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여성관
 

  뭉크는 <다그니 유을>이란 제목으로 그녀의 전신을 그렸습니다.
짝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전신으로 그릴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짝사랑은 정말이지 괴로운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걸 내주고 여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데 여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뭉크가 질투한 건 당연합니다.

<다그니 유을>에서 손과 발의 묘사가 생략된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붓질이 전체적으로 거칠고 의상 아랫부분에는 수직과 수평의 붓자국이 선명합니다.
마른 붓으로 물감을 조금 찍어서 신속하게 칠함으로서 거칠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표현주의 회화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으며
그가 일찍이 이런 선구자적인 행위를 한 것은 지적할 만합니다.
거친 감정은 거친 붓질로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붓질을 프랑스 화화에 대한 천박한 모방이라고 혹평했지만, 뭉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물감을 거칠게 칠했습니다.
자신의 절박한 감정을 표현하는 작업인데 물감을 얌전하게 그리고 매끈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뭉크는 다그니가 자신보다는 친구를 사랑한 데 대해 질투를 느꼈습니다.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겠지요.
시셋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하는데 웃기지도 않는 말입니다.
고약한 변명입니다.
헤어지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가치와 아름다움은 사랑입니다.
뭉크는 실연의 괴로운 감정을 <질투>란 제목의 그림으로 여러 점 그리면서 자신의 아픔을 달랬습니다.

그는 <질투>에서 자신의 외로운 모습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배경에 벌거벗은 요염한 자태의 다그니가 친구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을 삽입했는데, 그녀와 함게 서 있는 남자 프시비지예프스키는 마냥 즐거운 모습입니다.
<질투 II>에서 뭉크는 다그니와 프시비지예프스키가 열렬히 키스하는 장면을 배경에 넣고 외로움과 더불어 경악해 하는 자신의 얼굴을 화면 앞에 부각시켰는데, 사랑과 질투의 심리가 정확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뭉크의 얼굴이 정면으로 클로즈업되어 감정의 격렬함이 관람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뭉크가 실연을 맛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실패와 질투를 통해서 그는 더욱 더 여성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고 싶고 여인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실연의 아픔이 너무 커서 사랑하는 것 자체가 두렵게 되었습니다.

그의 여성관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여인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랑할 만한 대상이다.
그러나 탐욕이 었어서 결국 남자를 절망에 빠뜨리고 죽음에 몰아넣는 마귀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의 여성관은 피해망상증과도 같았습니다.
그에게 여성에 대한 증오가 자라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후 그가 여러 점으로 제작한 <흡혈귀>는 남자가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랑에 대한 표현의 행위이지만,
여자는 드라큘러처럼 남자의 피를 빨아먹기라도 하듯 목 뒤에 입을 갖다대고 있는 장면입니다.
뭉크에게 얼마나 여자에 대한 피해의식이 심화되어 있었던지 알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여자를 증오하면서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뒤샹과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마르셀 뒤샹은 <초상 둘시네아>와 <소나타>에 관해 말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입체주의에 관한 나의 이해였네.
일반적으로 인물을 구성하는 방법과 원근법을 무시한 작품들이었어.
같은 사람을 네 번 또는 다섯 번 누드와 드레스 차림으로 반복해서 그렸어.
둘시네아의 독특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본래의 의도였고, 동시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 입체주의를 비이론화한 것이었네.”

뒤샹에게 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1911년경이었다.

“내가 둘시네아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은 여인을 다섯 이미지로 그린 후 세 여인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했고,
두 여인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 작품에 이미 운동에 관한 개념이 있었네.
잠재적이었는지 몰라도 난 둘시네아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운동을 묘사했네.”

둘시네아는 돈 키호테가 짝사랑한 여인의 이름이자 뒤샹이 뉠리 거리에서 만난 여인에게 상상으로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인 1911년 10월 그는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그렸다.
뒤샹은 슬픈 젊은이는 가족을 재회하기 위해 파리에서 루앵으로 가는 기차를 탄 자신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작품에서 젊은이의 모습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고 슬픔 또한 충분하지 않은 채 입체주의의 영향만이 현저했을 뿐이라고 훗날 회상했다.
이 시기의 입체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는 해부학적이거나 관망적이 아닌 도식적인 선의 반복이었다.
평행되는 선들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상이한 위치를 운동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젊은이를 로봇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탁한 노란색, 브라운색, 그리고 검정색을 주로 사용했다.
어떤 운동인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그가 기교를 사용하여 운동을 나타냈고 그가 말한 “초보적 평행주의”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작가가 스냅사진을 연결해서 사람과 동물의 운동을 보여준 데서 기교를 발견했다.

