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앨런 캐프로는 해프닝과 이벤트의 미학을


해프닝(Happening)은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주로 행해졌던 비연극적, 탈장르적인 표현운동이다.
해프닝이 하나의 장르로 나타난 것은 1950년대 후반 앨런 캐프로와 올덴버그, 그룸즈, 짐 다인 등이 일련의 행위예술을 보여주고부터였다.
최초의 해프닝으로 꼽는 것은 1952년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있었던 존 케이지의 행위이다(그림 61).
1957년 타운홀(Town Hall)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케이지는 과연 해프닝의 선구자라 불릴 만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무대로 가야 할 것이다.
무대예술은 음악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는 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도 있으며 눈과 귀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할 일이다.

그러나 해프닝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해프닝에 미학을 부여하고 해프닝을 독립된 예술 장르로 만든 예술가는 앨런 캐프로였다.
과거에 한스 호프만으로부터 수학하고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던 캐프로는 케이지로부터 2년 동안 수학하고는 그의 영향으로 해프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58년 뉴저지 주에 있는 조지 시걸의 농장에서 열린 피크닉에서 해프닝을 처음 시도했다.
캐프로와 몇 예술가들은 예술이 추상회화와 쓰레기 조각에서 더 진전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폴록의 영향을 받은 그는 회화에 제스처가 사용되는 것 이상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아예 행위 자체를 예술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해프닝이라고 할 만한 캐프로의 작품은 1959년 10월 루벤(Reuben) 화랑에서 소개한 〈6부분으로 나눈 18개의 해프닝〉이었다.
캐프로는 뉴저지 주 럿거스 주립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로버트 화이트만이 그로부터 수학한 첫 해프닝 예술가였다.
1958년 《잭슨 폴록의 유산》이라는 글에서 캐프로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기교적인 기술과 고정관념들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소멸되어버릴 매체들, 예컨대 신문, 끈, 접착 테이프, 자라나는 풀, 음식물 등은 곧 먼지나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캐프로는 폴록이 어떻게 잡다한 물질들을 물감에 섞어서 사용했고 소멸되어버릴 물질들을 그의 작품에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살펴보고, 폴록의 그림에서 실제 경험과 예술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예술이 더 이상 자아를 나타내거나 인생으로부터 격리된 실체가 아니라 인생과 함께 계속된다는 것을 알았다(그림 62).
캐프로는 해프닝과 이벤트의 미학을 이렇게 피력했다.

폴록은 우리가 매일매일 주위의 물체와 공간에 의해 황홀해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했고 …… 우리의 다른 감각들은 그림으로는 만족할 수 없음을 일러주었으며 우리가 시각, 소리, 행위, 사람, 냄새, 촉각의 독특한 물질들을 최대한 유용하게 해야 함을 알려주었다.
새로운 예술의 재료로서 물감, 의자, 음식, 전기나 네온사인, 연기, 쓰레기, 낡은 양말, 개, 영화 외에도 천 가지나 되는 물질들이 오늘날의 예술가들에 의해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항상 대하면서도 잊고 있던 것들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해프닝과 이벤트로 나타날 것이고 쓰레기 깡통, 경찰관의 서류, 호텔 로비, 상점의 쇼윈도와 거리에서 본 것들, 그리고 꿈과 놀랄 만한 우연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도 해프닝과 이벤트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프닝과 이벤트는 캐프로에 의해 미학을 가진 하나의 예술행위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사람과 물질이 극적인 사건의 콜라주처럼 관객들 앞에 출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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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에 대한 평가
 

