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팝 아트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뉴욕 스쿨의 주류는 추상표현주의였다.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폴록,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의 그림들을 묶어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고 구별했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로드코, 스틸, 뉴먼의 그림들을 묶어 컬러필드(Color-Field)라는 말로 분류했다.
추상표현주의의 이 두 가지 회화경향은 1950년대 말까지 뉴욕 스쿨에서 두드러졌다.

추상표현주의가 한창 성행하던 1950년대 중반에 활약하기 시작한 라우센버그와 존스 는 앞서 언급한 대로 팝아트와 추상표현주의 사이에 교량 역할을 했다.
기분내키는 대로 빠르게 붓질하거나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교를 사용한 것은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었으며, 일상의 물질을 콜라주하는 방법은 팝아트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고 버려진 쓰레기를 조립하여 사용한 것은 조립예술과 쓰레기 예술의 선구적인 행위였다.
1960년대 초에는 두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팝아트가 리히텐슈타인과 워홀에 의해서 행위되기 시작했다. 한편 1960년대 후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미니멀리즘의 요소들을 1950년대 말 프랭크 스텔라의 그림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가 황혼에 접어든 1960년대 초 새로운 기류를 먼저 형성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는 이 책의 주인공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일찌감치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커다란 화실과 집을 장만했다.
1961년 라우센버그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커다란 화실을 장만했으며 존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연안의 섬에 집을 장만하고 그곳에서 작업하는 일이 잦았다.

라우센버그의 실크스크린은 유명했다.
1962년 여름 롱아일랜드에서 판화 전문 상점을 운영하는 타티아나 그로스맨이 라우센버그에게 한정판(U.L.A.E., Universal Limited Art Editions) 석판화 제작을 의뢰했다.
라우센버그는 석판화를 제작하면서 사진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하는 방법을 보태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이러한 기교에 관해 워홀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여러 방법으로 실크스크린을 실험한 라우센버그는 TV 채널을 바꿀 때마다 나타나는 영상들을 혼용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TV와 잡지에서 주로 이미지를 구했다.

곧 워홀의 실크스크린에 관해 언급하겠지만, 워홀이 영부인이었다가 이제는 젊은 미망인이 된 미녀 재키를 실크스크린으로 수없이 제작하고 있을 때 라우센버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여 캔버스에 부착했다.
〈항공로〉(그림 45)에서 그는 우주비행사와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서진 건물, 토마토 상자, 낙서 등 사람들에게 낯익은 팝 이미지들을 회화적인 요소로 캔버스에 구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는 아주 단순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 물이 든 컵이나 종이 벽지를 바른 욕실,…… 난 그것들로 사회문제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재난들을 중화시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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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코가 부러지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반니 문하에서 조각을 수학했다.
베르톨도는 상 마르코 수도원 근처에 있던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
그는 작은 청동조각을 주로 제작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그로부터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제자 콘디비는 스승이 스스로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 적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후원자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해 정원을 장식했으므로 그의 정원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캠퍼스와도 같았다.
로렌초는 정원의 책임자로 나이가 든 베르톨도를 고용했는데, 그는 도나텔로의 조수들 중 하나로 피렌체의 주요 예술가들 축에는 끼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알려졌는데, 도나텔로의 제자이자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서 그가 15세기와 16세기 조각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점은 지적할 만하다.
그리고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라고 말할 수 있는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또한 미술사에서 그를 기억하게 해준다.
그곳에 있는 고대 유물들은 베르톨도에 의해 재능을 인정받은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만 드로잉이 허락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할머니 부오나르로티는 메디치가와 먼 친척뻘이었으므로 이런 이유로 로도비코는 아들로 하여금 메디치 장학금을 받게 했다.

그라나치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메디치 정원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정원에서 수학하던 피에트로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알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경쟁심을 가진 토리지아노는 훗날 영국으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다.
토리지아노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의 코를 부러뜨린 후 극적으로 달라졌다.
두 사람은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에서 드로잉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토리지아노의 드로잉을 보고 놀리자 화가 난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미켈란젤로의 코를 쳤는데 그만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미켈란젤로의 코는 원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벌을 피하기 위해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별로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가서 1509~10년에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을 위해 일했으며 1511년경 영국으로 가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512~18년 헨리 7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는데, 순수 르네상스 양식을 영국에 소개한 작품이 되었다.
그는 1522년 헨리 8세의 무덤을 건립하다 방치한 채 스페인으로 갔다.
그는 마귀사냥과도 같은 마구잡이 이단자 탄압 정책에 의해 체포된 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켈란젤로 동문들 가운데 루스티치Rustici는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다가 온 사람으로 훗날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일했다.
또 다른 조각가로 바치오 다 몬텔루포Baccio da Montelupo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Raffaello da Montelupo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조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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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취리히 다다

