렵 젊은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었고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야말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정면으로 항거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었다.
두 사람도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초현실주의에서 예술가가 누려야 할 무한한 자유를 발견했다.
그러한 자유를 유감없이 발휘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라면 재료를 기분내키는 대로 사용했고 추상표현주의의 빠른 붓놀림을 사용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서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도전해야 했다.
어느 날 라우센버그는 21년이나 연배인 드 쿠닝에게서 직접 드로잉을 한 점 구입하면서 자신이 작품을 좀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 쿠닝은 젊은 예술가의 직접적인 도전에 당혹스러웠지만 돈을 받은 마당에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라우센버그는 드 쿠닝의 드로잉에서 가능한 한 지울 수 있는 부분을 지운 후 그것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도 공격할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그림 27).
마찬가지로 존스도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붓놀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납화법(Encaustic)을 통해 으시시한 느낌이 드는 색을 사용했다.
이러한 색조로 그린 미국국기, 알파벳, 숫자, 과녁판 등은 그림이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독특한 미학을 드러냈다.
이처럼 존스는 20대 중반에 이미 대가의 기질을 드러내며 팝아트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