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아픔이 나타난 뭉크의 작품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일찍이 겪은 죽음, 내성적인 성격, 사랑에 대한 실연, 정신병력 등 이 모든 것이 뭉크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영향보다는 문학적 영향이 더욱 크게 작용했는데, 예술가가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긍지가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이 모든 인간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저서 <알파와 오메가>에 삽입한 삽화들은 매우 기괴한데 보통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시인의 감성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29살 때 그린 <여자 가면 아래의 자화상>과 32살 때 그린 <지옥에서, 자화상>을 예로 들면 기괴한 가면과 화염이 캔버스를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매우 시적인 느낌을 줍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1860)과 <인간의 유전>(1871)을 발표한 후 무신론이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오슬로에도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이 있었으며 뭉크도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1848)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에 대적했으며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슬로의 보헤미안으로 알려진 이들은 자유연애를 즐겼는데, 뭉크는 자유연애를 통해 사랑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 ‘하이베르크 부인’이라고 적은 해군 군의관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첫 키스를 바쳤고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했지만, 뭉크보다 세 살 많은 하이베르크 부인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런 기질이 뭉크를 격분시켰으며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1889년 26살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6년 동안 연애하면서 뭉크는 여인의 거짓말과 이중적인 태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여성 전체에 대한 가증스러운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이베르크 부인은 마돈나이면서 동시에 메두사였던 것입니다.

1900년을 전후해서 뭉크는 툴라 라르센을 통해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체험을 하게 됩니다.
뭉크가 그녀를 만난 것은 1898년 9월이었고 뭉크의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습니다.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성격이 매우 강한 여자였고 가정을 이루어 구속받기를 거부한 뭉크는 결혼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르센은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고 뭉크는 더이상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라르센은 병이 난 것처럼 꾸며 뭉크의 친구를 통해 뭉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뭉크는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뭉크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라르센은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뭉크는 권총을 빼앗으려고 그녀와 옥신각신했으며 이런 와중에 권총이 발사되어 그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을 관통했습니다. 1902년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 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이베르크 부인과 관련 있는 작품이 <달빛>입니다.
그리고 부유한 상인의 딸 라르센은 뭉크의 채색석판화 <붉은 머리의 누드>에 허리에 닿을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으로 나옵니다.
5년 후 그린 유명한 그림 <마라의 죽음>은 바로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죽음이 뒤섞인 모티프입니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 그렸습니다.

이후 뭉크의 정서가 더욱 불안정해지면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1902년에는 한 남자를 구타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며,
1904년에는 코펜하겐의 한 술집에서 결투를 벌인 죄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르웨이 화가 루드비히 카스테른과 격렬한 싸움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1935년에 그린 <결투>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카스테른과의 결투를 소재로 한 작품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