다다의 성격과 표현 양태는 그것이 발생한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전통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우상을 타파하며, 혁명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과격하고 도발적인 미래주의 기법을 과장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 사회의 기준과 규범을 맹렬히 공격했고,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대상으로 삼았으며,
반예술의 풍자적 패러디를 통해 예술의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다다의 허무주의적 분규 이면에 내재한 긍정적 목적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일이란 어렵다.
다다가 한창일 때는 긍정적 목적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되돌아볼 때 다다를 주도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격렬한 운동에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예를 들어 취리히 다다의 일원으로 화가,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는 1964년 <다다. 예술과 반예술>에서 다다는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새로운 예술 윤리를 가졌으며, 이것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표현수단을 탄생시켰다고 적었다.
새로운 윤리는 때로는 긍정적 형태를 때로는 부정적 형태를 취했고, 어떤 때는 예술로 어떤 때는 예술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상당히 도덕적인가 하면 철저하게 비도덕적이었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고한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무차별한 살육장으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와 같은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그리고 상징주의 작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에 등장한 기괴한 장면과 허세에서 이미 조짐이 나타난 적이 있었고,
데 키리코와 샤갈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시각적인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의 예술가들로 알려진 데 키리코와 샤갈은 이성이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인 독일인 시인이며 음악가 휴고 발은 어린아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 예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1916년 일기에 적었다.
다다는 1916년 2월 발이 취리히 슈피겔 가 1번지에 예술 활동의 중심으로 카바레 볼테르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가수 에미 헤닝스(1919~53), 루마니아 시인이며 뒤에 <다다> 지의 편집장을 역임한 트리스탄 차라, 독일 시인 리하르트 휠젠베크(1892~1974)가 그와 함께 했으며,
1916년 말경에는 오스트리아의 허무주의 시인 발터 제르너가 동참했다.
미술가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마르첼 잔코, 알사스 출신의 장 아르프, 1922년에는 후에 아르프와 결혼하게 되는 조피 토이버-아르프가, 1917년에는 독일 화가 겸 영화제작자 한스 리히터가 합류했다.
카바레의 포스터는 우크라이나의 미술가 마르셀 슬로트키가 제작했다.

다다란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리히터는 1917년 그룹에 가입했을 때 차라와 잔코가 슬라브어로 이야기하면서 다-다(예, 예)하는 것을 보고, 다다란 용어가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휠젠베크는 다다란 용어는 자신과 휴고 발이 독불 사전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어에서 다다dada는 장난감 목마를 의미한다.
발은 “독일인에게 이것은 백치 같은 순진함과 출산에의 집착을 뜻한다”고 했다.
발은 이어서 “우리가 다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허함에서 뽑아낸 어리석은 행위이며 투사의 몸짓이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시작한 놀이 ... 위선적인 도덕성을 단죄하는 공개처형이다”라고 했다.

취리히로 도피한 예술가들은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본능에 근거한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했다.
발은 자신의 볼테르 카바레에 전쟁으로 불만투성인 사람들을 초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새 정신으로 무장하는 연합을 결성하자고 종용하면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상이한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외쳤다.
그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잡지 <카바레 볼테르>를 6월에 간행했다.
서문에서 발은 다다란 말을 사용했고 다다란 용어가 프린트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발의 여자친구 에미 헤닝스, 잔코, 칸딘스키, 마리네티, 휠젠베크, 모딜리아니, 피카소, 데 키리코, 에른스트, 피카비아, 마르크, 코코슈카, 그리고 차라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이 잡지는 1916년 11월에 뉴욕에 도착했으며, 데 자야는 11월 16일 차라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난 이제 막 9월 30일자로 쓴 자네의 편지와 10권의 흥미 있는 다다 간행물을 받았네. ...
그것들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네.
뉴욕의 서점에서 자네의 간행물을 팔 수 있도록 알아봐야겠네.”
차라는 다다 그룹의 미학적 대변이었고, 7월에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출판했으며, 컬러 목판화를 잔코가 제작했다. 차라는 저서에서 다다를 정의했다.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독일 아기의 수마트라인 머리를 이치에 맞지 않는 총검들로 장치한다.
다다는 양탄자 슬리퍼나 유사한 물건들이 없는 인생이다.
다다는 통일 원하면서도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

