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마타와 마더웰
1942년부터 뉴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온 유럽 예술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마타(1911~)가 먼저 뉴욕으로 와서 미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초현실주의 회화를 가르쳤다.
아슐리 고르키와 윌리엄 바지오츠 두 사람은 벌써 초현실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었고, 우연히 마타를 만난 부잣집 아들 로버트 머더웰(1915~91)이 그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자동주의 회화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칠레계 프랑스 화가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티안 마타 에치우렌으로 사람들은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산티아고 태생 마타는 1931년 산티아고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마친 후 1933년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서 한동안 제도가로 일했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1936년 스페인에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만나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받았다.
마타는 달리를 통해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을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이브 탕기, 온즐로-퍼드와 함께 초현실주의의 자동주의에 의한 제작 원리를 실행한 선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마타는 스스로 “심리학적 형태학” 혹은 “내면의 정경”이라 부른 자신의 초기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자동주의 기법을 이용하여 무의식적인 심상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는데,
종종 필적 같은 것으로 구성된 기묘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나 곤충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1940년대 초 작품에서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고 충돌하는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형태들로 인해 역동적인 측면이 점차 증가되었다.
이런 공간은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은 우주 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마타의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타는 뉴욕에서 머더웰을 포함하여 젊은 예술가들에게 탕기와 뒤샹이 1920년대에 이미 발전시킨 게임을 소개했는데, 그 게임이란 서로가 무엇을 스는지 모르게 한 줄씩 쓴 후 그것들을 묶어서 한 편의 시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마타가 머더웰을 만난 것은 1941년 여름 멕시코를 여행할 때였다.
머더웰은 그 무렵 캘리포니아 주에서 뉴욕으로 온 무명화가였다.
워싱턴 주 애버딘 태생의 머더웰은 유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1932년 명문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정신분석 이론으로 철학 학위를 받았으며 평생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 유럽 여행 중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앙드레 지드에 관한 논문을 썼다.
1937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들라크루아의 <일기>에 나오는 미학 개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유럽을 여행한 후 1939년 여름 오리건 대학에서 미술 강좌를 맡아 학생을 가르쳤다.
1940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에서 마이어 사피로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사피로는 초기 기독교 시대와 로마네스크 시대의 미술 연구에 중대한 공헌을 한 뛰어난 중세 연구가였으나 현대미술과 조각에 관해서도 글을 쓰고 강의했다.
사피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형태심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193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적 지적 전통의 원천을 현대미술의 분석과 그것의 발전에 대한 문제에 적용시킨 몇 안 되는 영어권 미술사학자 중 하나였다.
마더웰은 1941년 여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했고, 마타는 마더웰을 통해 자신의 회화방법을 미국에 알리기로 했다.
마더웰은 마타를 만나고부터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 가세하게 되었다.
1941년 이전까지 머더웰은 미술사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제대로 드로잉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피로에게 배우면서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은 욕구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마타와 함께 석 달 동안 여행했는데 1967년에 있었던 언터뷰에서 “1941년 여름 불과 석 달 동안이었지만 마타는 내게 10년에 해당하는 초현실주의 교육을 시켰다”고 했으며, “막스 에른스트는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대가들로부터 초현실주의 미학을 직접 청취한 후 대단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동주의 기법을 실습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모든 그림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로서 의식과 무의식과는 전혀 다른 합성으로 나타난다.
의식은 곧은 선, 디자인한 형태, 색의 중량, 그리고 추상된 언어들이며, 무의식은 부드러운 선, 모호한 형태, 그리고 자동주의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마더웰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술가들과 폭넓게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주제들은 개인적인 감각들의 재현이었으며, 자유와 필연 사이의 지독한 불화에 대한 현대인의 경험을 배양된 반응들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융의 잠재의식보다는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에 대한 이론을 더욱 포용하는 것들이었다.
1940년대 초 마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스페인 공화국에 바치는 엘리지>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연작을 내놓았다.
대표작 <판초 빌라,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스페인 동란에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스페인 내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머더웰은 “이젤화의 전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벽화로서의 회화 개념을 완성시켜 그림 면의 통일성을 간직한 채 끝없는 측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지성과 역사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마더웰은 상징주의 시인들의 영향도 동시에 받았으며 그림에서 항상 감성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동시에 나타내려고 했다.
그는 피카소, 마티스, 그리고 시인이며 입체주의 예술가인 슈비터스의 콜라주 기법을 실험하면서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와 행위적인 것들을 동시에 성취하려고 했다.
그는 1946년에 <미학의 이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발견하거나 창조한 물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만족시켜주는 질이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의 소임으로 예술가는 잠들어 있을 때도 이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1965년 4월 초에 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가까운 친구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해 5월 23일 5일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아 드로잉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그가 그린 드로잉은 565점이었다.
그는 일본의 선불교 회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당시 마크 토비를 포함한 몇몇 예술가들이 선불교의 영향은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런 그림들을 머더웰은 “간음하지 않은 자동주의”라고 칭하면서 도 닦는 중들이 무심한 상태에서 그린 글과 그림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선불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직관에 의존해서 수채화를 그리려고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기하적인 구성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종이에 물감이 젖어드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방법으로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의 그림은 당시 그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던 헬렌 프랑큰탈러, 모리스 루이스, 그리고 케네스 놀런드의 그림과 관련이 있었다.
마더웰의 작품을 뒤샹, 에른스트, 마송, 탕기, 브르통 모두 좋아했다.
그는 브르통이 뉴욕에서 창간한 <VVV>에 글을 기고했고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간행물 <현대미술의 서류>에 수시로 글을 발표했다.
페기가 그녀의 금세기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게 했고 모마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