  브뢰겔에 대한 평가는 그가 타계하기 2년 전인 1567년에 나왔다.
루도비코 기차르디니는 저서 『네덜란드 남부 전체에 관하여 Description of All the Low Countries』에서 브뢰겔을 가리켜서 보스의 “위대한 모방자 great imitator”라고 적었으며 그를 “제2의 보스”라 칭했다.
이듬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도 브뢰겔을 보스와 관련지우면서 “뛰어난 마스터 excellent master”라 불렀다.
바사리는 두 화가의 년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두 화가를 “유채로 풍경을 그리고, 환영과 기괴한 것들, 꿈 그리고 상상한 것들을 그렸다”고 적었다.
그는 브뢰겔이 풍경화와 환영적인 장면을 주로 그린 화가로 분류했다.
바사리는 리제의 도미니쿠스 람프소니우스Dominicus Lampsonius of Liege의 자료를 참조했는데,
람프소니우스는 브뢰겔이 타계한 지 3년 후인 1572년 자신의 친구가 제작한 브뢰겔의 초상화(메트로 3)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적었다.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 새로운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누구인가?
붓과 펜으로 보스의 혼이 있는 꿈을 모방할 수 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능가할 수 있는 빼어난 예술성을 지닌 그는 누구인가?
옛 대가의 익살스러운 디자인 장르를 위한 예술에 몰두한 피테르는 어느 예술가보다 못하지 않다는 칭찬을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들을 것이다.


람프소니우스는 브뢰겔의 재능으로 펜놀림과 디자인을 꼽았으며 유화보다 이 둘을 장점으로 꼽은 건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견해이다.
그는 브뢰겔이 익살스러운 디자인 장르에서 최고의 화가라고 높이 평가했는데,
이 장르는 일반적으로 등급이 낮게 취급되어 왔다.
브뢰겔의 친구 오르텔리우스는 보스를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브뢰겔이 “그려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그렸다”는 말로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화가라고 적었다.
그는 브뢰겔의 자연주의를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대가 유폼파스Eupompas에 견주면서 “다른 예술가들을 따르기보다 자연을 따랐다”는 말로 칭찬했다.
이와 유사한 칭찬을 반 만데르도 1604년에 발간한 브뢰겔 일대기에서 적었다.
그렇지만 기차르디니와 마찬가지로 바사리, 람프소니우스, 그리고 반 만데르 모두 브뢰겔을 보스의 모방자로 간주했으며 보스의 화풍을 따랐다고 적었다.
브뢰겔이 환영적인 주제와 자연주의 그림을 먼저 그린 화가는 아니더라도
현존하는 61점의 드로잉이 그가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Rogier van der Weyden, 그리고 보스와 견줄 만한 화가임을 입증해준다.

브뢰겔은 풍경화의 대가였다.
그가 가장 초기에 그린 풍경화로는 1552년에 그린 다섯 점이다.
이 시기 1551~52년 그는 안트베르펜 화가들의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많은 플랑드르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다섯 점은 그가 이탈리아로 여행하던 중에 그린 것들이다.
바사리가 지적한 대로 이 시기에 그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화풍을 배웠다.
다섯 작품을 살펴보기 전 그를 지도한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Pieter Coecke van Aelst가 1535년경에 제작한 <아이 시의 점령 The Capture of the City of Ai>(메트로 16)을 볼 필요가 있는데,
이 시기의 브뢰겔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보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으며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쿠케의 방법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브뢰겔에게 전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이 시의 점령> 왼편에 있는 나무는 쿠케가 풍경을 묘사하는 데도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브뢰겔이 이런 장르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스와 브뢰겔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발표된 두 사람에 관한 수천 점의 글과 두 사람의 작품에 과한 수백 권의 책 그리고 수없이 많은 미술사학자들의 논문이 말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에 관한 책이 단권의 번역서로만 나와 있을 뿐이라서 독자들에게 두 대가의 작품은 여전히 낯설을 것이다.
두 대가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보스에 대한 브뢰겔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으며, 당시 활약했던 플랑드르 화가들에 관해서도 넉넉하게 언급했으므로
네덜란드 회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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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풍경화가
 

  브뢰겔의 빼어난 풍경화의 토대는 1550년대 초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면서 연필로 소묘를 그리면서부터 생겼다.
소묘에는 수많은 획과 점묘들이 있다.
원근법적인 표현과 정확한 세부묘사 등이 눈에 띄지만 이런 요소들은 풍경화에 나타난 생생한 대기 등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그는 색채에 의존하는 깊이감의 표현과 전통적 구도를 따르기보다는 실재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 전력했다.
뒤러를 제외하고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등장하기 전 그처럼 사실 묘사에 충실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풍경 소묘를 제작한 화가는 일찍이 없었다.