취리히에서 다다 잡지가 발행될 무렵 솜메에서 7월 1일에 벌어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에서 6만여 명의 영국인이 생명을 잃었는데,
이는 하루에 발생한 사상자로는 가장 많은 수였다.
영국 군대는 처음으로 탱크를 사용하여 독일 군대와 힘을 겨루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치열할 때 차라는 저서에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색으로 오줌 눌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고 적었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원시주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미술의 가장 초보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15년 취리히에서는 세계대전의 도살장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모여 순수미술을 추구했다.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우렁찼으나 우리는 풀로 붙이고, 시를 지으며 낭독하면서 모든 혼으로 노래했다.
우리는 기본미술을 찾았으며, 그것이 우리가 처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으로 천국과 지옥 사이의 균형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기를 동경했다.
그러나 이런 미술은 차츰 비난의 목표물이 되었다.
‘산적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첫 다다의 밤을 1916년 7월 14일 볼테르 카바레에서 열면서 음악, 춤, 이론, 선언문, 시, 그림 등이 있는 가면무도회를 성대히 벌였다.
발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에미 헤닝스의 노래, 발의 스크리아빈과 바레즈의 음악연주, 미래주의자 루솔로의 소음음악과 유사한 소음음악을 반주로 한 시 낭송, 드럼을 사용한 흑인 리듬 음악의 즉흥적 연주,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여러 소소한 해프닝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뒤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요 특징이 되는 자동주의 시와 집단 작곡 등의 실험이 행해졌다.
발은 추상적 혹은 음성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시를 써서 어리둥절해하는 청중을 향해 낭독했다.
그들은 잔코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입체주의의 춤을 추었으며, 아프리카의 음악을 들으며 새로운 미학을 주장하면서 모처럼 광란의 밤을 보냈다.
잔코는 그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뒤샹 139)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들은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언문에 나타난 과격한 언어의 구사와 소란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의장을 선출하고서는 의장을 무시하거나 격하하는 언행을 즐겼는데,
그들의 허무주의는 좀더 사회비평주의에 가까웠으며, 완전히 새로운 미술과 시를 창조하려고 했다.

아르프는 ‘잘라낸 조각 그림’을 위한 밑그림에, 잔코는 석고와 철사를 사용한 구성물에 우연의 요소를 도입했다.
리히터는 아르프가 만족스럽지 않은 밑그림을 어떻게 찢어서 그 조각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는가를 묘사했다.
아르프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이 만드는 우연한 형태가 자신이 원한 대로 하나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그대로 맞추어 붙였다.
차라는 이 기법을 문학에 적용하여 신문에서 오려낸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붙여 우연 시를 만들었다.
차라는 1917~20년 <다다> 지의 편집을 맡았다.

차라는 1916년 7월 14일 ‘안티피린 씨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다다는 허약한 유럽 내에 국한되어 있다.
아무튼 똥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예술동물원을 모든 영사관에 걸려 있는 국기들로 장식하기 위해 온갖 색이 있는 똥을 볼 것이다.”

차라는 그때 겨우 스무 살에 불과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위스로 유학 왔으나 시에 심취하여 온 정열을 시에 쏟았다.
예술가들은 차라를 좋아했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실내에서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을 연결시켜 시라고 낭독하곤 했고,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전략상의 방법을 받아들여 혹평과 독설을 일삼았다.
신문에서 닥치는 대로 글을 모아 시라고 주장하는 이런 ‘우발적인 시’는 아르프의 자동주의 콜라주와 같았다.
아르프는 1916~17년에 많은 콜라주 작품을 제작했는데 사각모양의 종이들을 높은 데서 떨어뜨린 후 풀로 붙여서 <우연의 법칙에 의한 배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다에 대한 아르프의 이해는 취리히의 다다뿐만 아니라 뉴욕과 베를린의 다다를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다의 목적은 인간의 이성적인 오류를 분쇄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고 비이성적인 체계를 재건하는 것이다.
다다는 오늘 날 인간의 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을 비논리적인 얼토당토아니한 것들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큰 북소리로 행진하는 우리 다다의 의지이고, 비이성을 찬양하는 트럼펫 소리이다. ...
다다는 무감각함이 자연과도 같다.
다다는 미술을 대적하며 자연을 따른다.
다다는 자연처럼 직접적이다.
다다는 무한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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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1960년대 초 특기할 만한 두 전람회

1960년대에 미국에서는 헐리우드가 한창 성행했고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세계전역으로 보급되었다.
대중음악도 미국이 주도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뿐 아니라 앤 마가렛, 펫분, 도리스 데이, 짐 리브스 등 수출품목들이 넉넉했다.
미국의 예술이 장르별로 만개하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였다.
시각예술에서도 만개현상이 있어 쓰레기 예술이니 조립예술이니 하면서 쓰레기 예찬 미학이 있었고, 평면작업을 갑갑하게 느낀 예술가들은 설치예술(Installation)을 하면서 공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예술가들이 몸소 자신들을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도 이 시기에 잦았다.
1960년대 초의 뉴욕 화단은 마치 자유방임시대와도 같았다. 평론가들은 1970년대의 특징을 다원주의라고 하지만 필자는 다원주의가 196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본다.

