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조셉 코넬은 버려진 물질들을


조립(Assemblage)이라는 말은 1953년 장 뒤비페가 입체주의 콜라주보다 더 많은 물질들을 부착하는 작품들을 지칭하여 부른 말이다.
1961년 모마에서 열린 ‘조립예술 Art of Assemblage’전에는 뒤비페의 작품뿐 아니라 비예술적 재료들을 사용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는데 라우센버그도 이 전람회에 참여했다.
쓰레기 예술은 곧 미술계의 주류로 등장했다.
윌리엄 세이츠는 새로운 예술로 부상한 조립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것은 색을 칠하거나 드로잉하거나 깎거나 모방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조립하며,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이미 형태를 갖춘 물질이나 공장의 생산품들 또는 예술적 재료가 아닌 것들을 예술품의 요소로 사용하는 구성예술을 말한다.

영국의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는 쓰레기를 조립하여 예술품을 제작하는 행위를 말 그대로 쓰레기 예술(Junk Art)이라고 불렀다.
쓰레기 예술가들은 도시에 버려진 물질들을 잠재미학적 물질로 가정하면서 그것들을 사용한 작품으로 전통적인 예술에 도전하려고 했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시도는 피카소의 콜라주 구성과 정물화에서 이미 나타났다.
우리는 피카소가 색칠한 나무 조각에 철사 줄로 기타 줄을 표현했고 소리통을 상징하는 깡통을 달아 제목을 〈기타〉(그림 51)라고 붙였으며,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조립하여 〈황소 대가리〉란 제목의 조각을 만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물질의 사용은 뒤샹의 특허라 할 수는 없다.
다만 뒤샹이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선택하는 행위조차 예술가의 창작이라고 주장했으므로 레디메이드 미학을 그와 연계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 후 다다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콜라주 작품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질들이 속속 나타났다.
쿠르트 슈비터즈는 자신의 집 전체를 쓰레기로 가득 채웠는데 장 아르프의 아내가 사용했던 브래지어도 있었고 시인친구가 사용했던 몽당연필도 있었다고 한다.
뒤샹과 슈비터즈의 미학은 뉴욕 스쿨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상속되었다.

쓰레기 예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조셉 코넬은 버려진 물질들을 개인적인 상자 안에 배열하는 방법으로 물질들에서 시와 노래 그리고 향수를 찾아냈다.
초현실주의가 여전히 유럽에서 성행하던 1930년대 초 유럽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뉴욕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소개되었을 때 코넬은 그들의 작품을 직접 관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뉴욕으로 온 유럽 예술가들 가운데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특히 많아 코넬은 그들로부터 직접 초현실주의 미학을 배울 수 있었다.
코넬의 작품 역시 유럽의 초현실주의 작품과 나란히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전람회는 그에게 행운이었고 고무된 그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 더욱 전념했다.

그가 유리를 부착시킨 상자 안에 낯선 물질들을 배열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상투적인 개인적 꿈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상자 안에는 오래된 사진, 지도, 때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19세기 미국사람들의 그림도 들어 있었으며 깨진 유리조각, 코르크 공, 쇠 조각 등 다양한 물질들이 배열되었는데 그의 어린 시절과 그에게 감동을 준 문학과 예술을 뜻했다.
상자 안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그것을 그리워하는 꿈이 갇혀 있는 코넬의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억과 꿈을 상기하게 했다(그림 52).
그가 사용한 물질은 팝 물질이었으므로 코넬을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1950년대 중반 이미 만들어진 물질들을 콜라주했던 라우센버그와 존스도 코넬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인하지 않았다.

1967년 솔로몬 구겐하임 뮤지엄이 그의 회고전을 개최했을 때 코넬은 64세였다.
그의 상자 안에는 여전히 신비스러운 물질들이 들어 있었으며 잃어버린 과거가 향수를 자아내고 있었다.
코넬은 퀸즈에 거주하면서 어쩌다 맨해튼에 가면 골동품 상점에 들러 오래된 사진과 잘 알려지지 않은 기념품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1997년 퀸즈 뮤지엄(Queens Museum)의 개관 25주년 기념전에 코넬이 1930년대에 제작한 상자들도 전시되었다.
필자는 코넬의 상자들을 보고 그가 슈비터즈와 마찬가지로 고상한 사고를 가졌던 시인임을 알 수 있었다.
코넬이 상자 안에 자신이 원하는 물질들을 적절하게 넣음으로써 물질들은 더 이상 원래의 물질이 아니라 시인이 선택한 물질이 되었고, 또 예술가의 물질이 되어 사람들에게 미학적 경험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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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마타와 마더웰