생리학자 에티엔 쥘 마레는 1882년 카메라 셔터를 발명하여 움직이는 물체를 한 장의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런 사진을 1893년에 <라 나투르>에 기고했다.
뒤샹은 그의 사진을 봐서 운동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인 에드위어드 머이브릿지도 배터리를 카메라에 연결시켜 날아가는 새와 달리는 말의 운동을 정지한 모습으로 찍어 <운동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1885년에 출간했는데,
책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24개의 이미지로 나열되어 있었다.
뒤샹도 이 책을 보았을 성 싶은데 그는 머이브릿지의 책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마레의 사진을 <라 나투르>에서 보고 운동의 개념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의 그의 말은 마레의 사진을 상기하게 한다.

“나의 목적은 정지한 운동을 재현하는 것으로 정지한 구성으로 다양한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영화에서의 효과를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
나는 사람의 운동을 뼈다귀의 모습이 아닌 선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제한하고, 제한하며, 또 제한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으며, 동시에 나의 목적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을 그리고 난 후 나는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점, 선, 혹은 아주 전통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것들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뒤샹보다 한 해 혹은 그 이전부터 운동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미래주의자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뒤샹의 말에 의하면 1912년 2월에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열린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갔지만 그때 그는 이미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완성했다고 한다.

뒤샹은 곧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렸는데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삽입된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윌리엄 루빈은 이 작품은 걸작이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제목만큼은 문제를 야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남자 누드를 그릴 때는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초인적인 힘을 과시하여 신성이나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위상을 나타낸 반면 여자 누드를 그릴 때는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 목욕하거나, 미모를 뽐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누드 모델에게 선정적인 동작을 취하도록 요구했지만 누드를 운동의 모습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지 순수미술에서는 가당치 않은 발상이었다.
뒤샹은 코믹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유머를 순수미술에 도입했으며, 이런 점이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해 뒤샹은 말했다.

“그것은 (습작 드로잉을 말함) 그저 모호하게 연필로 계단을 오르는 누드를 그린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뮤지컬 코미디를 보면 많은 계단이 있지 않은가.”

그가 1911년 12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1>에 나타난 계단은 어린 시절을 보낸 블랭빌의 집 계단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가 이듬해 1월에 그린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는 먼저 것에 비해 사람의 모습이 더욱 생략되었다.
스무 장면이 넘는 여인의 스타카토 같은 장면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로봇처럼 보인다.
그는 브라운색, 회색, 푸른색을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분석적 방법으로 서로 겹치게 사용했다.
그는 유머 외에도 입체주의 그림에 애욕적인 요소를 보탰는데 이는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그것이 자연주의의 사슬을 영원히 끊는 것이 되리라 예견할 수 있었다고 1945년 캐서린 드라이어에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그린다면서 그것을 정물화로 그릴 수는 없다.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나타내는 데 기하와 수학은 불가피하다.
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뒤샹은 한 달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화랑 달마우에서 열린 첫 입체주의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19살의 화가 지망생 호앙 미로의 마음을 크게 휘저었다.
미로는 뒤샹의 작품에 인상이 깊었던지 12년 후에 자신의 드로잉에 같은 제목을 붙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는 1913년 2월 17일 뉴욕의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Armory Show에 출품되었다.
미술의 황무지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모더니즘이 대거 소개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는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도 수백 점 소개되었는데 아모리 쇼에 소개된 작품은 모두 1,650점이 넘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앞에 운집할 정도로 미국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작품을 보고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나바조 담요 같다고 말했다.
언론은 뒤샹의 작품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이브닝 선>지에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교양없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미국사람들은 미술에서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을 상식 밖의 일로 여겼다.
뒤샹의 작품은 입체주의만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것처럼 평론가들에게 비쳐졌다.