1960년대 초에 특기할 만한 두 전람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1961년 말 모마(MOMA)에서 열린 ‘조립예술 The Art of Assemblage’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듬해 시드니 재니스(Sidney Janis) 화랑에서 열린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The New Realists’전이다.
윌리엄 세이츠가 주최한 ‘조립예술’전에는 입체주의 경향의 종이 콜라주와 사진 몽타주 외에도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과 쓰레기 조각 그리고 방 전체를 장식하는 환경예술까지 포함되었다.
1962년 10월에 개최된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에는 영국과 미국의 잘 알려진 팝아트 예술가들과 프랑스의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에서 이와 연계된 예술 행위를 하던 예술가들도 참여했는데, 미국에서는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참여했다.
팝아트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분명치는 않았지만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은 지난 수년 동안 몇몇 예술가들이 행위한 팝아트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신사실주의와 관련이 있는 팝아트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식이 없었지만 추상표현주의나 파리에서 성행하던 앵포르멜 아트(L'Art Informel)와는 구별되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그러한 경향의 미학을 추구했던 반면 영국과 미국의 예술가들은 근래의 대중적인 문화와 상업적이며 재현 가능한 이미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재니스 화랑에서의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은 팝아트가 현대미술에 주류로 등장했음을 고지했으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나아갈 통로를 열어주었다.
여기에는 라우센버그와 존스 두 사람이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래리 리버스의 역할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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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아픔이 나타난 뭉크의 작품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일찍이 겪은 죽음, 내성적인 성격, 사랑에 대한 실연, 정신병력 등 이 모든 것이 뭉크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영향보다는 문학적 영향이 더욱 크게 작용했는데, 예술가가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긍지가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이 모든 인간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서 <알파와 오메가>에 삽입한 삽화들은 매우 기괴한데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시인의 감성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29살 때 그린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과 32살 때 그린 <지옥에서, 자화상>을 예로 들면 기괴한 가면과 화염이 캔버스를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매우 시적인 느낌을 줍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1860)과 <인간의 유전>(1871)을 발표한 후 무신론이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오슬로에도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이 있었으며 뭉크도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1848)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에 대적했으며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슬로의 보헤미안으로 알려진 이들은 자유연애를 즐겼는데, 뭉크는 자유연애를 통해 사랑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 ‘하이베르크 부인’이라고 적은 해군 군의관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첫 키스를 바쳤고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했지만, 뭉크보다 세 살 많은 하이베르크 부인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런 기질이 뭉크를 격분시켰으며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1889년 26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6년 동안 연애하면서 뭉크는 여인의 거짓말과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여성 전체에 대한 가증스러운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이베르크 부인은 마돈나이면서 동시에 메두사였던 것입니다.

1900년을 전후해서 뭉크는 툴라 라르센을 통해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됩니다.
뭉크가 그녀를 만난 것은 1898년 9월이었고 뭉크의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성격이 매우 강한 여자였고 가정을 이루어 구속받기를 거부한 뭉크는 결혼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르센은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고 뭉크는 더이상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라르센은 병이 난 것처럼 꾸며 뭉크의 친구를 통해 뭉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뭉크는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뭉크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라르센은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뭉크는 권총을 빼앗으려고 그녀와 옥신각신했으며 이런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어 그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관통했습니다. 1902년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이베르크 부인과 관련 있는 작품이 <달빛>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뭉크의 채색석판화 <붉은 머리의 누드>에 허리에 닿을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나옵니다.
5년 후 그린 유명한 그림 <마라의 죽음>은 바로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죽음이 뒤섞인 모티프입니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 그렸습니다.

이후 뭉크의 정서가 더욱 불안정해지면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1902년에는 한 남자를 구타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며,
1904년에는 코펜하겐의 한 술집에서 결투를 벌인 죄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르웨이 화가 루드비히 카스테른과 격렬한 싸움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1935년에 그린 <결투>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카스테른과의 결투를 소재로 한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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