1942년부터 뉴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온 유럽 예술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마타(1911~)가 먼저 뉴욕으로 와서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초현실주의 회화를 가르쳤다.
아슐리 고르키와 윌리엄 바지오츠 두 사람은 벌써 초현실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었고, 우연히 마타를 만난 부잣집 아들 로버트 머더웰(1915~91)이 그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자동주의 회화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치우렌으로 사람들은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산티아고 태생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마친 후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한동안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이브 탕기, 온즐로-퍼드와 함께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부른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자동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종종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차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타는 뉴욕에서 머더웰을 포함하여 젊은 예술가들에게 탕기와 뒤샹이 1920년대에 이미 발전시킨 게임을 소개했는데, 그 게임이란 서로가 무엇을 스는지 모르게 한 줄씩 쓴 후 그것들을 묶어서 한 편의 시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마타가 머더웰을 만난 것은 1941년 여름 멕시코를 여행할 때였다.
머더웰은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에서 뉴욕으로 온 무명화가였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머더웰은 유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명문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정신분석 이론으로 철학 학위를 받았으며 평생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 유럽 여행 중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앙드레 지드에 관한 논문을 썼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유럽을 여행한 후 1939년 여름 오리건 대학에서 미술 강좌를 맡아 학생을 가르쳤다.
1940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사피로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사피로는 초기 기독교 시대와 로마네스크 시대의 미술 연구에 중대한 공헌을 한 뛰어난 중세 연구가였으나 현대미술과 조각에 관해서도 글을 쓰고 강의했다.
사피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형태심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193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적 지적 전통의 원천을 현대미술의 분석과 그것의 발전에 대한 문제에 적용시킨 몇 안 되는 영어권 미술사학자 중 하나였다.

마더웰은 1941년 여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했고, 마타는 마더웰을 통해 자신의 회화방법을 미국에 알리기로 했다.
마더웰은 마타를 만나고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 가세하게 되었다.
1941년 이전까지 머더웰은 미술사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제대로 드로잉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피로에게 배우면서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은 욕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마타와 함께 석 달 동안 여행했는데 1967년에 있었던 언터뷰에서 “1941년 여름 불과 석 달 동안이었지만 마타는 내게 10년에 해당하는 초현실주의 교육을 시켰다”고 했으며, “막스 에른스트는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대가들로부터 초현실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한 후 대단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동주의 기법을 실습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모든 그림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로서 의식과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합성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곧은 선, 디자인한 형태, 색의 중량, 그리고 추상된 언어들이며, 무의식은 부드러운 선, 모호한 형태, 그리고 자동주의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마더웰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술가들과 폭넓게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주제들은 개인적인 감각들의 재현이었으며, 자유와 필연 사이의 지독한 불화에 대한 현대인의 경험을 배양된 반응들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융의 잠재의식보다는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에 대한 이론을 더욱 포용하는 것들이었다.
1940년대 초 마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스페인 공화국에 바치는 엘리지>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연작을 내놓았다.
대표작 <판초 빌라,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스페인 동란에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스페인 내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그림 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지성과 역사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마더웰은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도 동시에 받았으며 그림에서 항상 감성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동시에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피카소, 마티스, 그리고 시인이며 입체주의 예술가인 슈비터스의 콜라주 기법을 실험하면서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와 행위적인 것들을 동시에 성취하려고 했다.
그는 1946년에 <미학의 이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발견하거나 창조한 물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만족시켜주는 질이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의 소임으로 예술가는 잠들어 있을 때도 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1965년 4월 초에 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가까운 친구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해 5월 23일 5일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아 드로잉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그가 그린 드로잉은 565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선불교 회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당시 마크 토비를 포함한 몇몇 예술가들이 선불교의 영향은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런 그림들을 머더웰은 “간음하지 않은 자동주의”라고 칭하면서 도 닦는 중들이 무심한 상태에서 그린 글과 그림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선불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의존해서 수채화를 그리려고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기하적인 구성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종이에 물감이 젖어드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방법으로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의 그림은 당시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던 헬렌 프랑큰탈러, 모리스 루이스, 그리고 케네스 놀런드의 그림과 관련이 있었다.