그러나 유럽의 모더니즘에 호의를 나타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이었고 판매된 174점 중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미국사람들이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뒤샹은 네 점을 출품했는데 <체스두는 사람들>과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변호사 아서 제롬 에디가 구입했고,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는 젊은 화가 마니에르 도손이 구입했다.
전시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샌프란시스코의 골동품상 프레데릭 토리는 전시회를 관람한 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뉴멕시코 주의 알부쿼크 역에 내려 전시회를 기획한 월터 패츠에게 전보를 쳤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사겠음. 보관 바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 중에서

재스퍼 존스가 소문으로만 듣던 뒤샹을


재스퍼 존스가 소문으로만 듣던 뒤샹을 직접 만난 것은 1959년이었다.
존스는 미술사 전체를 통해 골고루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한스 홀바인, 조반니 피라네시, 폴 세잔느, 에드바르트 뭉크, 파블로 피카소, 르네 마그리트, 바넷 뉴먼, 그리고 뒤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존스는 “나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 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서조차 벌거벗겨지는 신부〉(그림 20), 세잔느의 〈일광욕하는 사람〉(1885), 그리고 라우센버그의 작품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1960년대 초 존스는 뒤샹으로부터 미학적인 영향을 받았고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나눈 관심사가 작품에 반영되었다.
존스의 작품 〈도착/출발〉(1963-64)에 써넣은 “조심스럽게 다룰 것(Handle with Care)”이라는 문구는 뒤샹의 〈큰 유리〉로부터 구한 아이디어였는데 워홀도 이와 같은 글을 그림에 써넣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워홀이 작품에 써넣은 글을 존스가 도용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워홀의 그림에 나타난 글에 관해 언급할 때 알아보기로 한다.
1957년에 이미 평론가들은 뒤샹이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사용한 방법과 존스의 작품을 연계하여 존스를 네오다다이스트라고 불렀다.
존스는 라우센버그와 함께 여러 차례 필라델피아 뮤지엄(Philadelphia Museum)에 가서 거기에 소장된 뒤샹의 작품들을 관람하면서 뒤샹의 천재성에 탄복했다.

평론가 니콜라스 칼라스는 1959년에 뒤샹을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화실로 데려가서 뒤샹이 두 사람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존스는 1960년에 뒤샹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뒤샹을 “20세기 개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존스는 1962년에 처음으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를 혼용한 〈다이빙 선수〉(그림 35)를 그렸는데 두 개의 발자국과 네 개의 손자국을 회화적인 요소로 캔버스에 남겼다.
그림 왼쪽에는 색비교판 같은 둥근 다색판을 그려 넣고 옆에는 엷은 회색부터 진한 회색까지 점진적으로 달라지는 다양한 색질을 삽입했는데 뒤샹이 1919년에 그린 마름모꼴의 색비교판 같은 그림 〈너는 나를〉을 상기하게 했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 글자가 나타났으며 물감을 흘리는 추상표현주의의 기교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했는데 라우센버그의 그림에서도 이러한 기교는 늘 나타나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존스는 새로운 예술이 과거예술에 대한 비평이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난 예술이 예술을 비평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새로운 예술과 과거예술의 관계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는 과거예술도 새로운 예술의 비평이 될 수 있다고 보며 같은 이치로 새로운 예술이 과거예술의 비평이 된다고 생각한다.

존스는 이렇게 새로운 예술과 과거예술의 상관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새로운 예술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당시의 과격한 아이디어를 무턱대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과거예술을 사변적으로 곡해해서 자신의 회화에 걸맞는 요소로 사용했으며 곡해는 그의 창작의 기본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난당한 뭉크의 <마돈나>
 

  <절규>와 함께 도난당한 작품이 <마돈나>인데, 이 작품 또한 뭉크의 대표작입니다.
그는 <절규>를 그린 후 곧 <마돈나>에 대한 습작을 종이에 목탄으로 하기 시작했고 유화로 완성한 건 1894~5년이었습니다.
여자의 요염함과 성적으로 남자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사랑을 만끽하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어둡고 음침한 색들을 보면 단지 가장 아름다운 여인 혹은 가장 탐스러운 여인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여인의 이면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려고 한 저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마돈나와 메두사를 합성시킨 것으로 여인의 양면성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런 우울한 그의 사고는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마돈나에 액자틀을 그려넣은 후 그 위에 태아와 정충들을 올챙이가 꿈틀대는 것처럼 장식했습니다.
성교의 극치는 희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태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과 수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 작품의 모델이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화가는 과장하고 왜곡하더라도 실재 모델이 있어야 그릴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의 제자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긴 것은 유명합니다.
<마돈나>의 실재 모델은 뭉크가 사랑한 여인 다그니 유을입니다.

