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메디치 정원에서 베르톨도 디 조반니 문하에서 조각을 수학했다.
베르톨도는 상 마르코 수도원 근처에 있던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
그는 작은 청동조각을 주로 제작한 조각가였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그로부터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제자 콘디비는 스승이 스스로 돌 깍는 법을 배웠다고 적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후원자 로렌초는 고대 조각품들을 수집해 정원을 장식했으므로 그의 정원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캠퍼스와도 같았다.
로렌초는 정원의 책임자로 나이가 든 베르톨도를 고용했는데, 그는 도나텔로의 조수들 중 하나로 피렌체의 주요 예술가들 축에는 끼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알려졌는데, 도나텔로의 제자이자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서 그가 15세기와 16세기 조각에 교량적인 역할을 한 점은 지적할 만하다.
그리고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라고 말할 수 있는 메디치 정원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또한 미술사에서 그를 기억하게 해준다.
그곳에 있는 고대 유물들은 베르톨도에 의해 재능을 인정받은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만 드로잉이 허락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할머니 부오나르로티는 메디치가와 먼 친척뻘이었으므로 이런 이유로 로도비코는 아들로 하여금 메디치 장학금을 받게 했다.
그라나치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메디치 정원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정원에서 수학하던 피에트로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알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에게 경쟁심을 가진 토리지아노는 훗날 영국으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다.
토리지아노의 운명은 미켈란젤로의 코를 부러뜨린 후 극적으로 달라졌다.
두 사람은 브랑카치 예배당Brancacci Chapel에서 드로잉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토리지아노의 드로잉을 보고 놀리자 화가 난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미켈란젤로의 코를 쳤는데 그만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미켈란젤로의 코는 원상으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주저앉았고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벌을 피하기 위해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이리저리 방랑하면서 별로 중요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가서 1509~10년에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을 위해 일했으며 1511년경 영국으로 가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512~18년 헨리 7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무덤을 건립했는데, 순수 르네상스 양식을 영국에 소개한 작품이 되었다.
그는 1522년 헨리 8세의 무덤을 건립하다 방치한 채 스페인으로 갔다.
그는 마귀사냥과도 같은 마구잡이 이단자 탄압 정책에 의해 체포된 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켈란젤로 동문들 가운데 루스티치Rustici는 베로키오의 문하에 있다가 온 사람으로 훗날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일했다.
또 다른 조각가로 바치오 다 몬텔루포Baccio da Montelupo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 라파엘로 다 몬텔루포Raffaello da Montelupo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조수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