마더웰의 작품을 뒤샹, 에른스트, 마송, 탕기, 브르통 모두 좋아했다.
그는 브르통이 뉴욕에서 창간한 <VVV>에 글을 기고했고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간행물 <현대미술의 서류>에 수시로 글을 발표했다.
페기가 그녀의 금세기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했고 모마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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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프랭크 스텔라는 말했다



스텔라는 뉴욕의 프랫 대학에서 강의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화에서 다양한 요소들의 균형을 이루어내고 대적하는 요소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좌우대칭이 필요하다.
좌우대칭은 모든 것들을 같게 해준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얼마나 심도 있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좌우대칭적 이미지와 구성(배치)은 그림에서 환상적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에 기하학적 균형이 깨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도달한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색밀도에 관해서는 나도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규칙적인 패턴을 사용함으로써 끊임없는 비례로 회화의 환상적인 공간을 소멸시키는 것이 그 방법이다.

좌우대칭과 3차원적 공간을 말살하는 것 사이의 관계는 호혜적이며 역설적이다.
스텔라는 “2차원적 공간에 관여하게 되면 좌우대칭이라는 자연적인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스텔라의 ‘규칙적인 패턴’이 갖는 의미는 끊임없는 비례로써 회화에서 환상적인 공간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결국 ‘끊임없는 비례’는 공간적 동등함의 열쇠가 되고 따라서 좌우대칭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스텔라의 이러한 방법은 단순히 몬드리안의 방법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더욱 진전된 것이며, 단순히 기하학적 예술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표현주의의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에너지에 규칙적인 패턴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텔라의 ‘비관계(Non-Relational)’이미지는 기하학적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폴록의 ‘전체적(all-over)’ 스타일과 연계되고 컬러필드 예술가 로드코와 뉴먼 등의 미학과도 상통했다.
스텔라는 “폴록은 그린다는 생각을 아예 할 수 없도록 했다. 폴록은 진정으로 추상에 관해 생각할 필요를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1960년 모마에서 열린 ‘16명의 미국 예술가들’전에 스텔라가 포함되었으며 사각모양에 줄을 친 구성은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V자 형태이더니 나중에는 U자와 L자로 바뀌었다.
그는 기하학의 역할과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원리를 거꾸로 사용했다.
그는 좌우대칭의 격자모양을 사용하거나 색을 줄로써 반복하면서 조직적 진전과 등급체계를 중화시켰다.
균형 잡힌 좌우대칭과 주제의 반복은 미니멀리즘 또는 기초 조각(Basic Sculpture)의 실험과도 같았다.

스텔라를 눈여겨보던 레오 카스텔리는 1960년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워홀은 새로운 알루미늄 시리즈를 소개한 이 전람회에 가서 스텔라의 재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해에도 스텔라는 카스텔리 화랑에서 그림을 소개했는데 그때부터 평론가들은 그가 장차 뉴욕 스쿨을 대표할 만한 예술가임을 눈치챘다.
다음해인 1961년 알프레드 바와 모마의 책임자 도로시 밀러의 초청으로 스텔라는 25세의 나이에 모마에서 그림을 소개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는 검정 시리즈를 소개했는데 그림이 수직 또는 대각선으로 평행이 되도록 했으며, 수직선이나 대각선이 중심을 향하는 구성을 보여주었다.
스텔라는 시적이거나 신비적인 것들을 그림에서 모두 배제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는 3차원 형태에 색을 칠한 릴리프를 역동적인 조직과 순수색으로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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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와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질문의 답
 

  탈레스는 철학의 할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데, 그가 철학자로서의 규범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부분적인 기록으만 전해오는데,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 Theaetetus>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탈레스가 하늘의 별을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졌을 때 동행하던 영리하고 재치 있는 트라키아인 하녀가 말했다고 하는 재담이 있다. 그녀는 탈레스가 하늘에 떠다니는 것을 알려는 열망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발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모든 철학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적었습니다.

탈레스는 주변의 현상들에 관심이 많았고 모든 사물들에는 공통적인 영원불변하느 연관되는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the Many가 the One과 관련이 있다는 기발한 사고였으며 물이 바로 모든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여
Everything is made of water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물을 모든 사물의 본질로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단순히 사건들을 관찰하다가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만물의 영양소가 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열이 수분에서 발생하며 수분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또한 만물의 씨앗들이 수분을 가지며 그 수분의 근원은 물이라는 사실로부터 탈레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탈레스의 만물의 구성에 대한 분석은 그가 세계의 본질에 관련된 질문을 제기한 것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만물이 물로 되었다는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말하면 만물의 본질을 생각한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해서 이후의 사람들이 과학적인 탐구를 계속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탈레스의 젊은 제자 아낙시만더Anaximander는 스승과 같이 단일한 본질이 만물을 구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고 어떤 특수하거나 구체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물도 다른 많은 요소들 중 하나로 보고
근본적인 요소는 형태를 갖추지 않은indefinite 또는 무한boundless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본질 혹은 실체를 '비결정적 무한성 the indeterminate boundless'으로 표현함으로써 형태를 갖춘 일반 사물들과 분리시켰습니다.