뭉크를 유명하게 만든 곳은 베를린입니다.
노르웨이는 당시 변방이었으므로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로 오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검은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작은 술집에 자주 갔는데, 그곳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시인, 작가, 극작가, 화가, 조각가, 미술사가, 평론가, 교수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새 술을 마시며 인생과 철학 그리고 예술에 관해 논했습니다.
뭉크가 가까이한 두 작가가 있었는데, ‘검은 돼지’의 리더 스트린드베르크와 스타니슬라브 프시비지예프스키였습니다.
스트린드베르크는 여성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열애와 회의 그리고 이혼과 방황을 되풀이한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상징주의 작가 프시비지예프스키는 니체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피아노를 잘 쳤으며 쇼팽에 관해 특이한 해석을 했고 뭉크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쓴 것도 그였습니다.

뭉크, 스트린드베르크, 프시비지예프스키 이 세사람은 노르웨이 여인 다그니 유을을 두고 사각관계를 벌였습니다.
다그니는 뭉크의 어린 시절 친구로서 음악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유학와 있었는데 뭉크가 그녀를 ‘검은 돼지’로 데리고 왔습니다.
스트린드베르크와 프시비지예프스키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뭉크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경쟁하듯 그녀를 사랑했지만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지예프스키와 결혼했으며 몇 년 후 로시아 청년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돈나>는 뭉크가 ‘사랑’이란 제목으로 연작을 제작한 것들 중 중심이 되는 작품이고 이 연작에 <절규>, <흡혈귀>, <키스>, <목소리>, <질투> 등이 포함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뭉크는 <절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절규>는 1893년 서른 살때 판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을 사용해서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뭉크의 혼의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 실재로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그림을 통해 무언의 절규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1893년이면 반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 3년 되는 해인데, 반 고흐의 편지에서도 노이로제란 말이 언급되었듯이 이 시기에 현대사회에 대한 불안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이 문명에 대해 불안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폴 고갱은 이 시기에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떠났습니다.
뭉크가 불안을 참지 못하고 절규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반 고흐 그리고 고갱과 어울릴 만한 고독한 화가였습니다.
<절규>에서 뭉크는 자신의 모습을 만화처럼 과장하고 왜곡시켰으며, 몸을 S자 모양으로 비틀고 입을 크게 열고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해 하는 자신을 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화상일 뿐 아니라 반 고흐와 고갱의 모습이기도 하며 당시의 불안한 모든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노이로제가 심화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뭉크의 노이로제는 무엇인가 그는 왜 불안한 생을 살았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작품을 포함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뭉크는 1895년에 <절규>를 채색석판화로 다시 제작하면서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고 적었는데 그는 그 날의 체험을 잊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절규가 자연을 관통했다고 믿었다면 이는 거의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자연과의 합일을 의미합니다.
뭉크 자신 자연의 일부가 되었음을 체험한 것이란 말이지요.
그는 자신의 절규가 자연을 관통할 때 황혼의 하늘이 핏빛으로 넘실되는 것으로 착시현상을 일으켰습니다.
하늘이 진동하자 대지가 거친 호흡을 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그는 느낌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회화는 궁극적으로 표현인데 그가 이 점을 표현주의가 공식적으로 표방되기 12년 전에 이미 이 작품을 통해 시위한 것입니다.

뭉크가 <절규>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었던지는 동일한 제목으로 미디움을 달리 해서 제작한 것 말고도 변형시킨 작품의 수가 50종이 넘는 데사 잘 알 수 있습니다.
뭉크는 문학에 관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1909년에는 삽화를 넣은 그림 산문집 <알파와 오메가>를 만들었는데, 읽어보면 그가 화가이자 시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곧 뭉크의 심상을 나타낸 것이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하여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습니다.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집니다.
뭉크가 소장한 책들 중에는 <니체 전집>과 14권의 <키에르케고르 전집>이 있습니다.
<절규> 외에도 뭉크의 작품 <절망> 그리고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모두가 불안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배경은 다리 위이거나 거리이지만 내면세계를 활보하는 자아의 모습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 잠재의식에 관한 관심, 자아에 대한 발견은 뭉크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주제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