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뒤샹과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마르셀 뒤샹은 <초상 둘시네아>와 <소나타>에 관해 말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입체주의에 관한 나의 이해였네.
일반적으로 인물을 구성하는 방법과 원근법을 무시한 작품들이었어.
같은 사람을 네 번 또는 다섯 번 누드와 드레스 차림으로 반복해서 그렸어.
둘시네아의 독특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본래의 의도였고, 동시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 입체주의를 비이론화한 것이었네.”
뒤샹에게 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1911년경이었다.
“내가 둘시네아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은 여인을 다섯 이미지로 그린 후 세 여인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했고,
두 여인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 작품에 이미 운동에 관한 개념이 있었네.
잠재적이었는지 몰라도 난 둘시네아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운동을 묘사했네.”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가 짝사랑한 여인의 이름이자 뒤샹이 뉠리 거리에서 만난 여인에게 상상으로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인 1911년 10월 그는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렸다.
뒤샹은 슬픈 젊은이는 가족을 재회하기 위해 파리에서 루앵으로 가는 기차를 탄 자신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작품에서 젊은이의 모습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이 현저했을 뿐이라고 훗날 회상했다.
이 시기의 입체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는 해부학적이거나 관망적이 아닌 도식적인 선의 반복이었다.
평행되는 선들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상이한 위치를 운동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젊은이를 로봇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탁한 노란색, 브라운색, 그리고 검정색을 주로 사용했다.
어떤 운동인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그가 기교를 사용하여 운동을 나타냈고 그가 말한 “초보적 평행주의”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작가가 스냅사진을 연결해서 사람과 동물의 운동을 보여준 데서 기교를 발견했다.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는 1882년 카메라 셔터를 발명하여 움직이는 물체를 한 장의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런 사진을 1893년에 <라 나투르>에 기고했다.
뒤샹은 그의 사진을 봐서 운동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인 에드위어드 머이브릿지도 배터리를 카메라에 연결시켜 날아가는 새와 달리는 말의 운동을 정지한 모습으로 찍어 <운동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1885년에 출간했는데,
책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24개의 이미지로 나열되어 있었다.
뒤샹도 이 책을 보았을 성 싶은데 그는 머이브릿지의 책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마레의 사진을 <라 나투르>에서 보고 운동의 개념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의 그의 말은 마레의 사진을 상기하게 한다.
“나의 목적은 정지한 운동을 재현하는 것으로 정지한 구성으로 다양한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영화에서의 효과를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사람의 운동을 뼈다귀의 모습이 아닌 선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제한하고, 제한하며, 또 제한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으며, 동시에 나의 목적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을 그리고 난 후 나는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점, 선, 혹은 아주 전통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뒤샹보다 한 해 혹은 그 이전부터 운동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미래주의자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뒤샹의 말에 의하면 1912년 2월에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열린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갔지만 그때 그는 이미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완성했다고 한다.
뒤샹은 곧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윌리엄 루빈은 이 작품은 걸작이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제목만큼은 문제를 야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남자 누드를 그릴 때는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초인적인 힘을 과시하여 신성이나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위상을 나타낸 반면 여자 누드를 그릴 때는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 목욕하거나, 미모를 뽐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누드 모델에게 선정적인 동작을 취하도록 요구했지만 누드를 운동의 모습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지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했으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뒤샹은 말했다.
“그것은 (습작 드로잉을 말함) 그저 모호하게 연필로 계단을 오르는 누드를 그린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뮤지컬 코미디를 보면 많은 계단이 있지 않은가.”
그가 1911년 12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에 나타난 계단은 어린 시절을 보낸 블랭빌의 집 계단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가 이듬해 1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먼저 것에 비해 사람의 모습이 더욱 생략되었다.
스무 장면이 넘는 여인의 스타카토 같은 장면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로봇처럼 보인다.
그는 브라운색, 회색, 푸른색을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분석적 방법으로 서로 겹치게 사용했다.
그는 유머 외에도 입체주의 그림에 애욕적인 요소를 보탰는데 이는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그것이 자연주의의 사슬을 영원히 끊는 것이 되리라 예견할 수 있었다고 1945년 캐서린 드라이어에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그린다면서 그것을 정물화로 그릴 수는 없다.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나타내는 데 기하와 수학은 불가피하다.
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뒤샹은 한 달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화랑 달마우에서 열린 첫 입체주의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19살의 화가 지망생 호앙 미로의 마음을 크게 휘저었다.
미로는 뒤샹의 작품에 인상이 깊었던지 12년 후에 자신의 드로잉에 같은 제목을 붙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는 1913년 2월 17일 뉴욕의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Armory Show에 출품되었다.
미술의 황무지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모더니즘이 대거 소개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도 수백 점 소개되었는데 아모리 쇼에 소개된 작품은 모두 1,650점이 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앞에 운집할 정도로 미국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작품을 보고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나바조 담요 같다고 말했다.
언론은 뒤샹의 작품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이브닝 선>지에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교양없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미국사람들은 미술에서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을 상식 밖의 일로 여겼다.
뒤샹의 작품은 입체주의만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것처럼 평론가들에게 비쳐졌다.
그러나 유럽의 모더니즘에 호의를 나타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중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미국사람들이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뒤샹은 네 점을 출품했는데 <체스두는 사람들>과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변호사 아서 제롬 에디가 구입했고,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는 젊은 화가 마니에르 도손이 구입했다.
전시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샌프란시스코의 골동품상 프레데릭 토리는 전시회를 관람한 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뉴멕시코 주의 알부쿼크 역에 내려 전시회를 기획한 월터 패츠에게 전보를 쳤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사겠음. 보관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