1560년대에는 이전 화가들의 강한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기교로 미묘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엄격한 색채 공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대형 패널화와 밝은 색채 그리고 생기 있는 붓질은 보스를 연상하게 하지만
<월력화 The Months> 시리즈와 같은 풍경화에서는 풍자나 교훈적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월력화> 시리즈는 이 분야 최초의 작품으로 풍경화가로서의 그가 성취한 으뜸가는 업적이며 당대의 문인과 후원자들도 이 점을 인정해주었다.
그의 혁신적인 풍경화의 영향은 지대하지만 후계자들은 오히려 그의 풍속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피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같은 천재 화가는 브뢰겔의 풍경화가 빼어남을 인정했다.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 루벤스는 브뢰겔의 아들 얀의 친구였다.
얀이 1625년 부모의 무덤에 비문을 새겼을 때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으로 묘비를 장식했는데,
이는 브뢰겔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루벤스는 오르텔리우스가 소장한 <성모의 죽음>을 비롯하여 브뢰겔의 작품을 몇 점 소장했으며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카드놀이를 하다 다투는 농민 Peasants Quarrelling Over a Game of Cards>을 모사했다.
그는 브뢰겔의 작품을 연구했다.
그의 후기 풍경화는 브뢰겔의 <월별노동>을 상기시키는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준다.
후대의 네덜란드 화가들 가운데서 브뢰겔의 후기작이 지닌 기념비성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 루벤스였다.
루벤스와 같은 대가가 브뢰겔의 조형적 특징에 이끌린 건 당연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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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조지 시걸과 에드워드 키엔홀츠의 환경예술


예술 작품을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예술 경향을 가리켜 환경예술(Environmental Art)이라고 한다.
조립예술이 폭넓게 행위되면서 환경예술이 하나의 장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립을 환경예술로 확대하여 널리 알린 예술가들 가운데 에드워드 키엔홀츠, 조지 시걸, 프레데릭 키슬러가 있는데, 이들은 상황을 재현하여 관람자들이 그 상황을 스스로 경험하도록 유도했다.
최근에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연출하여 관람자들을 유도하는데 이 또한 진전된 환경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시걸은 어두운 잠재문학적 세계를 연출하면서 기분 나쁘게 창백한 세계를 조각으로 창조했다.
앨런 캐프로와 짐 다인,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어울리며 해프닝을 연출했던 시걸은 조각과 회화, 물체와 환경, 시각적 정교함과 시적 감상 사이의 전통적인 구별을 무시하려고 했다.
자신을 ‘물체 제작자(Object-Maker)’라고 부른 시걸은 한스 호프만으로부터 수학했으며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 조각으로 전환했다.
그는 수년 동안 캐프로와 가까이 지내면서 환경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걸은 엘리베이터, 점심식사를 파는 카운터, 극장 매표소, 버스내부 등의 실제 환경들을 연출하면서 그 안에 사람들의 모습을 제작하여 함께 구성시킴으로써 완전한 환경을 재현하려고 했다.
사람의 모습을 미완성품처럼 거칠게 그리고 유령처럼 제작하여 고독하고 신비스럽게 보이도록한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물체가 상황 속에 존재하듯 그렇게 존재할 뿐이었다(그림 59).

시걸이 석고를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1961년 여름 제자들에게 화가들이 가장 잘 사용하지 않는 물질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라고 가르쳤는데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망사 같은 얇은 천을 강의실로 가져왔다.
그는 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서 망사를 자신의 몸에 걸치고는 아내더러 자신의 몸에 석고를 바르라고 했으며, 석고가 마른 후 그것을 다시 떠내는 방법으로 실제 사람과 같은 조각을 창조할 수 있었다.