"하나의 영원한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삼라만상이 생겨났다"는 것이 그의 사고였습니다.

밀레토스 학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아낙시만더의 젊은 친구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한성이라는 친구의 개념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개념은 애매모호하고 임의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나의 특정한 본질에 대한 탈레스의 생각과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무한성이라는 아낙시만더의 새로운 개념을 결합하는 시도로서 그는 공기air를 제1의 본질 혹은 실체로 지목했습니다.
만물이 공기로부터 비롯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밀레토스로부터 조금 떨어진 사모스Samos 섬 사람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이 숫자로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말한 숫자는 비례를 의미합니다.
수와 크기의 상호관계는 우주 내의 구조와 질서의 원리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고 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만물은 수라는 말은 모양과 크기를 갖는 만물의 기초에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와 추종하던 수학자들은 대수로부터 기하로, 더 나아가 실재의 구조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만물은 유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같은 강물로 두 번 걸어들어갈 수 없다"면서 영원한 변화의 개념을 말했습니다.
변화를 다양성 속의 우선적인 것으로 사유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는 그 어떤 것으로 불을 꼽았습니다.
불은 일종의 결핍인 동시에 일종의 과잉이기 때문에 늘 무엇인가를 섭취하면서 동시에 늘 무엇인가를 열이나 연기 혹은 재의 형태로 소모한다고 보았습니다.
불은 변형의 과정이며 그러므로 불이 섭취한 어떤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물은 불의 교환이며 불은 만물의 교환이라고 했습니다.

헤라클리에토스보다 젊은 동시대인이며 엘레야 학파의 창시자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변화를 다양성 속의 제일성으로 설명하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시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기원에 관한 밀레토스 학파의 이론들을 비판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전적으로 연속적이다. 그 이유는 존재는 존재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존재의 무변화성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근본 이념을 채용했으며, 이를 기초로 가시계可視界와 가지계可知界를 확실히 구분했습니다.
플라톤은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부터 자신의 객관적이며 영원한 이데아를 추론해냈습니다.

이선종님,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영어로 된 것인데,
꼭 그 책이 아니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한 책이 서점에 있을 것입니다.
철학이 형성되기 이전 사상가들의 사유방식을 아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유가 인도인들의 것과 유사하며 불교가 말하는 水地火風과 일치한다는 건 흥미를 더하여 줍니다.
그럼 철학 공부에 결실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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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와 칸딘스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발터 그로피우스(뒤샹 235)가 1919년 바이마르에 세운 미술과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가 ‘집을 짓다’란 의미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켜 바우하우스란 말로 만든 것으로 이 학교를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라고 명명했다.
베를린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그로피우스는 1907년 페터 베렌스의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부소장이 되었다.

그는 1918년에 작센 대공의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조형예술대학을 통합하여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처음에는 바이마르에서, 1925~28년에는 데사우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지방선거에서 우익집단이 세력을 장악하면서 지원금이 끊어지자 1925년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데사우의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다.
그때부터 바우하우스는 디자인 대학이 되었고 교사들은 교수로 불렸다.
그로피우스의 창립 선언에 의하면 바우하우스의 목적은 건축을 구심점으로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즉 윌리엄 모리스가 주창한 대로 모든 예술은 공예처럼 실용적이어야만 하고, 건축물과 그 내부의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게잠트쿤스트베르크Gesamtkunstwerk, 즉 총체예술작품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는 1923년에 하우하우스의 중심 이론이 된 산업적 대량생산에 있어서 장인-미술가-디자이너의 중요성에 대한 개념을 추가하여 바우하우스의 작업실을 기계로 생산되는 제품의 기본 디자인을 개발하는 연구소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만의 독특한 양식은 특정한 개인의 감정을 배제하며 기능적이다.
또한 사용될 용도에 적당한지 여부에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재료의 속성을 깊이 연구하여 선과 형태를 정밀하게 다듬었다.
바우하우스는 1932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했고 이듬해에 나치에 의해 폐교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음에도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였으며 디자인과 산업기술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차별한 이전의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로피우스는 뛰어난 교사들을 바우하우스로 불러모았다.
최초의 기초과정 책임자는 요하네스 이텐이었고, 1923년 그가 떠나자 라슬로 모흘리-나기가 그 뒤를 이어 그로피우스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모흘리-나기는 이텐의 형이상학적 접근을 엄격하게 이성적인 방법으로 바꾸었다.
포름마이스터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비롯하여 몇몇의 유명한 화가들이 참여했다.
그로피우스가 1928년 개인적인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갑자기 퇴직하면서 하네스 마이어를 교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많은 불평과 비난이 나타났는데 마르크스주의자인 마이어가 사회주의를 도입하고 정치학을 중요한 교과과정으로 택하여 학교의 전체 경향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모흘리-나기가 즉시 사임했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가 “사치품 대신 일용품”을 공급하기를 원했고, 대량생산품을 생산하는 공방을 장려했다.
마이어는 이런 접근법으로 상당한 지원금을 벌어들였지만 선전이 지배하는 미학 개념을 거부하던 대부분의 교수진은 매우 실망했다.
1930년 마이어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새로운 교장에 취임했다.

