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날개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야코포 살타렐리와 남색을 벌인 것으로 기소되기 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수태고지>이다.
1470~73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867년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기 전까지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에 걸려 있었고 기를란다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존 러스킨만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1907년, 수태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이 출간되면서 사람들은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임을 믿게 되었다.
1475~78년경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삽입한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와 이 작품을 비교하면 레오나르도의 회화기법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산 살비 수도원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편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편의 천사와 배경은 레오나르도에게 그리게 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기법을 응용하여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들은 놀라우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박식한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투사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우며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기름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하지 않고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엑스-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패널이 보인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으므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통과하듯 그의 작품에 빛을 비추면 투명함을 보게 된다.

러스킨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뛰어나다”고 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어려운 몸짓을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 쪽으로 등을 3분의 2쯤 돌린 옆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수태고지>에서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정녀의 기다란 손가락과 가슴의 장식적 요소가 그러하다.
서툰 솜씨도 보이고 특히 동정녀의 팔과 탁자가 원근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고, 조화로우며 깊이가 있고 밝으며 공간감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그의 고유한 창조성을 충분히 알게 해준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관망을 보여주는 요소가 발견되는데 화면 앞의 꽃밭 외에도 천사의 날개를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실재 새의 날개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다른 화가들은 날개를 지나치게 꾸미고 어색하게 부착시켰지만 그의 날개는 자연에서 관망한 것이다.
인체와 동물의 몸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는 그는 날개가 어깨로부터 자란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착했다.
과거 화가들이 도상적으로 날개를 어깨 조금 아랫부분에 형식적으로 단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면밀한 사실주의와 공상적인 날개를 하고 있는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의 천사들을 비교하면 자연주의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알 수 있다.

새의 날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비행도구를 고안하게 했다.
그는 1496년 1월 2일 “내일 아침 쇠띠를 만들겠다”고 적었는데 어려서부터 꿈꾸어온 비행도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1482년 그는 롬바르디아에서 “사람이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다.
또한 1490년대에 새들을 관찰했으며 일종의 비행원리를 정립하면서 몇 가지 비행기구들을 스케치북에 디자인했다.
그는 “새는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 기능을 하는 기구이며 인간은 이와 같은 모든 운동을 하는 기구를 재생할 능력이 있다”고 적었으며, 1495년 혹은 이듬해에 이 기구를 물리적으로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새와 같은 날개를 달고 싶어한 것은 고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일찍이 선각자들이 불투명하게나마 생각한 비행운동에 대한 자료를 두루 살펴보았다.
중세에 바이드 드 오네쿠르가 인간이 부착할 수 있는 낙하산 같이 생긴 날개를 고안했는데, 레오나르도의 고안과 유사한 것으로 봐서 레오나르도가 그의 드로잉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러를 빠르게 회전하여 상승하는 원리로 날아 낙하산의 원리로 땅에 무사히 내리는 것에 관해 연구했다.
그가 생각한 프로펠러의 지름은 10m였고 날개의 길이는 12m였다.
문제는 프로펠러를 돌릴 수 있는 기계였다.
그는 새 날개의 무게와 면적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따라서 사다새 같은 일부 커다란 새의 경우 날개가 아주 짧은 데 반해 박쥐의 경우 몸체에 비해 아주 커다란 날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절대적인 원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드로잉을 보면 그는 실재 크기로 고안하면서 지레를 이용하여 박쥐와 같은 커다란 날개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된 날개의 무게가 2백 파운드였다.
그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다른 재료와 함께 다양한 날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볍고 강한 재료로써 날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연구하여 석회를 바른 강질의 소나무, 반수를 먹인 실크, 털을 덮은 캔버스, 기름이나 명반을 바른 가죽, 밑판에 갈대를 엮은 어린 소나무를 생각했고 탄력을 위한 금속과 각질을 생각했다.
이 기구의 운전자세를 정하는 것도 문제였기에 여러 형태의 기구를 디자인했다.
그중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카누처럼 생긴 것으로 노를 젓듯이 운전하는 것으로 커다란 나비 모양의 패달, 키, 등삭, 돛, 핸들, 멜빵, 곤돌라, 승강구, 조종 케이블, 완충물과 발판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착륙장치 등을 갖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발명에 신념을 갖고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는 높은 곳에서 비행도구를 실험하고서 자신 있게 적었다.
“기다란 포도주용 가죽부대를 허리띠에 부착하고 이 기구를 탄 채 호수 위를 날 경우 호수에 빠지더라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구에는 날개를 움직이는 엔진이 부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직접 비행하는 실험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친구 파지오 카르다노의 아들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기록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이 기구를 몇 차례 실험했지만 비행물체의 무게를 감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명을 포기해야 했지만 수년 후 피렌체에서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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