키엔홀츠는 날카롭고 극적인 긴장을 연출하여 환경을 신랄하고 기억할 만한 장면으로 만들었다.
그는 부도덕한 은유의 조작으로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야만스럽게 보이는 그의 사변적인 창조는 미국사람들의 도덕적 전통과 관련이 있다.
낙태, 애국심, 애욕주의, 정신적 붕괴 등의 주제를 선택하여 거의 문학적 장면과도 같은 환경을 연출했다.

그는 나무조각, 철사, 쓰레기를 조립한 후 색을 칠했고 마네킹 또는 인형의 부분들, 뼈, 해골, 동물인형, 천이나 쇠조각을 조립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1964-66년에 제작한 〈주립병원〉은 실제 병원에서 사용하는 테이블, 어항, 살아 있는 금붕어, 플라스틱과 파이버글래스로 제작한 사람모형, 나무, 물감, 쇠, 그리고 네온사인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키엔홀츠는 고통과 부정을 주제로 삼아 〈주립병원〉과 〈정신과병동〉을 공포스러운 환경으로 재현했으며, 불법낙태의 환경을 재현하면서 청교도주의의 이율배반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도 했다.
〈생일〉(그림 60)은 여인의 외로운 출산의 고통을 재현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폭로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 작품이다.

프레데릭 키슬러가 말년에 제작한 〈최후의 심판〉은 색칠한 널판자에 다른 물질을 혼용하여 조각으로 구성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가구 같기도 하며 사람들을 협박하는 음험한 종교의 교회당 내부처럼 보였다.
키슬러는 이러한 환경예술품에 조명을 사용하여 명암을 중요한 요소로 부각시켰다.
조명은 구성주의, 초현실주의나 표현주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같은 효과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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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나타난 상징과 우의 그리고 교훈
 

  브뢰겔이 일반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농민, 속담, 민속의 장면을 유머스럽게 그렸다고 해서 그를 농민화가로 본 견해는 후대 연구가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했다.
플랑드르 사회의 가장 부유하고 지식인 계층이 브뢰겔의 작품을 수집한 것으로 봐도 그가 농민일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브뢰겔의 친구들 중에는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지도제작자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1598)도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오르텔리우스의 『교우록 Album Amicorum』 중 추도문에 나타나 있다.
브뢰겔의 사후 몇 년 동안 집필된 『교우록』에서 오르텔리우스는 브뢰겔의 인간성과 그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런 지식인과 우정을 나눈 것을 보더라도 그가 농민화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브뢰겔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단지 유머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깊은 의미가 내재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이 그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심오한 철학적·도덕적 개념이 있으며
인간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구체화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되는 작품조차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교한 우의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을 묘사가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옳지 않으며 이런 태도는 보스의 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묘사된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브뢰겔의 창작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스와 브뢰겔의 시대에는 상징과 우의가 선호되었으므로 두 사람의 작품에 나타난 상징과 우의는 유행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교훈을 목적으로 제작하는 것도 당시에는 일반적 경향이었다.
따라서 브뢰겔이 관람자에게 주려고 한 교훈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보스와 브뢰겔의 작품은 당시의 예술적·사회적 환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브뢰겔에 있어서 주변 환경은 보스의 경우보다 중요하다.
보스의 문학적·시각적 영향은 상당 부분 중세의 유산에 속한다.
브뢰겔의 테마 역시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시사성을 함축한 점이 특기할 만하고
자신이 살아가던 복잡한 도시생활을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민중 연극, 종교적 축일 행렬, 민담과 속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에게 작품을 의뢰한 은행가, 상인, 인문학자들의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브뢰겔 당시 플랑드르 문화적·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가운데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그는 처음으로 플랑드르 도시의 삶을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화면을 통해 소개했다.
그의 작품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당시 플랑드르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속담과 아이들의 갖가지 놀이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삶의 현장을 시각화한 것이 아니라 유머를 첨가하여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적하고 관람자를 교화시키려고 했다.
이런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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