미스의 주요 과제는 바우하우스를 정치적인 제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나치당이 독일 전역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상황에서 우익의 반대자들은 쉽사리 바우하우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학교에는 적극적인 좌익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소란스러운 집회는 거의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미스는 제적방침을 세워두고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했지만, 1932년 데사우 의회는 학교를 폐쇄했다.
미스는 베를린의 사용되지 않는 공장을 임대하여 사설교육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33년 4월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미학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고 그들의 과격한 조형주의 창작을 북돋은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4일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1892년에 사촌 안자 치미아킨을 아내로 맞았으며, 1893년 모교 법대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칸딘스키는 실력 있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1895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인쇄공장의 예술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마담 블라바스키의 신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신지학은 오늘날 병든 이성주의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지성적인 분야로 알려졌다.

그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5년이었다.
그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전을 관람하고 크게 영향을 받아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이듬해 회화를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는 인상주의전에서 모네의 <건초더미> 시리즈에 매료되었다.
칸딘스키는 훗날 말했다.
“난 모네의 <건초더미>에 대한 인상을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사물이 그림에 필요한 요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가 뮌헨으로 갔을 때는 서른 살이었다.
그는 안톤 아츠베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의 창립회원이 되는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 뮌헨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은 아르 누보, 즉 독일어로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었고, 이 양식에 정통한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라는 아방가르드 전시협회를 창립했다.
그가 파울 클레를 만난 것은 1900년 슈투크의 화실에서 수학할 때였으며 그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칸딘스키는 직관에 의존하여 추상화를 추구하면서 색질을 강조했고, 상징주의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색의 서정시적 내용과 유연한 선을 최대한으로 이용했으며, 그림에 긴장감을 창조하면서 그림이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분위기의 판화적인 재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로 세잔, 마티스, 피카소를 꼽았다.

칸딘스키는 1910년과 1914년 사이 추상에 몰두했다.
밝은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제목을 <구성>, <즉흥>, <서정> 등으로 붙이면서 음악에서 제목을 구했다.
그는 1910년에 <추상 수채화>를 그렸는데 완전추상이었다.
회화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물을 전혀 모방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추상이란 개념은 사물을 덜 모방하면서부터 생긴 개념이었고, 그가 처음으로 사물의 묘사를 완전히 그림에서 배제했다.
1910년에 그가 체험한 것을 직접 청취함으로써 추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구할 수 있다.

“난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깊은 생각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 화실 문을 열었다.
그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 한 폭이 시야를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난 선 채로 불꽃이 작품에서 튀는 것을 보았다. 그 작품은 모든 주제를 상실했으며, 아예 사물도 알아볼 수 없고, 온전히 밝은 색덩어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좀더 가까이서 그것을 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이젤 위에 세워둔 나의 작품이었다.
한 가지 내게 분명해진 것은 사물의 형상은 나의 작품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으며 오히려 작품을 망친다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작품은 뮌헨 근교에서 그린 풍경화 중 하나였다.
그가 유채로 그린 <즉흥>은 1913~14년에 완성되었는데,
자연을 추상한 나머지 형상을 완전히 말소시킨 것이며,
오로지 선과 색으로만 그린 것으로 신지학의 유토피아 미학의 영향이 농후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추방되었다가 1921년 12월에 독일로 돌아왔다.
이듬해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빙으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가 되었다.
그와 클레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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